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그린힐의 빵 가게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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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그린힐의 빵 가게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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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그린힐의 빵 가게 주인
2023.03.10.
‘6년만인가?’
연달아 두 번의 전쟁을 겪었지만 칼라임의 수도 그린힐은 여전히 활기찼다.
그것은 크리스틴이 일부러 이곳을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6년 동안 그의 군대는 칼라임 주변 국가들을 무섭게 정복해갔다.
그리고 이제 그는 광활한 ‘바하마르트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블루 게일 북쪽의 영토를 빼앗겼음에도 끝까지 저항하던 칼라임은 얼마 전 항복문서를 보냈다.
하지만 반년은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그의 강력한 군대가 이 그린힐을 짓밟아버렸다면.
“그린힐이라…….”
짐머의 말에 의하면 아델이라는 여자와 3개월 남짓 이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이 도시를 왠지 지켜주고 싶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여자였지만.
북적거리는 시내를 지나던 크리스틴은 달콤한 냄새에 걸음을 멈췄다.
배가 고팠던 건가?
빵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기묘한 허기가 밀려왔다.
그리고 어떤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았다.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줄 서요. 줄.”
한 아주머니가 그를 나무랐다.
“무슨 줄이지?”
“보시다시피 빵 사려는 줄이죠. 금요일에는 안 쓰는 물건을 가져오면 빵과 교환해주니까요.”
아주머니의 손에는 여기저기 꿰맨 낡은 양말 한 켤레가 들려있었다.
“그 걸레를 빵과 바꿔준다고?”
“뚜, 뚫어지지만 않으면 상관없댔어요. 뭐.”
“빵 가게 주인은 흙을 퍼다가 장사를 하나 보군.”
그의 힐난에 아주머니는 버럭 화를 냈다.
“아, 그러는 귀족 나리는 왜 여기 줄을 섰는데요! 먹고살 만해 보이시는구먼.”
“줄 선 거 아닌데.”
“그럼 좀 비키시던가!”
그가 황당해하며 줄에서 비켜서자 뒤에 있던 노인이 말을 건넸다.
“그린힐엔 초행이신가 봅니다. 이 빵 가게를 모르다니.”
“유명한 곳인가?”
“이 빵 가게 주인은 그릴스 여백작님이십니다. 남편이신 캐슬러 백작님은 맞은편에서 진료소를 운영하시고요.”
그러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탰다.
“정말 좋은 분들이시죠.”
“금슬도 좋으신지 아드님도 셋이나 되고.”
“넷째도 곧 생길지 모르죠.”
사람들의 왁자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크리스틴은 자리를 떴다. 남의 집 가정사를 듣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으니까.
그는 그린힐을 돌아볼 생각으로 잠시 짬을 낸 것이다. 앞으로 자신이 다스려야 할 나라였으니까.
그리고 아델이란 여자에 대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을까 싶기도 했고.
물론 이제 와서 그녀를 다시 찾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목숨처럼 사랑했다던 그 여자가 조금 궁금하긴 했다.
***
쿵!
“아코!”
빵 가게를 지나쳐 모퉁이는 도는데 맞은 편에서 달려오던 사내아이와 부딪쳤다.
“내 빵!”
아이가 들고 있던 가방이 높이 튀어 오르자 크리스틴은 손을 뻗어 잡았다. 동시에 바닥에 넘어지려는 아이도 붙잡았고.
“괜찮니?”
“네, 감사합니다!”
대여섯 살 남짓의 사내아이는 야무진 목소리로 인사하더니 그의 손에 들린 가방을 얼른 빼앗았다.
크리스틴은 기가 막혔다.
“내가 가방이라도 갖고 도망칠 것처럼 보였나?”
아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우리 엄마 빵은 인기가 많으니까요.”
그는 사람들이 줄 서 있는 빵 가게를 쳐다보았다.
“네가 저 집 아들인가?”
“네, 하지만 납치할 생각은 마세요. 우리 형들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응징해줄 거니까요.”
“납치? 응징?”
“네, 아빠가 요새 납치범이 많으니까 조심하랬거든요.”
크리스틴은 황당했다.
싸구려 빵을 훔치는 좀도둑도 모자라서 납치범 취급까지 받다니.
이 맹랑하고 되바라진 꼬맹이를 조금 놀려주고 싶어졌다.
“하긴 납치하고 싶게 생긴 꼬맹이군. 예쁘장해서 돈 좀 받겠는걸.”
