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나는 잘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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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나는 잘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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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나는 잘 살 거야
2023.03.06.
“소문대로 남작님의 아이……. 아니죠?”
타냐를 만나 밝아졌던 아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면서 봤지? 늑대 일족을 규탄하는 낙서들.”
낙서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틴과 늑대 일족의 인형을 만들어서 목을 매달아 놓거나, 불에 태워 전시해 놓은 곳도 있었다.
교황청과의 전쟁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늑대 일족에 대한 혐오가 강해진 것이다.
“그럼 일부러 남작님의 아이라고 하신 거예요?”
“나와 내 아이를 지킬 방법이니까. 마크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는 거지”
“백작님에겐 알리셨어요?”
“계속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없네. 편지를 읽을 겨를도 없나 봐.”
아델은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을 누르며 억지로 웃었다.
“분명 편지가 제대로 도착하지 못한 거예요! 제가 직접 가지고 갈게요. 짐머님이라도 만나서…….”
“고마워 타냐. 너도 짐머 경이 보고 싶겠구나.”
정곡을 찔린 듯 타냐의 얼굴이 금방 발그레해졌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라고요!”
“알아. 너만큼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 하지만 제니퍼가 갔으니 곧 어떤 소식이든 가져오겠지.”
제니퍼의 다리는 얼마 전에 겨우 완치가 되었다. 그러자 제일 먼저 아델의 소식을 알리겠다며 블루게일로 간 것이다.
“참, 이건 아가씨 보물 상자인데 혹시 몰라서 가져왔어요.”
“내 보물 상자?”
타냐는 가방에서 오르골처럼 생긴 작은 상자를 꺼냈다. 마호가니로 된 몸체에 금박으로 장식된 갈색의 상자였다.
“열쇠가 꽂혀 있긴 했지만 안 열어봤으니 없어진 보석이 있어도 절 의심하진 마세요.”
조심스럽게 상자를 어루만지며 아델이 웃었다.
“아쉽게도 보석은 안 들었어.”
“그럼 뭐가 들었는데 열쇠까지 채우셨어요?”
“보석보다 더 값진 것들.”
날이 어두워지자 아델은 일찍 침대에 누웠다.
“벌써 주무시려고요? 아직 저녁도 안 드셨잖아요.”
“어차피 입덧 때문에 잘 못 먹어. 배도 안 고프고.”
“이러다 잘 못 되시는 거 아니에요? 임산부가 아니라 꼭 죽을병에 걸린 환자 같아요.”
타냐의 말대로 아델은 창백하고 쓰러질 것처럼 야위어 있었다. 입덧이 심해선지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지치고 피곤했다.
똑똑.
“아델.”
그때 들려온 제니퍼의 목소리에 아델의 표정이 환해졌다.
“타냐 얼른 문 좀 열어봐.”
그러나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제니퍼의 얼굴을 봤을 때 직감했다.
그녀가 원하던 소식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걸.
“단장님은 만났나요?”
“블루게일에 도착했을 땐 군대가 이미 철수한 후였어요. 루스울프로 이동하는 중이라더군요.”
“그는 내가 루스울프로 갔다고 생각하나 보네요.”
제니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델도 제니퍼도 알고 있었다. 그의 정보력이라면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타냐도 찾아낸 아델을 그들이 찾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그러니 답장도, 아무런 기별도 없이 루스울프로 갔다는 건…….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그랬겠죠.”
사정이 있는 게 아니고선 그녀를 이토록 버려둘 리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도 그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정을 얘기해 줄 수는 없는 건가?
‘힘들 때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이렇게 마냥 기다리는 게 얼마나 지치고 힘든 건지 잘 알면서.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야속함이 되고 원망이 되어버렸다.
“그보다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서둘러 돌아왔고요.”
“상황이 심상치 않다니요?”
옆에서 불안하게 듣고 있던 타냐가 물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타냐도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꼈다.
“교황청의 연합군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블루게일을 경계로 남쪽은 교황청이, 북쪽은 단장님의 세력으로 나뉘어 싸우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델이 있는 그린힐은 남쪽에 있었다.
“당분간 그를 만나는 건 포기해야겠네요.”
씁쓸하게 웃는 아델의 두 눈은 어느새 울 것처럼 그렁그렁해졌다.
타냐가 그런 아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델 양이 그분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건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제니퍼의 말에 아델은 가늘게 신음했다.
자신이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게 알려지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교황청까지 갈 것도 없었다. 당장 동네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겠다며 달려들지도 몰랐다.
“혼자 있고 싶어요.”
***
한동안 텅 빈 방에 혼자 있던 아델은 타냐가 가져온 보석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앞면의 고리에 열쇠가 꽂힌 채로 앙증맞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딸각.
뚜껑을 열자 분홍색 비로드로 된 내부에 반지 케이스가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잘 말린 꽃반지였다.
크리스틴이 처음 청혼을 할 때 준 것이다.
그는 알까? ‘눈의 여왕’이 박힌 반지를 받았을 때보다 이 꽃반지에 더 감동했다는 것을.
그때 ‘행복하게 살자’라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이번엔 제일 아래 차곡차곡 접힌 종이를 펼쳐보았다. 순간,
“푸흡!”
갑자기 웃음이 터져 버렸다.
언젠가 거리의 화가에게서 그린 초상화였다.
아델을 안고 있는 크리스틴은 울룩불룩한 근육에 가슴에는 털이 한 뭉치였고, 그에게 안겨 있는 아델은 얼굴에서 눈만 보였다.
“이게 나라고? 와, 눈이 얼굴에 절반이야.”
