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납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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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납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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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납치범
2023.03.13.
“바하마르트 제국의 황제 폐하십니다!”
벌컥!
시종장의 외침과 함께 알현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동시에 홀 안에 모여서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섰다.
저벅저벅.
크리스틴은 짐머와 십여 명의 기사들을 거느리고 넓은 홀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당당하면서도 느긋하게 걷는 그에게 칼라임의 귀족들이 차례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침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를 기다렸던 귀족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는 이제 그들의 군주였으니까.
마침내 알현실의 높은 계단을 오른 크리스틴이 황좌에 앉았다.
선황제 얀이 앉았던 그곳에서 이제 그가 칼라임의 귀족들을 굽어보았다.
“다들 오랜만이오. 모두 일어나시오.”
그러자 이자벨이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추며 말했다.
“바하마르트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왕께선 지금 위중하여 알현하지 못함을 헤아려주십시오.”
결국 칼라임의 황제 러스티스는 바하마르트 제국의 황제에게 항복문서를 보냈다. 그것으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양 국가 간에 본격적으로 논의할 일들은 이제부터였다.
그 첫 번째가 황제의 호칭은 바하마르트 제국의 통치자만 쓸 수 있다는 것.
이제 칼라임은 왕국으로, 황제는 왕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칼라임은 바하마르트 제국의 다른 제후국들과 동일한 법령에 따라야 했다.
그들은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고, 해마다 제국에 공납과 군역을 바칠 의무도 생긴 것이다.
칼라임의 황제에게는 죽음만큼이나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을 수밖에.
“들었소. 안타깝게도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중이라고?”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이자벨의 말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크리스틴의 입매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귀는 멀쩡하겠지?”
“예?”
“가서 전하시오. 주군에게 했던 충성의 서약을 지키라고.”
“폐하 하오나!”
크리스틴은 눈매를 날카롭게 빛내며 다소 나른하게 말했다.
“그럼 좀 더 쉽게 알아듣도록 말하던가. 어미의 치마폭에 그만 숨으라고.”
이자벨의 얼굴이 붉어졌다. 짐작대로 그의 아들은 아프다는 핑계로 이 자리에 나오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왕을 모셔오겠습니다.”
이자벨이 물러가자 이번에 크리스틴의 시선은 귀족 원로회의 구성원들을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다들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그들은 늑대 일족을 봉인시킨 가문의 후손들이었으니까.
***
모든 일정을 마친 크리스틴은 예전에 얀이 쓰던 황제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가 그곳을 쓰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칼라임의 왕은 부랴부랴 별채로 거처를 옮겼다. 굴욕적인 지시였지만 반발할 수는 없었다.
“알현은 잘 끝내셨어요?”
잠옷 차림의 레아나가 은발 머리를 길게 나풀거리며 졸졸 쫓아왔다.
소녀 때와 다르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늦은 시간 같은데, 할 얘기가 있나?”
레아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의 침실까지 따라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치, 꼭 할 얘기가 있어야 오나요 뭐. 그냥 잠도 안 오고…….”
그러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애플파이를 보고 활짝 웃었다. 고급스러운 은 식기 위에는 파이 한 조각이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놓여 있었다. 짐머에게 건넸던 것이었다.
“와, 마침 배고팠는데!”
레아나는 파이를 큼직하게 잘라 입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음, 맛있어! 맛있어! 예전에 아델이 만들어 준 거랑 똑같…….”
그러다 멈칫하며 고개를 들자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친 줄 알았는데 그는 테이블에 놓인 파이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그래, 아델은 음식 솜씨가 좋았다고 했었지.”
아델에 대해 떠올리면 마치 짙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짐머와 레아나가 말해준 것이 전부였다.
어렸을 때 친누이처럼 함께 자랐다는 것.
음식 솜씨가 좋았다는 것.
그리고 3개월 남짓 마블궁에서 함께 살았던 약혼녀라는 것.
