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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사선을 넘어서 (108/155)


108화. 사선을 넘어서
2023.02.13.



 


“여기까지가 좋겠군.”

스릉!

동시에 크리스틴의 레이피어가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스릉! 스릉!

그를 따라온 기사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왜 이러십니까?”

“누가 시켰지? 이자벨? 모리스?”

“그, 그게 무슨…….”

크리스틴의 입술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하긴 상관없겠지.”

스컥!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기사단장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래서 내가 편 먹는 걸 싫어한다니까. 다들 배신을 밥 먹듯 하거든.”

크리스틴은 칼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사이 잔뜩 무장한 병사들이 검은 성과 크리스틴 일행을 에워쌌다.


“그대가 바이스 백작인가?”

또각또각…….

병사들 사이를 가르며 눈부신 새하얀 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 올라탄 남자는 지금 막 만찬장에서 나왔는지 고급스러운 연회복을 입고 있었다.

짧게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겁먹은 것 같은 커다란 눈.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걸 보면 몹시 긴장한 것 같았다.

크리스틴은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짐작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러스티스 대공 전하.”

크리스틴은 깍듯하게 인사했지만 당당한 표정은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가 바로 이자벨의 아들.

죽은 얀을 대신해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듯 러스티스 대공은 두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교황청에서 그대를 원한다. 해서 나는 그대를 주고 칼라임의 평화를 얻을 것이다.”

“하, 평화?”

크리스틴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내가 전쟁터에서 피 칠갑을 하며 싸울 때 침대 밑에서 벌벌 떨던 놈이 잘도 지껄이는군.”

“네놈! 입 닥치지 못할까!”

“날 내준다고 교황청에서 순순히 물러갈까? 그걸 믿는다면 네놈은 겁쟁이에 똥 멍청이다.”

“닥쳐! 선황을 죽인 역도야!”

흥분한 러스티스 대공이 말을 몰아 돌진해왔다.

훌쩍!

기다렸다는 듯 그는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러스티스 대공의 말 위에 올라타 그의 목에 칼을 겨눴다.


“꼬맹이, 네놈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으윽!”

인질로 잡힌 대공은 울먹이며 가여울 정도로 몸을 떨었다. 조금전의 기세등등함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대공의 잘못은 내가 대신 빌도록 하죠.”

그때 이자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나타나자 병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섰다.

여전히 검은 상복을 입은 이자벨은 크리스틴의 앞으로 다가와 깎듯이 고개를 숙였다. 사죄라도 하는 사람처럼.


“만찬장에 있는 사제들의 음료에 약을 탔어요. 어느 정도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동료들을 구하세요.”

이자벨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크리스틴 일행을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대공의 병사들로 사제들은 보이지 않았다.


“부인의 말을 어떻게 믿지?”

하지만 크리스틴은 대공의 목에서 칼을 내리지 않았다.


“대공은 교황청과 싸우는 게 겁이 나서 그랬던 겁니다. 하지만 난 대공을 잃는 게 더 겁이 나는 사람이죠. 백작이라면 언제든 그 아이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으니까.”

다행히 이자벨은 아들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믿어보지. 대신 그린힐을 빠져나갈 때까지 대공은 내 인질이요.”

“무사히 돌려만 보내주세요.”

“어머니! 안 됩니다! 교황청에서 진노할 겁니다!”

이자벨은 소리치는 아들을 원망스럽게 보았다.


“잘 들으세요, 대공. 그대는 곧 황제가 되겠지만 스무 살 전까지는 이 어미가 섭정을 하게 될 겁니다. 그게 이 나라의 관례죠.”

“어머……!”

“러스티스 대공, 입 다물라! 병사들은 어서 포로들을 석방하라!”

이자벨은 무섭게 호령했다. 크리스틴의 눈 밖에 난 아들이 자칫 죽음을 초례 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아들은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건 약속했던 대가예요.”

이자벨은 크리스틴에게 금빛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두툼한 양장본 책처럼 생긴 상자였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다섯 개의 열쇠가 들어 있었다. 귀족회를 구성하는 다섯 가문의 상징이 조각된 열쇠였다.


