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파란 지붕 아래 우물 (110/155)


110화. 파란 지붕 아래 우물
2023.02.20.



 


“루스울프로부터 전언입니다.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이삼 일은 걸릴 거라고 합니다.”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린 연통을 꺼내 읽던 짐머가 말했다.


“이삼일이라……. 결국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중얼거리는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그들은 닉서스 다리를 돌파해서 그린힐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황궁에 주둔해 있던 교황청 기사들과 그린힐 북쪽, 블루게일의 교황청 기사들까지 대규모 병력이 움직였다.

크리스틴 일행이 아무리 일당백의 전사라고 해도 겨우 백여 명. 그중에는 부상자들도 많았다. 게다가 칼을 제외한 무기도 전무한 상태.

북쪽과 남쪽에서 압박해오는 대규모 병력과 싸우기에는 많이 불리했다.

지원군이 도착하는 이삼일 동안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추격을 피하기 위해 낮에 자고 밤에 움직이면서 지금은 숲길로 이동 중이었다.


“이자벨 부인이 결국 우릴 배신했군요.”

이자벨은 그들이 궁지에 몰린 상황이란 걸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칼라임 병사들은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모든 걸 손에 넣었으니 우릴 도울 이유가 없겠지.”

“대공을 끝까지 놓아주지 말 걸 그랬습니다!”

짐머는 배신당한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오히려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이미 그녀와 계산은 끝났으니 너무 미워하지 마라.”

“계산이 끝나다니요?”

짐머가 의아해하는데 레아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파란 지붕 아래 있는 우물을 열 생각이신 거죠?”

“좀 살아났나 보군, 꼬맹이.”

닉서스 다리에서 쉴드의 틈을 만드느라 레아나는 거의 탈진해 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동해야 했기에 크리스틴은 항상 자신의 말에 태우고 다녔다. 게다가 직접 레아나를 보살피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단원들은 꼭 아빠와 딸 같다며 놀리고는 했다.

실제로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 너무 닮은 두 사람이었다. 고집스럽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까지.


“치, 기사단의 유일한 마법사에게 꼬맹이가 뭐예요? 자꾸 그럼 가출해버릴 거예요.”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단 탈영병은 잡히는 즉시 처형이다.”

“헐. 꼬맹이를 상대로 너무 진심 아니세요?”

“난 누구나 진심으로 대해. 너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꼬맹이들은 특히.”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짐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로 누구 보다 아끼면서 만나기만 하면 저렇게 티격태격이라니.


“그건 그렇고 파란 지붕은 뭐고, 우물은 또 뭡니까?”

“파란 지붕 아래 오래된 우물가에 절대 다가가지 말 것. 너의 영혼이 먹힐지도 모른다.”

레아나는 점점 더 뜻 모를 소리만 했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설명했다.


“일전에 블루게일에 있던 오스월드가의 별장 기억하나?”

“예, 불에 타서 폐허로 변해버렸던……. 설마 파란 지붕이 블루게일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별장을 둘러보다가 지하에 반쯤 무너져 내린 벽을 발견했지. 그 뒤에 문이 있었고. 불에 타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문의 존재를 몰랐을 거다. 우물은 아마 문 뒤에 있겠지.”

“그런데 그 우물을 열어서 뭘 하시려고요. 말라버린 우물일 텐데.”

“봉인을 열어야죠. 늑대 일족을 깨우는.”

레아나의 말에 짐머는 소름이 확 돋았다.


“설마 그곳에 늑대 일족이 봉인되어 있는……?”

“그래, 얀이 찾던 백지 문서는 늑대 일족을 깨우는 협약서였지. 그는 늑대 일족과 함께 교황청을 쓸어버리고 세계를 장악할 생각이었어.”

너무나 강해서 모든 이들의 두려움을 샀던 세계 최강의 전사들.

교활한 사람들은 그들을 멸족 시키기 위해 힘을 모으고, 봉인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백여 년 동안 잊혀 있던 늑대 일족.

