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심장에 새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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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심장에 새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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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심장에 새긴 이름
2023.02.24.
크리스틴의 군대는 일부러 험난한 계곡으로 이동했다.
엄청난 숫자의 교황청 기사들을 상대하려면 지형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적들을 계곡으로 몰아넣어 산 위에서 바위를 굴리거나, 다리를 건널 때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쪽은 모두 전쟁터에서 살아온 일당백의 전사들.
성기사들은 제대로 된 전투경험조차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그럼에도 워낙 대규모 병력이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니 싸워도 싸워도 끝이 없었다.
게다가 사제들의 마법까지 더해지니 아군도 절반은 사상자였다.
다행이라면 크리스틴의 군대에도 레아나 외에 십여 명의 마법사들이 더 늘었다는 것.
그동안 교황청의 탄압을 피해 숨어지내던 마법사들이 합류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얀의 총애를 받았던 황실 마법사 케니도 있었다.
***
치열한 전투 끝에 크리스틴의 군대가 오스월드가의 별장에 도착한 것은 이틀이 지난 새벽이었다.
“오늘 저녁에 루스울프의 원군이 도착한답니다!”
짐머가 달려와 보고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짐머와 크리스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아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두 분…… 혹시 우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보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당연한 소리.”
“하, 하, 하…….”
레아나는 울상이 된 얼굴로 웃었다.
먼지와 땀으로 뒤 범벅 된 그들의 군대는 숨 쉬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던 것이다. 한 번 더 전투가 시작된다면 맥없이 무너져 내릴 게 뻔했다.
게다가…….
레아나는 눈 앞에 펼쳐진 새벽 풍경을 바라보며 가늘게 신음했다.
별장 주위에는 횃불의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고 본다면 황홀했겠지만 사실 횃불을 든 수만 명의 군대에 포위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요새는 겨우 폐허가 된 오스월드가의 별장.
케니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쉴드를 만들어 방어하고 있었지만 얼마나 버틸지 몰랐다.
사실 이 정도 마법 쉴드라면 모리스 혼자서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30분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고.
저녁에 루스울프의 원군이 도착해서 할 일은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뿐이리라.
“이건 너무 무모해요. 교황청에 투항하고 나중에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게…….”
레아나의 말을 크리스틴은 단호하게 끊었다.
“아니, 이 싸움은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 네가 봉인을 열 테니까.”
그러자 짐머가 소리쳤다.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어서 가십시오!”
스릉, 스릉!
동시에 50여 명 남은 기사들이 전투태세에 돌입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이 싸움에서 질 거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어서 가자, 꼬맹이.”
크리스틴이 레아나를 재촉했다.
사실 줄곧 자신만만하던 레아나는 두려웠다.
자신이 실패한다면 이곳이 모두의 무덤이 될 테니까.
지하로 내려온 두 사람은 미로처럼 펼쳐진 복도를 따라갔다. 그러다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여기다.”
크리스틴의 말에 레아나는 걸음을 멈췄다.
앞을 가로막은 벽은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그 뒤로 문 하나가 보였다.
그가 발로 차자 반쯤 불에 탄 벽은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그제야 온전한 문이 모습을 드러났다.
돌로 만든 거대하고 견고한 문 위에는 붉은색의 낯선 문자가 적혀 있었다.
“고대어예요. 붉은 고대어에는 강한 마법을 담아둘 수 있죠.”
“이 문자에 마법이 담겼다는 건가?”
“네, 그리고 여기에 담긴 것보다 더 강한 마법만이 해제할 수 있어요.”
“너는 이걸 해제할 수 있나?”
레아나가 오만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게다가 고대어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교황청에서도 손에 꼽히죠.”
“자화자찬은 나중에 듣기로 하지.”
“그러는 게 좋겠죠?”
고대어를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녀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챙! 챙!
그러는 사이 칼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벌써 마법사들의 쉴드가 깨졌나 보다. 교황청 기사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치는 건 순식간이리라.
