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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마크의 아내 (109/155)


109화. 마크의 아내
2023.02.17.



“아델 양…….”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델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제니퍼가 침대 옆의 의자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아, 제니퍼……. 무사했네요.”

아델은 파리한 입술을 달싹여 웃었다.


“물론이죠.”

“얼굴이 창백해요. 어디 아픈 건가요?”

그는 평소보다 안색이 창백하고 두 눈이 퀭했다. 그런 얼굴로 씁쓸하게 웃으며 아델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답지 않게 목소리도 유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델은 그런 제니퍼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


“부탁이 있어요, 제니퍼. 몸이 회복되면 루스울프로 가주세요. 지원군을 데려와야 하는데 난 당분간 좀 힘들 것 같네요.”

“안타깝지만 나도 힘들 것 같아요.”

제니퍼는 자신의 다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 시선을 함께 따라가던 아델은 놀라서 소리쳤다.


“제니퍼…… 다리……!”

그의 왼쪽 다리 한쪽은 부목을 대고 붕대로 친친 감겨 있었다.


“솜씨 좋은 수의사 선생 덕분에 목숨은 건졌죠. 다시 걸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네요.”

“아아……. 미안해요. 난 그런 것도 모르고…….”

그는 자책하는 아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델 양 잘못이 아닌걸요. 죽을 각오를 했는데 그래도 목숨은 건졌으니 그나마 운이 좋았던 거지.”

결국 아델이 눈물을 흘리자 제니퍼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울지 말아요. 그러면 아기도 슬퍼할 테니.”

그 말에 아델은 왠지 더 울컥해졌다.


“미안해요. 내가 위로해줘야 하는데.”

“아니, 아기 소식으로 충분히 위로됐어요. 다리 한쪽을 못 쓰게 되더라도 새 식구를 얻었으면 그걸로 된 거죠. 하하핫!”

제니퍼는 호탕하게 웃으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궁금하네. 고놈이 누굴 더 닮았을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평소처럼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다. 애써 자신의 슬픔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아델도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나도 궁금하네요.”

그와 자신을 닮은 아기.

그토록 원했었는데.

하지만 이렇게 찾아와준 소중한 아기를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루스울프에 가서 지원군을 불러와야 하는데…….”

그래야 크리스틴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아델은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애가 탔다.

하지만 지금은 침대에서 꼼짝할 수도 없는 몸.


“그 몸으론 무리예요. 수의사 선생에게 들었어요. 움직이면 유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그러더군요. 아기와 크리스,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네요.”

조금만 더 늦게 찾아와주지, 하필 이런 시기에 찾아와준 아기가 조금 야속하기도 했다.


“고민할 게 있나요? 아기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인데.”

제니퍼의 말에 아델은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네요. 아직 엄마 자격이 없네요. 난…….”

솔직히 말하면 아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기 보다 크리스틴이 더 걱정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잘못된다면 살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 아기는 오롯이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잠시나마 크리스틴과 아기를 두고 고민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단장님이 정말 지원군을 불러오라고 당신을 보낸 것 같아요?”

제니퍼의 말에 아델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럼 아닌가요……?”

“내가 아는 단장님이라면 사랑하는 여자를 안전하게 대피시키기 위해 그런 구실을 만들었을걸요.”

“하지만…… 내가 직접 그의 명령서를 전달하지 않으면 루스울프의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제니퍼는 메마른 입술로 픽 웃었다.


“루스울프의 기사들과는 전서 조로 암호화된 연통을 주고받아요. 아마 단장님은 그 전에 이미 전서 조를 통해 출정명령서를 내렸을걸요?”

“그럼 내게 준 명령서는…… 뭐죠?”

“글쎄요. 러브레터?”

“말도 안 돼요.”

하지만 아델은 궁금해졌다. 제니퍼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을 왜 루스울프에 보내려고 했는지.


“궁금하면 읽어봐요. 뭘 망설여요.”

제니퍼는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봉투를 집어 아델에게 건넸다. 붉은 인장이 찍힌 밀랍으로 봉인된 그대로였다.


“진짜 명령서라면 봉인을 열면 안 되잖아요.”

“아니라는데 내 나머지 다리 한쪽을…….”

“제니퍼!”

제니퍼는 머쓱해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명령서가 아니라는 게 그만큼 확실하다는 말이죠.”

아델은 봉투를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뜯어 보았다. 그리고 차곡차곡 접힌 종이를 펼쳐서 읽다가 결국…….


“흑!”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델……?”

제니퍼가 놀라서 불렀지만 그녀의 꼭 다문 입술이 파르르 경련하듯 떨렸다.

그러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아! 흑! 아아!”

침대 위에 떨어진 서신을 읽어보던 제니퍼도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뭐야, 어울리지 않게 이 낯간지러운 편지는…….”

 

아델.

당신이 도착하면 가르덴 호수의 벚꽃은 다 져버렸겠지.

하지만 장미가 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갈게.

그동안 아프지도 울지도 말고 씩씩하게 잘 지내.

매일매일 그리울 거야.

나의 집인 당신의 곁이.

아델 바이스 부인의 남편 크리스틴이…….

***

이른 아침형 인간인 마크는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났다.