아이는 말간 눈빛으로 크리스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기분 좋은 봄 햇살에 아이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게 보기 좋았다.
파르스름한 흰 눈동자 안에 자리 잡은 동공은 청회색에 가까운 아이스 블루…….
순간 크리스틴은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쿵쿵 울렸다.
“치, 자기가 더 예쁘면서.”
“뭐?”
뜻밖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엄마는 내 눈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했는데, 아저씨 눈 색깔이 진짜 예뻐요. 우리 엄마가 보면 좋아할텐데.”
“미안하지만 너희 엄마가 날 좋아하면 곤란하지.”
“왜요?”
천진하게 묻는 아이를 보며 크리스틴이 웃었다.
“잘 가라, 꼬맹이.”
“꼬맹이 아니라 아론이에요. 아론 캐슬러.”
그러더니 아이는 가방을 뒤적여 유산지에 리본을 묶은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받아요. 그리고 빵을 훔치는 것도, 납치도, 나쁜 짓이니까 안 돼요. 알았죠?”
아이는 그를 교화시킨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그리고 그는 이 햇살 같은 웃음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유난히 반짝이고 예쁜 아이였기 때문일까?
아니, 이 웃음을 보는데 뭔가 그립고도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틴은 주머니를 열어 손에 잡히는 대로 금화를 집어 건넸다.
“이건 빵값이다, 아론.”
***
타다닥!
분주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가게를 정리하던 아델이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높이 올린 그녀는 목선이 우아하게 드러나는 청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기품있고 우아한 귀부인의 자태였다.
“엄마! 다녀왔어요!”
아이를 보자 그녀가 꽃처럼 활짝 웃었다.
“간식은 잘 전해줬니?”
“네!”
폴린과 제이드는 요새 마크의 진료소에서 일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아론이 그들의 간식 배달을 맡고 있었다.
아론은 이 일을 매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넘어지니까 뛰어다니지 말래도.”
아델은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안 뛰었어요.”
“어머, 그럼 땀은 왜 흘리셨을까? 볼도 빨개졌고.”
거짓말을 들킨 아론은 얼른 변명했다.
“아빠랑 형들이 배고플까 봐 조금만 뛰었어요.”
그러더니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화제를 돌릴 생각이었나보다.
“그리고 선물 있어요!”
“선물?”
“이거!”
아이의 작은 손바닥 위에는 반짝거리는 금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타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세상에! 이걸 어디서 나셨어요?”
“이게 뭔데?”
호기심으로 아론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델은 아이의 손에서 금화를 집어 들었다.
“이 금화를 어디서 났니, 아론?”
“빵값이에요. 내가 빵을 줬더니 어떤 아저씨가 줬어요.”
“이건 바하마르트 제국의 플래티넘 금화란 말이에요. 하나만으로도 오늘 빵은 다 살 수 있을 텐데. 미친 사람이 아니고선 누가…….”
타냐의 말에 아론이 울먹거렸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짜야! 진짜라고!”
아델이 아이를 얼른 끌어안고 달랬다.
“알았다, 아론. 하지만 빵값을 너무 많이 받아서 돌려줘야 할 것 같아. 그 아저씨 어디 계시니?”
아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갔어요.”
“어떻게 생긴 분인데? 우리 가게에 오셨던 손님은 아니고?”
“처음 봤어요. 머리가 하얗고…….”
“나이 많으신 귀족이었봐요. 생각나는 분 없으세요, 마님?”
타냐의 말에 아론이 소리쳤다.
“할아버지처럼 흰머리 아니야! 막 눈부시게 반짝반짝했어. 눈 색깔도 나랑 똑같았고…….”
순간 아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타냐가 얼른 끼어들었다.
“에이 아니에요. 은발 머리에 푸른 눈이 얼마나 흔한데요.”
“흔한 거 아닌데. 엄청 멋있고,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또 싸움도 잘할 거 같고, 또…….”
“아론, 타냐랑 가서 목욕 좀 해야겠다. 땀 많이 흘린 거 봐. 그리고 이 금화는 그 아저씨를 찾으면 돌려드리도록 하자. 그래도 되겠지?”
“네.”
아이가 풀죽은 얼굴로 대답하자,
“여기 둘 테니까 만일 그 아저씨를 만나면 네가 돌려드려. 알았지?”