“단장님! 방어 쉴드가 뚫렸습니다!”
짐머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최대한 버텨보겠습니다!”
‘제발 서둘러라, 꼬맹이!’
크리스틴은 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속으로 외쳤다.
이내 은은한 빛이 레아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달싹이며 주문을 외우는 앳된 얼굴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 역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ਈֆমਧঊਓਫ਼ਐ !”
잠시 후 붉은 고대어가 빛나는가 싶더니, 돌로 된 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르르릉!
문이 회전하며 드러난 안쪽 공간은 자욱한 푸른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서늘하고 습한 공기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 같았다.
크리스틴은 망설임 없이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레아나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오자 문이 자동으로 닫혀버렸다.
쿠웅!
***
“이게 설마 그 우물인 건가?”
크리스틴은 눈 앞에 펼쳐진 드넓은 물을 바라보았다.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그곳은 우물이 아니라 바다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해 보였다. 그 끝엔 수평선이 보일 뿐이었으니까.
물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바위 제단이 우뚝 솟아있었다.
“배가 없군.”
낭패스러워하는 그를 보며 레아나가 웃었다.
“여기 들어올 정도의 마법사라면 배가 필요 없죠. 잊으셨어요? 제가 최상급 마법사라는 걸.”
레아나가 주문을 외우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제단으로 이동했다.
제단은 1m 정도 높이의 다섯 개의 돌기둥이 빙 둘러 감싸는 형태였다. 그 기둥의 정수리 부분에는 다섯 가문의 문장과 똑같은 모양이 움푹 패어 있었다.
“이곳에 열쇠를 꽂아야 하나 봐요.”
금빛 함에서 열쇠를 꺼낸 레아나는 차례로 모양에 맞춰 끼웠다.
우우웅…….
잠시 후 다섯 개의 기둥이 빛나며 점점 길어지더니 몸체에 새겨진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도 고대어인가?”
“네. 봉인을 푸는 방법을 새긴 것 같아요.”
기둥에 쓰인 글자를 읽어내려가던 레아나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봉인을 풀려면 이 열쇠만으로 부족하다네요.”
“젠장, 뭐가 더 필요하지?”
크리스틴은 낭패스러워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장 중요한 열쇠는 따로 있었어요.”
그녀가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단장님.”
“그게 무슨?”
그녀는 기둥에 적힌 고대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늑대 전사의 피만이 그들을 깨우리라. 일족을 부활시키려는 자, 희생의 값을 치를지니 전사들이여 따르고 추앙하라……. 그렇게 적혀 있네요.”
“다행이군.”
“뭐가요?”
“지금 당장 구할 수 없는 것보단 나으니.”
“희생이라잖아요. 단장님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고요!”
“어차피 이대로라면 교황청 놈들에게 목숨을 내줘야 해. 그것보단 낫지.”
“아델은요?”
아델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칼을 내밀었다.
“싫어요. 안 받을래!”
기겁하며 고개를 젓는 레아나에게 그가 웃어 보였다.
“그 칼로 찌르라는 게 아니다. 뭘 좀 새겨주었으면 해서. 여기에!”
셔츠의 앞섶을 열어젖힌 그는 탄탄한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뭘 새기다니요?”
“아델.”
“……!”
레아나의 얼굴이 울 것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내 심장이 마지막 뛰는 순간까지 함께하고 싶어.”
그는 이번엔 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건넸다. 아델과 함께 맞춘 커플링이었다.
“만일…… 내가 돌아갈 수 없게 되면 그녀에게 전해줘. 끝까지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커플링을 찾아오던 날, 많은 사람 앞에 무릎 꿇고 구애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델도 구애를 받는 레이디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몰랐다.
그날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꼭 전해줄게요.”
반지를 품 안에 넣어두며 레아나가 약속했다.