“그래도 내 가슴에 수북한 털보단 낫군.”
“우울한 날 보면 안 웃고는 못 배길 거야.”
그 말대로였다. 이런 상황에도 아델을 웃게 했으니까.
그리고 제일 아래에 있는 메모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잠에서 깬 아델의 옆에 놓여있던 그의 청혼 편지.
되도록 빨리 돌아올게.
벚꽃이 지기 전에 가르덴 호숫가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자.
“거짓말쟁이…….”
아델의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납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몇 달 전엔 장미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다더니……. 거짓말쟁이, 약속을 밥 먹듯 어기고…… 배신자, 나쁜 놈……. 나도 버릴 거야. 너 따위……. 너 같은 거…….”
아델은 왼손에 끼고 있던 약혼반지도, 머리에 묶고 있던 초록색 리본도, 그가 보낸 마지막 편지도…… 던지듯 집어넣고 잠가버렸다.
“이번엔 용서 안 할 거야! 크리스! 이 나쁜 자식! 짐승만도 못한 놈!”
보석함의 열쇠를 창밖으로 힘껏 던져버렸다.
별똥별처럼 반짝이며 열쇠는 밤하늘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온몸을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기운까지 모두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겨우 창틀을 짚고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데…….
툭, 툭!
손등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흑! 으흑!”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흐느낌은 어느새 비명 같은 울음으로 변해서 터져 나왔다.
“아으으……. 아아! 아아아아! 아악!”
아무리 입을 틀어막고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너무나 고통스러웠으니까.
보고 싶었다.
이토록 미워죽겠는데도.
***
똑똑.
노크 소리에도 아델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한참을 실컷 울고 났더니 속은 좀 풀렸는데 탈진한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델 아줌마…….”
문밖에서 들려온 건 뜻밖에도 제이드였다.
아델은 헝클어진 머리를 얼른 쓸어넘기며 겨우 일어나 문을 열었다.
“제이드! 아직 안 잤니?”
자정이 다 됐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제이드의 뒤에서 폴린이 트레이를 갖고 나타났다.
“짠! 아줌마 주려고 우리가 뭣 좀 만들었어요.”
“너희들이?”
제이드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네, 아기가 배고플까 봐요.”
놀라서 트레이를 바라본 아델은 그만 웃고 말았다.
정체 모를 채소가 둥둥 떠다니는 수프와 반쯤 타서 너덜너덜해진 닭고기 요리가 놓여 있었다. 그래도 레몬 조각으로 나름 데코레이션도 되어 있었다.
“맛있어 보이네.”
“그렇죠? 이거 만드는데 엄청 더웠어요.”
이제 보니 두 아이 모두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이 더운 여름에 오븐 앞에서 요리했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는 눈동자를 보니 아델은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들어와.”
아델과 아이들이 탁자 앞에 앉는데,
똑똑.
이번엔 타냐와 쥬디도 과일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났다.
“아가씨 주려고 따왔는데, 먼저 온 손님이 있었네요.”
또 잠시 후에는 마크와 제니퍼까지 구운 물고기를 들고 찾아왔다.
“더워서 잠이 안 오길래 낚시를 갔다 왔는데…….”
텅 비어있던 아델의 방은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였고, 작은 탁자는 음식들로 풍요로워졌다.
“깜짝 파티인가요?”
아델은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는 걸 알게 되자 더이상 슬픔에 잠겨 있을 수가 없었다.
“와, 파티! 좋아요! 아빠, 나 오늘 늦게 자도 되지?”
“오늘만이다.”
“와하! 아빠 사랑해!”
제이드가 신나서 마크에게 폴짝 뛰어 안겼다.
무겁다며 인상을 쓰면서도 마크는 활짝 웃고 있었다.
제이드와 마크, 둘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그러니 나도 이 아이만 있으면…….
버릇처럼 배를 문지르던 아델은 깜짝 놀랐다.
“아!”
순간 배 아래 쪽에 묘한 울림이 느껴진 것이다.
“왜요, 어디 아파요?”
마크가 놀라서 묻자,
“태동…… 인 거 같아요.”
아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어디요? 여기?”
“네, 거기…….”
마크가 가만히 배를 만지자 조금 전의 울림이 다시 느껴졌다.
“태동 맞네요.”
“나도, 나도 만져볼래요.”
아델은 제이드의 손을 잡아 태동이 있는 곳에 대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배가 씰룩거릴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와! 깜짝이야!”
제이드가 놀라서 주저앉자, 다들 웃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축하의 말들.
보이지도 않는 아이는 어느새 한여름 밤 깜짝 파티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델의 입덧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날 탁자 위에 있던 음식의 절반이 그녀의 입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크리스, 나는 잘살 거야.
이 아이를 위해서.
당신 없이도 잘 살아야 한다고 이 아이가 말 해주는 것 같아.
그리고 내 곁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도 무사하길 빌게.
안녕.
***
6년 후, 그린힐.
키가 큰 한 쌍의 남녀가 복잡한 시내를 걸어가고 있었다.
수수한 차림에 어두운색의 케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힐끗거렸다. 그들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리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얀 피부에 완벽한 이목구비는 마치 대리석 조각 같았다. 거기에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과 청회색 눈동자가 신비로움을 더했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레아나는 후드를 머리에 눌러쓰며 말했다.
“크라이튼 공작이 벌써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저희도 서둘러야…….”
“먼저 가 있어라.”
“왜요? 다들 기다리…….”
“그럼 기다리라고 해.”
“폐하!”
하지만 크리스틴은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 속에 남겨진 레아나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역시 오지 말았어야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