아델은 아론이 보이도록 금고 안에 금화를 넣어두었다.
타냐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자 그녀는 빵 가게 밖으로 나왔다.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보자 아는 척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를 닮은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미련하게 뭘 기대한 거니, 아델.’
아론이 돌 될 무렵 그녀는 크리스틴 소유의 은행 지분이 제 앞으로 되어 있는 걸 알았다.
어마어마한 액수였지만 왠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인연을 끊어낸 대가를 받은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아론을 잘 키우기 위해 기꺼이 그 돈을 쓰기로 했다.
제일 먼저 그릴스 백작가의 빚을 모두 갚아주고 여백작이 되었다. 죽은 생부의 가족들은 모두 내보낸 후 그 저택에 빵 가게를 차린 것이다.
처음엔 크리스틴의 약혼녀였다며 해코지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금요일마다 저렴하게 빵을 나눠주다 보니 평판은 점점 좋아졌다.
그리고 마크와의 사이에서 아론을 낳았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오히려 아델을 응원했다.
그런 짐승과 헤어지길 백번 잘했다며.
아델은 기꺼이 그 소문을 받아들였다.
아론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 짐승의 아이라며 손가락질받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아이는 마냥 행복한 가정에서 구김 없이 자랐으면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당신이 무슨 염치로…….
“그 소문 들었어요? 바하마르트 제국의 황제가 온다면서요?”
다시 가게로 들어가려던 아델은 사람들의 말소리에 멈칫했다.
“아까 봤어요! 황제의 기사단이랑 늑대 일족이 행군하는 거. 그런데 황제는 안 보이는 것 같던데.”
“피에 굶주린 짐승이라니 어디서 사냥이라도 하나보죠. 당분간 집 밖에는 나오지 말아야겠네요.”
원하지 않아도 그의 소식은 이렇게 매일같이 들려왔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수많은 나라를 짓밟고…… 그렇게 사람들의 피를 제물 삼아 자신의 제국을 만들어나가는 잔혹한 황제의 이야기가.
그러느라 이곳에서 아론의 엄마로, 빵 가게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완전히 잊었나 보다.
***
경비병들의 안내를 받아 레아나가 달려간 곳은 마블 궁 앞의 호숫가였다.
검게 반짝이는 밤의 호수 위로 환한 달이 잠겨 있었다.
크리스틴은 그 앞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무언가 깊이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폐……!”
그를 부르려고 하자 어느새 달려온 짐머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이대로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난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데. 칼라임의 왕과 귀족들이 폐하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하긴 나도 궁금하군. 늑대 일족을 봉인시켰던 귀족회의 수장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크리스틴이 호수에서 시선을 돌리자, 레아나가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살려두실 건가요?”
푸른 눈을 반짝이며 다가드는 레아나를 보며 크리스틴이 엷게 웃었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짐머와 할 얘기가 있으니 먼저 돌아가라.”
“싫어요. 저도 이제 어엿한…….”
그 순간 다정하게 웃던 그의 눈빛이 냉엄해졌다. 이것은 주군의 눈빛.
“예, 폐하.”
레아나가 예를 갖춰 인사하고 돌아가자, 짐머가 다가왔다.
“뭔가 생각나셨습니까?”
“이곳이 그녀와 지내던 궁이라고?”
“예, 두 분은 마블 궁에서 지내셨죠. 이 호숫가에서 산책도 하시고.”
“이렇게 와보니 기억이 나는군. 그린힐도, 이 마블 궁도. 신기하게도 그녀에 대한 것만 빼고 말이지. 얼굴이나 목소리 같은 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군.”
“아델 양을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6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 말에 짐머는 한편으로 안도했다.
이미 아델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었다.
만일 그가 아델을 찾는다면 오히려 두 사람에게 더 비극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로가 원해서 헤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안타까웠다.
“그럼 이제 알현실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이건 가져라.”
난데없이 유산지에 쌓인 뭉클거리는 걸 건네받자 짐머는 당혹스러웠다.
“뭐, 뭡니까, 이건?”
“빵이라더군.”
“아니, 궁 안에 널리고 널린 게 먹을 건데…….”
“어떤 꼬맹이한테서 샀다. 자그마치 플래티넘 금화 3냥을 주고.”
“톡톡히 바가지 쓰셨군요.”
“그래. 비싼 거니까 먹고 싶으면 먹든가.”
그리고 크리스틴은 성큼성큼 알현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