크리스틴은 이제 그들을 깨울 생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하지만…… 그 봉인을 여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대답 대신 크리스틴이 레아나를 응시했다.


“정말 가능한가?”

짐머도 크리스틴과 함께 그녀를 쳐다보았다.

겉보기엔 그저 예쁘장한 소녀에 불과한 레아나였다.

사제들의 쉴드를 무용지물로 만들었을 때는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백 년 이상 비밀스럽게 잠겨있던 늑대 일족의 봉인이었다.

그런 걸 과연 저 아이 혼자서 열 수 있다고?


“그래서 이 열쇠가 필요한 거죠.”

레아나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가방에서 금빛 나는 작은 함을 꺼냈다.

양장본 책처럼 생긴 함을 열자 다섯 개의 금속장식이 들어있었다.


“이자벨 부인에게서 받은 것 아닙니까?”

짐머가 물었다.


“그래. 저건 귀족회를 구성하는 다섯 가문의 문장이다. 우물을 만들어 늑대 일족을 봉인하고 저기에 마법 주문을 걸어서 잠가 버린 거지.”

“아아, 이를테면 저건 열쇠고, 저걸 받는 대가로 이자벨 부인과 계산을 끝냈다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그리고 제 마법으로 이 열쇠에 걸린 주문을 해제하면 끝나는 거죠.”

레아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짐머는 상황파악이 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연 입을 삐죽거렸다.


“너무하십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계획을 제게는 감쪽같이 숨기시고…….”

“숨긴 게 아니다. 이런 상황까지 올 거라고 생각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레아나 양은 알고 있었잖습니까?”

짐머는 나뭇등걸을 괜히 손톱으로 긁어댔다.


“네놈…… 설마 삐친 건가?”

“삐치긴요. 전 마법도 못 쓰고, 그냥 칼만 휘두를 줄 아는 놈인데요 뭘……. 삐칠 자격도 안 되죠.”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백지문서는 제 마법으로만 읽을 수 있으니까, 저야 당연히 알 수밖에 없죠.”

레아나가 달래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됐습니다. 아델 양에 이어 레아나 양 다음으로 밀려난 넘버 쓰리 주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에이, 그래도 단장님께서 짐머 아저씨를 얼마나…….”

짐머가 레아나를 홱 노려보았다.


“아저씨 아닙니다!”

“네?”

“아직 총각입니다! 그리고 단장님보다 나이도 훨씬 적고요.”

“전 원래 스무 살 넘었으면 전부 아저씨라고 해요.”

“성인이라고 다 아저씨는 아니죠. 이제 알겠습니다. 단장님이 레아나 양을 왜 꼬맹이라고 하는지.”

“아저씨들 눈엔 당연히 그렇게 보이겠죠! 꼰대 아저씨!”

레아나는 약 올리듯 혀를 쏙 내밀며 얼른 가버렸다.

크리스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짐머를 달랬다.


“말싸움으로 저 아일 이길 생각은 마라.”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덕분에 단장님이 활기차 보이십니다.”

“내가 언젠 음울했었나?”

“몰라서 묻습니까? 단장님 주변만 늘 음침한 거.”

사실 레아나와 옥신각신하는 크리스틴을 볼 때마다 짐머는 마음이 놓였다.

아델과 헤어진 일로 한동안 힘들어할까 봐 걱정했는데 레아나를 돌보느라 그럴 틈이 없어 보였다. 티격태격할 때는 친밀한 부녀지간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아델의 소식은 들어 온 게 없나?”

하지만 그건 짐머의 안일한 생각이었나보다.

잠시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는 다시 아델의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닉서스 다리를 빠져나간 것까지는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그 뒤의 소식은 아직…….”

“제니퍼는 전서구를 다룰 줄 몰랐던가?”

“예. 하지만 전투력과 책임감은 확실한 자이니 둘 다 무사할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때였다. 정찰병이 빠르게 뛰어왔다.


“교황청 기사들의 습격입니다!”

그 순간 편하게 쉬고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칼을 집어 들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어떻게 할까요?”

