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우리의 아이가 생겼어 (113/155)


113화. 우리의 아이가 생겼어
2023.03.03.



 
크리스틴의 막사로 가던 짐머는 하늘을 선회하는 전서조를 보았다.


“삐이익!”

길게 휘파람을 불며 팔을 내밀자 비둘기 한 마리가 그 위에 내려앉았다.

연통의 색깔이 초록색인 걸 보니 그린힐에서 보내온 소식이었다.

아델에 관한 소식이 있을까 싶어서 서둘러 열어보았다.


“말도 안 돼……!”

예상대로 그녀의 소식이 적혀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크와 함께 살고 있단다.

게다가 임신까지…….


“전서조인가?”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짐머는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단장님!”

저도 모르게 연통을 감췄지만 그의 매서운 눈썰미를 피할 순 없었다.


“나 몰래 군사 기밀이라도 빼돌리는 중인가?”

“하, 하, 그럴 리가요.”

짐머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선뜻 연통을 건넬 수가 없었다.

짐머를 보는 크리스틴의 눈매가 점점 사나워졌다.

결국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아델 양의 소식입니다.”

“아델? 아아…….”

설마 이게 다라고?

너무나 쿨한 반응에 짐머가 당황하는데,


“단장님!”

레아나가 늑대 일족의 꼬마들을 데리고 뛰어왔다.

간편한 바지 차림에 포니 테일로 높게 머리를 묶은 그녀는 누가 봐도 쾌활한 소녀였다. 하지만 짐머가 아는 한 세계 최강의 마법사일지도 몰랐다.


“레아나.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구나.”

“저 좀 살려주세요, 단장님. 이 꼬맹이들이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괴롭혀요!”

아이들이 레아나의 팔을 끌어당기며 졸라댔다.


“언니, 마법 보여주세요!”

“불 나오게 해주세요!”

늑대 일족 대부분이 그렇듯이 어떤 아이들은 짐승의 모습에 가까웠고, 또 어떤 아이들은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이라는 존재만으로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보셨죠? 제발!”

레아나는 도움이 절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애원했다.

그러자 크리스틴은 아이들 중 한 명을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웠다. 아이는 좋아서 꺅꺅대며 소리를 질렀고 다른 아이들도 안아달라며 졸랐다.


“다음은 저 나무까지 제일 먼저 뛰어가는 사람 차례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짧은 다리의 아이들이 앞다퉈 달려갔다.

전쟁터에서는 이름만으로 적군을 떨게 만드는 그였지만, 아이들에게는 꽤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조금 전 그 소식은 보고 안 해도 된다.”

“네……?”

당황해하는 짐머를 뒤로하고 크리스틴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휴, 겨우 살았네.”

아이들이 사라지자 레아나는 팔다리를 흔들며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짐머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아델에 관한 연통이 도착했다고 했는데도 그의 반응이 너무나 시큰둥했다.

그뿐만 아니라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건 도저히 짐머가 아는 크리스틴이 아니었다.


“단장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날…….”

쾌활하게 허리까지 돌려대며 몸을 풀던 레아나가 멈칫했다.


“그날이라니요?”

짐머는 몸을 돌려 서늘하게 레아나를 노려보았다.


“봉인을 해제하러 들어갔던 그날 말입니다.”

레아나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잠시 자리를 옮길까요?”

 

***

레아나는 짐머를 자신의 막사로 데리고 들어왔다.

막사 안은 온통 오래된 고서와 알 수 없는 도구들로 가득했다. 그뿐 아니라 빨랫줄에는 빨래 대신 말린 두꺼비나 박쥐 같은 것들이 걸려있었다. 선반에 가득한 유리병 안에도 기괴한 벌레가 가득했다.

도저히 이토록 아름다운 소녀가 머무는 공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 방이 생기면 마녀의 방처럼 꾸며보고 싶었죠. 교황청에 대한 반발이랄까.”

“하긴 한참 반항을 꿈꿀 나이긴 하죠.”

“차 한 잔 드릴까요? 지네 가루로 만든 차가 있는데 관절에 좋대요.”

“사양합니다. 아직 관절을 생각할 정도로 아저씨는 아니라서. 그보다 아까의 질문에 답을 해주시죠. 레아나 양.”

순간 사춘기 소녀처럼 장난스럽던 레아나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뭐가 알고 싶으신 거죠?”

“단장님께서 아델 양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으시더군요.”

“마음이 변하셨나 보죠.”

“아뇨, 그럴 분이 아니란 거 내가 잘 압니다. 그날…… 봉인이 해제된 후 단장님께선 마치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짐머는 미간을 모았다.

우물이 있던 방에서 레아나와 함께 나온 크리스틴은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 같았다.

살아서 움직였지만, 인간의 마음 따윈 없는 허깨비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날, 사실…… 단장님께선 돌아가셨어요.”

뜻밖의 말에 짐머는 귀를 의심했다.


“돌아가시다니! 그게 무슨……?”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선 단장님의 목숨이 필요했거든요.”

“그럼 단장님께서 언데드라는 겁니까?”

레아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단장님을 살렸어요. 하지만 대가가 필요했죠.”

“대가라니요……?”

“단장님의 목숨과 맞바꿀만한 대가요. 그래서 심장에 새겨진 이름을 바쳤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단장님의 목숨과 그분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지우는 대가를 교환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델 양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을 못 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도 다 지워져 버렸죠.”

짐머가 창백한 얼굴로 신음했다.


“말도 안 돼. 그럼 이대로 아델 양을 영영 잊어버린 거라고요?”

레아나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늑대 일족을 되살린 엄청난 마법사라는 걸 알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어쩔 수 없었어요. 단장님을 살려야만 했으니까. 절대 후회하지 않아…….”