그녀가 어떻게 생기고, 어떤 목소리로 말하는지, 둘이 함께 어떤 일들을 했는지, 그때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드셔보실래요?”
“됐다. 맛있으면 가져가서 먹도록 해.”
하지만 레아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깜박했네요. 요새 몸매관리 중이라는 걸.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폐하.”
탁!
레아나가 나가자 크리스틴은 한동안 테이블에 놓인 애플파이를 응시했다.
어디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파이 쪼가리.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닌데 우습게도 낯이 익은 기분이었다.
이걸 설마 아델이란 여자가 만든 걸까?
***
[제일 맛있는 빵 가게]
그것이 그린힐에서 제일 유명한 이 빵 가게의 이름이었다.
“작명 센스하고는.”
아침 일찍 빵 가게를 찾아온 크리스틴은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기억이 났다. 오래전 아델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빵 가게의 이름도 똑같았다는 걸. 그 간판을 만들어 달아준 게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들.
역시 그녀의 가게가 맞는 것 같다.
그 애플파이도 그녀가 만든 건가?
‘그렇다면 어제 만났던 그 아이는……?’
이른 아침인데도 넓은 매장 안은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얀 모자를 쓴 조리사들과 갓 구워진 빵을 사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활기차 보였다.
‘저들 중에 아델이 있을까?’
매장 안에 젊은 귀부인들이 몇 명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없는 것 같았다.
어쩐지 그녀를 만나면 금방 알아볼 것 같았다. 애플파이를 알아본 것처럼.
“저기 혹시…….”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크리스틴은 고개를 돌렸다.
“아아……!”
화려한 차림의 귀부인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자신을 알아본 얼굴이다.
“왜 이렇게 늦게……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금방 그렁그렁해졌다.
설마 이 여자가 아델?
그 순간 크리스틴은 절망했다. 한때 목숨만큼 사랑했다던 여자. 그런데 이렇게 마주하고 있어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역시 찾아오지 말 것을.
그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해할 때였다.
“고모님!”
등 뒤에서 카랑카랑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넘어져요. 천천히요.”
정신없이 달려오는 아론의 뒤를 타냐가 부랴부랴 쫓아왔다.
“안녕하세요, 미아 고모님! 캐이시는요?”
아론은 크리스틴 앞의 여자를 향해 공손히 배꼽 인사를 했다. 막 씻고 나왔는지 말갛게 반짝이는 아이는 앞머리가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이 봄날에 싹을 틔운 나뭇잎처럼 청량해 보였다.
“곧 올 거야. 아침부터 머리 모양이 마음에 안 든다고 어찌나 까탈을 부리는지. 그래서 내가 먼저 와버렸지.”
기억났다. 저 여자는 미아. 아델의 친구!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하지만 아델을 만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지금처럼 아무런 감정이 안 생길지도.
‘하긴 이제 와 만나서 뭘 어쩌려고.’
얼른 몸을 돌려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어, 납치범 아저씨다!”
그를 발견한 아론이 푸른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그 말에 미아와 타냐의 표정은 잔뜩 경계태세가 되었다.
“납치범이라니? 아론 그게 무슨 소리니?”
미아가 아론을 얼른 치마폭 뒤로 숨기며 물었다.
크리스틴은 당황스러웠다.
“오해가 좀 있었다.”
“맞아요. 오해예요!”
그를 곤란하게 만든 주제에 아론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해맑게 까르르 웃었다.
그러나 미아의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크리스틴에 대한 적의로 가득했다. 하지만 공손히 예의를 갖춰 말했다.
“감히 목숨 걸고 아룁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겨우 잊고 지내는 사람인데…….”
크리스틴의 입매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물론 또 찾아오는 일은 없겠지. 황궁으로 부르면 될 일이니.”
“뭐라고요?”
크리스틴은 기함하는 미아를 외면한 채 아론과 눈높이를 맞춰 인사했다.
“그럼 또 보자 아론.”
“잠깐만요, 아저씨!”
아론은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미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얼른 그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다.
“……알았죠?”