짐머가 긴장하며 묻자,


“내가 길을 뚫지. 우리는 블루게일로 간다!”

정확히 말하면 오스월드 후작가의 별장.

늑대 일족이 봉인 된 그곳!

***



“산책을 좀 할 수 있을까요?”

아침 진료를 하러 들어온 마크에게 아델이 물었다.


“아직은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조심히 움직일게요.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바닥에라도 누울 테니 염려 말아요.”

마크가 엷게 웃었다.


“내가 당신을 바닥에 눕게 만들진 않아요.”

“그럼 주치의 선생님 허락이 떨어진 거로 알죠.”

“그럽시다. 어느 정도 회복도 된 것 같고.”

그러자 아델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계속 누워만 있다 보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휘청이는 그녀를 마크가 옆에서 부축해 주었다.


“내 어깨를 잡고 천천히 걸어요, 아델.”

“당신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움직이고 싶진 않았는데, 그래도 잠시만 신세 질게요.”

“얼마든지요.”

아델은 하는 수 없이 마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아 움켜쥐었다.

제니퍼에게 도움을 청하면 좋았겠지만 지금 그는 제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들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두 분 모습 정말 보기 좋습니다.”

정원에 물을 주던 수도원장이 그들을 보자 흐뭇하게 웃었다.

그뿐 아니었다. 진료를 받으러 몰려오던 한 무리의 여인들도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임신 축하드려요! 두 분 건강하고 예쁜 아이 낳으세요.”

“이번엔 부인 닮은 따님을 낳으셔야죠!”

“무슨 소리. 딸은 아빠를 닮아야 더 잘 산다고!”

그들은 덕담이라며 웃고 떠들었지만 아델은 함께 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당황하며 마크를 올려다보았다.

수도원장에게 어쩔 수 없이 부부라고 둘러댄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온 마을 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다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델이 마크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믿었으니.

마크가 난처해하며 귓속말을 했다.


“미안해요. 작은 동네라 소문이 빠르네요.”

미안해하는 마크를 보니 아델이 오히려 더 미안해졌다.


“괜찮아요. 소문에 워낙 단련된 몸이라. 그나저나 당신을 마음에 뒀던 여자가 있었다면 어쩌죠?”

“이런! 그 생각을 미처 못했네요.”

장난스럽게 이마를 치며 난감해하는 마크를 보며 아델도 엷게 웃었다.

생각지도 않은 오해를 받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길 잘한 것 같았다.

청명한 하늘과 따뜻한 햇볕을 쬐고 나니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그때였다.


“이거…… 아기 선물이에요.”

10살 남짓의 소녀 아이가 뛰어오더니 꽃 한 송이를 건넸다. 붉은 장미였다.

아델은 굳어진 얼굴로 그 꽃을 선뜻 받지 못했다.

소녀는 자신이 뭘 잘못한 건가 싶어서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길가에 장미가 벌써 피었길래 예뻐서…….”

그제야 아델은 소녀를 안아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아, 고마워. 정말 예쁘다. 아기도 고마워할 거야.”

마음이 놓인 소녀는 생글거리며 저만치 달려갔다.

하지만 장미를 바라보는 아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아델? 몸이 안 좋나요?”

마크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데,


“장미가 벌써 피는 건 반칙 아닌가요?”

아델은 따지듯 물었다.


“예?”

“이제 겨우 4월인데 장미가 왜 벌써 핀 거죠?”

“그러게요. 성미 한번 급한 녀석이네요. 하지만 내가 피라고 한 게 아닌걸요.”

그제야 아델은 마크에게 괜히 투정 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아, 미안해요. 그만 들어갈게요.”

“부축해 줄게요.”

“아니요. 환자들이 당신을 기다리잖아요.”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아델은 쓰러지듯 침대에 엎드렸다.

죽은 사람처럼 한동안 미동도 없던 그녀가 가늘게 중얼거렸다.


“크리스, 장미가 벌써 피고 있어…….”

 

아델, 당신이 도착하면 가르덴 호수의 벚꽃은 다 져버렸겠지.
하지만 장미가 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갈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