그는 요 며칠 그린힐 밖의 수도원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은 작은 시골 마을이다 보니 의사나 수의사가 귀했다. 그래서 일 년에 두어 차례 정기적으로 이 수도원을 방문하곤 했다.

그러면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아픈 가축이나, 아픈 환자들을 데리고 방문했다.

마음씨 넉넉한 수도원장님은 아예 직접 마차를 몰아서 그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덕분에 그린힐을 도망치던 아델과 제니퍼를 발견해서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델은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니었다. 임신 초기는 워낙 조심해야 했지만 유산의 조짐까지 보였으니까.

마크는 그녀를 위해서 쓸만한 약초를 구해오는 길이었다.


“부인은 좀 어떻습니까?”

축사 앞에서 수도원장과 마주쳤다. 그는 마크만큼이나 아침잠이 없는지 나무통 가득 우유를 짜서 들고나오는 중이었다.


“며칠 더 신경 써서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심려가 크시겠군요. 제가 매일 기도하고 있으니 곧 좋아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부인에게 신선한 우유를 좀 갖다 주려는데 괜찮을까요?”

“깊은 배려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넉넉하게 웃던 수도원장이 갑자기 미간을 모으며 먼 곳을 응시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일찍부터 손님들이 올 모양입니다.”

“벌써 환자들이요?”

그를 따라 포도밭 끝을 돌아보던 마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오는 중이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흰옷을 입은 교황청의 사제들 같았다.

설마 아델을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건가?


“아, 중요한 일을 깜박했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는 아델이 묵고 있는 수도원 2층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

벌컥!

세차게 문을 여는 소리에 겨우 선잠이 들었던 아델이 눈을 떴다.


“마크……?”

그는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말했다.


“꼼짝 말고 다시 자는 척해요.”

“왜요?”

“쉿!”

그는 문 앞에 바싹 귀를 가져다 댔다.

저벅저벅.

서너 명의 사람들이 수도원 돌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델은 잔뜩 불안해하며 물었다.


“사제들이에요.”

간단하게 대답한 그는 갑자기 웃옷을 머리 위로 끌어올려 벗어 던졌다.

그러더니 이번엔 절그럭대며 바지의 벨트를 푸는 것이 아닌가?

아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아델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고, 마크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자, 그는 재빨리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벌컥 문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문 앞에는 모리스를 포함한 두 명의 사제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반쯤 헐벗고 허리춤이 풀려 있는 마크를 보더니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저희는 교황청의 사제들입니다만…….”

민망해하는 사제들을 제치고 모리스가 앞으로 나왔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가 교황청에 보고하러 간 사이에 멍청한 사제들이 바이스 백작까지 놓치고 만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백작의 일행 중에 아델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어딘가 숨어 있을 그녀를 찾아야 했다.


“지금 우리 부부가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는 게 안 보입니까?”

마크가 잔뜩 인상을 썼지만 모리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습니다. 부인께서 저희가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야…….”

콰앙!

마크는 주먹으로 문을 사납게 내리쳤다.


“젠장! 더는 아내를 욕보이지 마시오!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수치심을 느끼고 있으니!”

 

 
어느새 쫓아왔는지 수도원장이 모리스를 달랬다.


“모리스 사제님. 이분들은 캐슬러 남작 부부로 오래전부터 제가 잘 아는 분들입니다. 더이상 제 손님들에게 결례를 저지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캐슬러 남작 부부라…….”

모리스는 예리한 시선으로 마크와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아델을 응시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쓴 채라 금발 머리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닉서스 다리를 건널 때 아델은 금발 머리였다고 했다.

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면…….


“두 분의 신원은 제가 보증합니다. 자, 어서 내려가서 식사나 하시지요. 마침 갓 짠 우유도 있고 따끈한 빵도 있으니.”

모리스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수도원장을 따라 돌아섰다.

***

탁!

문을 닫고 나서야 마크는 겨우 숨을 돌렸다.


“하아…… 겨우 따돌렸네요.”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그러면서도 아델은 마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

그제야 자신이 매우 선정적인 차림이란 걸 깨달은 그는 허겁지겁 헐벗은 옷을 주워 입었다.

민망해진 아델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연기가 정말 뛰어나시네요. 깜짝 놀랐어요.”

옷을 다 입은 그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사실 수의사보단 배우가 더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수도원장님까지 그렇게 말씀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마크가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사실…… 당신을 정말 제 부인으로 알고 계시거든요.”

“예?”

“당신의 수배 전단이 이 마을까지 붙어 있어요. 사제들이 바이스 백작의 여자들 찾는다는 소문도 떠들썩하고요. 이런 상황에 길가에 쓰러져 있던 당신은 당연히 의심을 살 테니까요.”

“아아…….”

“그래서 아내가 임신한 채로 절 만나러 오던 길에 쓰러진 거라고 둘러댔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뇨. 목숨을 구해주고 그런 말을 하시면 제가 뭐가 되나요. 당신에게 자꾸 신세만 지게 되는 게 더 미안하죠.”

하지만 문제는 마을 사람들까지 그렇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사람들이 진료를 받으러 하나둘 찾아왔다.

그들은 다들 마크의 아내를 걱정하며 한 마디씩 해주었다.

아내에게 먹이라며 보양식을 갖다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인 건 그로 인해 모리스와 사제들이 아델을 찾는 걸 포기하고 수도원을 나갔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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