아이는 눈을 찡긋하며 비밀스럽게 웃어 보였다.
***
“미안, 많이 늦었지?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졌어.”
아델이 가게에 나타난 건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해마다 이맘때 봄이 되면 이자벨이 후원하는 성당 바자회가 열렸다. 다음 달 열리는 바자회 문제로 아델도 회의에 참석했다. 그동안 미아에게 아론과 가게를 잠시 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미아?”
그런데 미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델이 온 것도 모르고 테라스 의자에 넋 놓고 앉아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델이 다가가 살며시 어깨를 감싸자 미아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핫! 아델! 왔어? 회의는 잘 끝났어? 힘들었지? 얼른 옷 갈아입고 와. 날이 참 따뜻하다.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네.”
두서없이 떠들어대는 미아를 아델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딸꾹!”
아델은 픽 웃으며 모자의 리본을 풀었다.
“뭔데? 용서해 줄게 다 말해봐.”
잠시 머뭇거리던 미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분……, 아니 그 인간이…… 왔었어.”
아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또……?”
“또라니? 설마 너도 만난 거야?”
갑자기 몸에 힘이 풀려서 아델은 모자를 내려놓고 미아 앞에 앉았다.
“아니, 아무래도 아론이랑 만난 거 같아.”
“그래, 만났더라. 아론이 납치범이라고 하던데 애를 데려가려고 했었나 봐.”
아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서 아론은 지금 어딨어?”
“저택에서 캐이시랑 놀고 있지.”
캐이시는 미아의 딸로 아론과는 동갑이었다. 그래선지 둘이 아주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
“여하튼 조심해.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랑 분위기가 달랐어. 하긴 이제 대제국의 황제 폐하시니 어련하겠어. 피의 황제라는 말처럼 뭔가 싸하더라.”
아델은 미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론이 그를 만난 것도 계속 불길했는데 납치까지 하려고 했었다니!
‘이제 나타나서 설마 아론을 데려가려는 건가?’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으로 달려갔다.
저택은 빵 가게 뒤편에 있는 정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경매에 넘어갔던 그릴스 백작가의 저택을 아델이 사들여서 구조를 바꾼 것이었다.
“아론! 아론!”
아델의 부름을 듣고 저택에서 타냐가 달려 나왔다.
“오셨어요, 마님. 아론 도련님은 남쪽 놀이방에 계세요.”
“아닌데, 아론 없는데.”
어느새 나타났는지 커다란 인형을 끌어안은 깜찍한 여자아이가 말했다.
“캐이시, 그럼 아론은 어디 있니?”
캐이시가 고개를 젓자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몰라요. 아까아까 나갔어요. 어떤 아저씨를 만날 거라고 했는데.”
설마 그 아이가 크리스틴을?
눈앞이 캄캄해져서 비틀거리는 아델을 미아가 붙잡아주었다.
“걱정하지 마 아델. 설마 그분이 진짜 아이를 납치하진 않았겠지.”
“캐슬러 백작님을 부를까요?”
옆에 있던 타냐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일단 내가 좀 알아보고.”
아델은 떨리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
크리스틴은 아까부터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린힐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하지만 금방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미행자는 꽤 끈질겼다.
결국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멈춰 섰다.
“아코!”
얼른 쫓아서 모퉁이를 돌던 아론이 그의 긴 다리에 부딪혔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아이의 목덜미를 그가 재빨리 붙잡아주었다.
“아직 안 돌아갔나, 꼬맹이?”
“꼬맹이 아니에요. 아론이에요.”
“그래, 아론. 왜 날 계속 미행했지?”
“아저씨가 이걸 안 받았으니까요.”
아이의 작은 손바닥 위에는 플래티넘 금화 3냥이 놓여 있었다.
빵 가게 앞에서 아론은 기다려 달라고 귓속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아와 타냐 몰래 빠져나와 금화를 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받지 않으니 짧은 다리로 한참이나 쫓아온 것이다.
꼬맹이가 근성 하나는 알아줄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