잠시 후 날카로운 칼끝이 그의 심장 위에 천천히 아델의 이름을 새겨갔다.
A D E L E
그 이름을 모두 새기고 났을 때 레아나는 울음을 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드넓은 가슴에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꼭 그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맙다, 레아나. 네 아버지 대신 좋은 녀석을 찾아주려고 했는데.”
그 손이 너무 크고 따뜻해서, 꼭 아빠 같아서, 레아나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빠가 화형당하던 날 이후 다시는 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 같은 거 주지 않고 살기로 했었으니까.
“그딴 거 필요 없어…….”
레아나는 결국 크리스틴의 옷자락에 매달려 소리쳤다.
“그냥 아델이랑 도망가서 살아요! 나도, 짐머 아저씨도, 다른 사람들도, 다 자기들 선택이니까! 죽든지 살든지 단장님 하곤 상관없어! 그러니 희생 같은 거 하지 말아요! 이런 거 닭살 돋을 만큼 안 어울린다고요! 으흑!”
“이것도 내 선택이다, 레아나.”
단호하게 말을 끝낸 크리스틴은 기둥들 사이로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레이피어를 높이 치켜들었다.
푸욱!
그의 발아래를 흥건하게 적신 피가 돌 제단으로 흘러 들어가자,
쿠르르릉! 쿠르르르……!
마치 천둥이라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파파팟!
다섯 개의 기둥에서 눈 부신 빛이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쳤다.
그것은 회오리처럼 허공을 휘돌더니 바닥의 물과, 허공의 안개까지 모두 휘감아버렸다.
고오오오……!
태초의 혼돈.
폭발할 듯 소용돌이치는 엄청난 마나에 레아나는 넋을 잃었다.
그 엄청난 광경에 숨이 막히고, 팔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곧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떠올리며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렸다.
“ਧਪਈੴঊֆթ੯ !”
눈을 감고 입술 사이로 천천히 주문을 외워갔다.
***
새벽하늘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모리스를 비롯한 일부 사제들과, 성기사단의 고위급 기사들은 언덕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전 별장의 방어 쉴드가 뚫리고 성기사단과 사제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러나 순식간에 종료될 줄 알았던 상황은 예상보다 지체되었다.
“아직 무소식입니까?”
모리스가 성기사 단장에게 말을 몰아왔다.
기사 단장은 뭐가 그리 두려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판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게도 갑옷을 입혀놓아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염려 마시게. 곧 우리 기사들이 바이스 백작의 목을 들고 나올 테니까.”
그런 주제에 자만함은 하늘을 찔렀다.
“백작을 그리 만만히 보지 마십시오.”
“이런, 자네가 다쳤다고 우리까지 겁을 먹으면 되겠나?”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기사들도 말을 보탰다.
“모리스 사제님, 겁이 나면 물러나 계십시오.”
그들은 모리스가 크리스틴에게 어깨를 다친 걸 조롱하는 것이다.
모리스는 어리석은 자들의 비웃음을 뒤로하며 먼 하늘을 응시했다.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그, 풀 플레이트 메일을 두른 채로는 도망치기도 쉽지 않을 테니.”
“뭐라!”
“실로 엄청난 마나로군요. 저희 사제들은 일단 철수하겠습니다.”
모리스는 미련 없이 말 머리를 돌려서 교황청으로 향했다.
그제야 성기사 단장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건 뭔가!”
시커먼 회오리 같은 것이 오스월드가의 별장을 휘감고 있었다.
그으으으으……. 그으…….
마치 신화 속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그 회오리의 한 가운데에서 엄청난 뭔가가 생겨났다.
그것은 사람이기도 했고, 네발 달린 짐승이기도 했다.
“서, 설마 저건 늑대 일족?”
성기사 단장은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회오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천수만의 늑대 일족이 순식간에 성기사단을 휩쓸어갔다.
땅 위로 금방 피의 강이 흐르고, 역겨운 죽음의 냄새가 진동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