레아나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푸른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짐머는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너무나 애처롭게 들렸던 것이다. 엄청난 마법사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열여섯, 어린 소녀였다.


“그런 큰 결단을 내리느라 혼자서 마음고생이 심했겠군요. 하지만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줬다면 좋았을걸요.”

“미안해요. 그땐 너무 두려워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단장님께선 알고 계신가요?”

레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이라는 약혼녀가 있다고 얘기했어요. 원하신다면 데려오는 게 어떻겠냐고도 했죠. 하지만 이대로 끝내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정말인가요? 단장님께서 진짜…….”

“말했잖아요. 마음이 전부 지워져 버렸다고. 전쟁을 앞둔 지금 단장님께 여자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죠. 의심스럽다면 확인해보세요.”

 


“아델? 아아…….”


“조금 전 그 소식은 보고 안 해도 된다.”

 
짐머는 크리스틴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는 아델을 놓기로 한 것이다.

더는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가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여자.

그래서 그 마음을 대가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사랑했기에, 더는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델이 캐슬러 남작과 지내고 있다니 차라리 잘 된 건가?’

‘그녀가 임신한 건 누구의 아이일까?’

짐머는 아델에게 배신감이 들었지만 차라리 마크의 아이이길 바랐다.

이걸로 두 사람의 인연이 완벽하게 끊어지기를.

누구도 슬퍼하지 않기를.

***

짐머가 막사를 나가고 혼자 남게 된 레아나는 서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봉투 위에는 아름다운 글씨체로 ‘아델’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델 바이스 백작 부인의 남편에게.

크리스.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사정이 있어서 캐슬러 남작의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중이야.

그런데 캐슬러 남작의 집에 아이들이 세 명인 거 알아?

왜냐면 우리의 아이가 생겼거든.

우리의 아이…….

지금 이 단어를 쓰는 순간에도 나는 너무 행복해.

당신도 그렇겠지?

어서 무사히 돌아와.

루스울프의 장미는 곧 져버리겠지만 그래도 보고 싶으니 용서해 줄게.

당신의 아델과 당신의 아이가.

아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봄 햇살처럼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짧았지만 그녀와 함께 지냈던 시간은 레아나도 행복했었다.

맛있는 파이를 먹고, 예쁜 드레스를 입어보고, 소리 내어 웃던 시간들…….

난생처음 그 나이 때의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이 편지를 들고 크리스틴을 찾아갈지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지워졌어도 아이가 생겼다면 그는 아델을 외면하지 못하겠지?’

‘그녀를 만나면 다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몰라.’

그러면 전쟁을 포기할 것만 같았다.

그가 항상 원했던 건 그녀와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이었으니까.

하지만 레아나는 달랐다.

교황청을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불태워 죽인 사제들을 철저하게 짓밟을 것이다.

늑대 일족이 인간들 위에 군림하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줄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전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 여기서 돌아가게 할 순 없어…….”

결심한 듯 레아나의 청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화르르르…….

손에 들려 있던 편지는 금방 푸른색 불꽃에 휩싸였다.


“미안해요, 아델. 이 전쟁은 계속되어야 해요.”

 

 

***

여름 한낮의 달궈진 땅 위로 뽀얀 흙먼지가 피어났다.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아델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델!”

응접실에서 폴린과 함께 체스를 두던 마크가 얼른 뛰어왔다.


“우편 마차가 온 거 같아서요.”

“앉아 있어요. 내가 확인해볼게요.”

“아뇨, 제가 할게요. 오늘은 몸도 가볍고 좋네요.”

입덧으로 고생 중인 아델은 갈라 터진 입술로 웃어 보였다.

그녀는 크리스틴의 답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편지를 보낸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델이 실망하며 돌아서는 걸 보면 마크는 화가 났다.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워하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안도하는 자신에게.

아델이 밖으로 나가자 흙먼지를 일으키며 우편 마차가 멈춰 섰다.


“아델 그릴스에게 온 편지가…….”

그녀가 조심스럽게 묻는데,


“아, 있어요. 있어요!”

우체부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줄곧 실망하며 돌아서던 그녀의 모습이 그 역시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편지가 아니라 사람이 직접 왔네요.”

“네?”

곧 마차의 짐칸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나왔다.


“아가씨.”

“타냐?”

아델을 본 타냐는 들고 있던 짐을 그대로 내던지고 달려와 와락 끌어안았다.


“와앙! 보고 싶었어요! 진짜 다시 못 보는 줄 알았어요.”

 

***



“우리가 루스울프에 도착하자마자 전쟁 소식을 들었지 뭐예요. 그래서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백작님은 교황청과 전쟁 중이라는데 아무도 아가씨 소식을 모르잖아요. 보니타 부인과 겨우 연락이 닿아서 아가씨가 여기 계시다는 걸 알았네요.”

아델의 방으로 들어온 타냐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그만큼 아델을 찾느라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한 것이다.


“타냐. 네가 그렇게 날 찾아 헤맸을 줄은 몰랐어. 루스울프는 안전한 곳이니 거기 잘 있을 줄만 알았지.”

“잊으셨어요? 아가씨랑 전, 한 식구나 다름없는 거!”

발끈하는 타냐를 보자 아델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틴으로 인해 불안하고 초조하던 마음이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조금 사라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 소문은 뭐예요?”

“소문?”

“아까 우체부 말로는 아가씨가 임신 중이라던데…….”

타냐는 아델의 배를 바라보았다.

풍성한 스커트를 입고 있었지만 아델의 배는 확실히 예전보다 불룩해 보였다. 게다가 몰라보게 마른 것이 입덧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소문대로 남작님의 아이……. 아니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