“그리고 이건 레아나에게 돌려주세요.”

마지막으로 이자벨은 레아나의 펜던트도 건네주었다.


“이제 우리의 계산은 끝난 거죠?”

“다음엔 적으로 만나지 않길 바라시오. 이랴 핫!”

크리스틴은 러스티스 대공을 태운 말의 고삐를 힘차게 흔들었다.

***

깊은 밤.


“어, 저건 뭐지?”

닉서스 다리에서 경계를 서던 사제들은 밤하늘에 뽀얗게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보았다.

잠시 후 대지를 울리는 엄청난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두두두두……!


“습격이다!”

“경계를 강화해라!”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졸고 있던 사제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엄청난 속도의 말발굽 소리가 파도처럼 덮쳐왔다.

이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이스 백작! 백작이다!”

크리스틴을 선두로 백여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그대로 질주해 달려오고 있었다.


“쉴드를 쳐라!”

사제들은 닉서스 다리 앞에 인간 띠를 만들며 막아섰다.

잠시 후 기도 소리가 높아지자 푸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허공 위에 투명하고 거대한 장벽이 생겨났다.



“멈춰요! 사제들의 방어 쉴드예요!”

레아나가 소리쳤다. 그녀는 짐머의 말에 함께 타고 있었다.


“방어 쉴드라니?”

크리스틴이 급하게 말을 멈추며 물었다.


“마법으로 거대한 방패를 만든 거예요. 사제들은 모두 저 방패 뒤에 있어서 공격해도 데미지를 입힐 수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저 방패를 뚫기 전에는 다리를 건널 수 없죠.”

“뚫고 나갈 방법이 없나?”

그때 뒤따라오던 기사 한 명이 다급하게 보고했다.


“황궁에 있던 사제들과 교황청 기사단이 추격 중이라고 합니다! 곧 후미부터 공격받을 겁니다.”

이자벨이 먹인 약의 효과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 수는?”

“상급이상 사제들은 십 명이지만, 교황청 기사단이 5백 기(騎) 이상입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레아나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쉴드에 틈을 만들어 볼게요!”

“네가……?”

“교황청의 기도 주문은 제가 거의 다 알거든요. 당연히 파훼법도 알죠. 대신 마법을 쓰는 동안에는 나뭇잎 하나조차 절 건드려선 안 돼요. 왜냐하면…….”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엄청난 마나가 필요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기운이 흐트러지면 제 몸이 타버릴지 모르니까.”

쐐액!

그 순간 하늘을 가르며 푸른 불꽃이 날아왔다.


“황궁의 사제들 공격입니다!”

짐머가 소리쳤다. 곧이어 등 뒤에서 푸른 불꽃이 정신없이 날아왔다.

쐐액! 쐐액!

앞은 쉴드에 막혀서 갈 수가 없었고, 뒤에서 다섯 배가 넘는 병력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

더이상 시간을 지체하며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얼마나 걸리지? 쉴드에 틈을 만드는데?”

크리스틴은 재빨리 불꽃을 베어내며 물었다.


“5분이면 충분해요.”

“좋아, 레아나. 내가 보호해줄 테니 마법을 써라!”

말에서 뛰어내린 크리스틴은 인질로 끌고 왔던 러스티스 대공을 향해 말했다.


“살고 싶다면 가서 사제들에게 잘 빌어보던가!”

말의 엉덩이를 철썩 후려치자 대공을 태운 말은 놀라서 정신없이 내달려갔다.


“짐머!”

“예, 단장님!”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는 네가 단장이다!”

“염려 마십시오!”

 

***

레아나는 커다란 나무를 등지고 바닥에 마법 진을 그렸다.

그 한가운데에 서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사실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은 처음 써봐요.”

“……!”

크리스틴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그녀는 센 척하며 웃었다.


“목숨 걸고 펼치는 마법이라니 짜릿하네요.”

“그래, 빌어먹게 짜릿하군.”

쐐액!

날아오는 불꽃을 순식간에 베어내며 그가 다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목숨 걸고 지켜줄 테니.”

목숨 걸고…….

아버지 외에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은 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레아나는 시야를 가득 채운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까? 저 등이 그 어떤 성벽보다 든든하고 강인해 보인다는 걸.

아델에게도 그는 이토록 믿음직한 남자겠지?


“네, 믿어요. 나의 단장님…….”

레아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ঊਈਈպনঢ়…….”

이내 그녀와 마법 진 주위로 하얀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 그 빛은 너무나 눈에 띄었다. 사제들이 날리는 푸른 불꽃이 빛을 향해 달려드는 날벌레들처럼 수없이 날아왔다.

슈카악!

그때마다 레아나의 앞을 지키는 크리스틴의 칼에 베어져 나갔다.

잠시 후 레아나를 감싼 빛이 하나로 모이는가 싶더니,

쐐애액!

빠른 속도로 마법 쉴드를 향해 날아갔다.

끼리리릭! 끼익! 끼이익!

그 빛이 부딪치자 마치 쇠를 긁는 것 같은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허공 한가운데에 기다란 금이 생기며 아지랑이 같은 장막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기도에 집중해라!”

사제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짐머는 날랜 움직임으로 균열이 생긴 틈새로 재빨리 뛰어들었다. 그의 칼이 사정없이 날아가 사제들을 베어가기 시작했다.

슈카악!


“공격 마법을 펼쳐라!”

사제들은 이제 방어에서 공격으로 태세를 전환해 푸른 빛을 쏘아댔다.

하지만 공격 마법으로는 짐머와 크리스틴의 기사들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이미 수많은 전쟁에서 싸워온 가장 날랜 전사들.

사제들이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운용하기도 전에 칼날이 더 먼저 베어갔다.

하얀 사제복은 어느새 피로 붉게 물들고 잘린 팔다리가 사방에 나뒹굴었다.

곱상하던 짐머의 얼굴도 피에 젖고 눈매는 야수처럼 살기로 가득했다.

전투에서 짐머는 크리스틴에 버금가는 맹수가 되고는 했다. 모두 그걸 알기에 임시 단장인 짐머를 믿고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우우우웅……!

닉서스 다리 위에 펼쳐진 마법 쉴드가 서서히 걷혀갔다.

짐머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며 외쳤다.


“이제 단장님을 모셔온다!”

 

***



“……아나…… 레아나…….”

흐릿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레아나는 눈을 떴다.

크리스틴이 혼절한 그녀를 끌어안은 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쉴드는요?”

“덕분에 성공했다.”

레아나의 눈에도 보였다. 닉서스 다리 위에 펼쳐진 아지랑이 같은 장막이 사라진 것이.


“하, 다행…… 쿨럭!”

레아나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괜찮나?”

피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그녀가 웃었다.


“괜찮아요. 미련하게 힘을 다 쓰고 나면 이럴 때가 있어요. 그보다 단장님도…… 다치셨네요.”

레아나는 힘겹게 손을 들어 크리스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뺨에 기다란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네 걱정이나 해라.”

“기력이 남았으면 치유 마법을 썼을 텐데.”

“됐다. 그만 말해.”

크리스틴은 레아나를 안아서 말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뒤에 훌쩍 올라탔다.

레아나는 그 넓고 든든한 가슴에 쓰러지듯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러니까 진짜…… 아빠 같아…….”

“푹 자둬라, 꼬맹이. 이랴 핫!”

말고삐를 흔들며 그는 무서운 속도로 닉서스 다리를 향해 내달렸다.

그 뒤로 교황청의 기사들이 매섭게 따라붙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다들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짐머와 W.G 기사들이 길 한가운데 밧줄을 가로질러 놓아둔 것이다.

어두운 밤이라 말들이 밧줄에 걸려 넘어지며 교황청의 기사들도 여기저기 나동그라졌다.


“공격!”

그 혼란한 틈을 타 짐머와 W.G 기사들은 교황청 기사들을 순식간에 베어갔다.

어두운 밤의 숲이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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