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그들의 경계 너머에 나 (117/155)


117화. 그들의 경계 너머에 나
2023.03.17.



 
아이의 작은 손바닥 위에는 플래티넘 금화 3냥이 놓여 있었다.

빵 가게 앞에서 아론은 기다려 달라고 귓속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아와 타냐 몰래 빠져나와 금화를 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받지 않으니 짧은 다리로 한참이나 쫓아온 것이다.

꼬맹이가 근성 하나는 알아줄 만했다.


“빵값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엄마가 너무 많이 받아서 돌려줘야 한다고 그랬다니까요! 그리고 타냐는 이걸 준 아저씨가 미친 거라고 했고요.”

크리스틴은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어이없어했다.


“엄마에게 가서 전해라. 미친 사람이 준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받아도 된다고.”

“안 돼요. 우리 엄마가 꼭 돌려줘야 한다고 했어요!”

아이는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또박또박 소리쳤다. 제 딴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하지만 통통하게 부풀린 볼이 너무 귀여워서 잡아 흔들어주고 싶게 생겼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던 크리스틴은 이내 떠오르는 생각에 다시 서늘한 표정이 되었다.


“이 빵 가게 주인은 그릴스 여백작님이십니다. 남편이신 캐슬러 백작님은 맞은편에서 큰 진료소를 운영하시고요.”


“금슬도 좋으신지 아드님이 셋이나 되고.”

 
아델과 헤어진 게 6년 전.

이 아이의 나이로 가늠해보건대 그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임신했다는 뜻이다.

6년 동안 그녀가 자신만을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금방 다른 남자를 만나서 아이를 낳았다는건가?

아델이라는 여자는 생각보다…….


“아저씨, 화났어요?”

크리스틴이 쳐다보자 아론은 손으로 미간의 주름을 만들며 그의 표정을 흉내 냈다.


“이런 표정을 짓고 있어서요.”

그 표정이 너무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워서 크리스틴은 금방 아델에 관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좋아, 지금은 잔돈이 없으니 빵값은 나중에 다시 계산하마. 금화는 그때 돌려받고. 그럼 된 거지?”

“네!”

큰 문제가 해결된 듯 아이는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아이를 뒤로하고 돌아서던 크리스틴은 멈칫했다. 아론이 그의 재킷 끝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용건이 더 남았나?”

“그런데요, 아저씨는 집까지 잘 찾아갈 수 있어요?”

이 아이가 난데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설마 자신이 집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는 건가?


“물론.”

“그럼 우리 가게도 잘 찾아갈 수 있어요? 그냥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해서요. 진짜로.”

이제 보니 녀석은 길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하기야 아이가 언제까지 쫓아올까 싶어서 꽤 빙빙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황궁이 코 앞이었다.


“물론 너희 가게도 잘 찾아갈 수 있지. 그럼 그만 가봐라.”

크리스틴은 재킷을 붙잡고 있는 고사리 같은 손을 떼어내며 매정하게 돌아섰다.

그녀의 아이 따위…….

그동안 혼자 남은 아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 또래보다 더 똘똘하고 되바라지던 녀석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아…….”

크리스틴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아론에게로 향했다.

그때였다.


“비켜! 비켜라!”

두두두두!

고함과 함께 마차가 거칠게 아이를 덮칠 듯 달려왔다.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던 아론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다행히 마차는 아이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마차에서 뛰어내린 마부는 아론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무섭게 소리쳤다.


“야, 꼬마! 죽고 싶어! 엉! 감히 누구의 앞길을…… 으으윽!”

소리치던 마부는 이내 신음을 지르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론의 멱살을 잡은 손목을 크리스틴이 움켜쥔 것이다. 우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보면 속도를 줄이고,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러자 마차의 창문이 사납게 열렸다.


“시끄럽게 무슨 소란……!”

나이든 귀부인은 크리스틴을 알아보고 기겁을 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몰라뵈어 송구합니다,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송구하다면 마차를 좀 빌렸으면 하는데.”

크리스틴은 정중하게 부탁했지만 결국 마차를 내놓으라는 명령이었다.


“무, 물론입니다! 아이가 놀란 것 같은데 편하신 대로 얼마든 쓰십시오.”

귀부인은 하녀와 함께 마차의 짐을 허겁지겁 밖으로 끄집어냈다.


“감사하오.”

아론에게 마차에 타라는 듯 그가 눈을 찡긋했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마차에 냉큼 올라탔다. 길을 잃은 것도 문제였지만 사실은 다리가 아파서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짐머가 기사단을 이끌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폐하!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십니까? 그런데 저 아이는 설마……?”

“아델과 마크 캐슬러의 아들이다.”

“아아……!”

짐머가 어두운 얼굴로 나직하게 신음했다.


“이미 알고 있었겠지?”

“죄송합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아델 양에 관한 소식을 알고 싶어 하지 않으셔서.”

“그래, 자넬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좀 당황한 것뿐.”

그래 당황한 것뿐이다. 아론을 볼 때마다 뭔가 불편한 이 기분은.


“조금 전 아이의 엄마가 찾으러 왔었답니다. 제가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됐다. 내가 가서 계산할 것도 있고.”

 

황궁에서 아델의 가게까지는 마차로 10여 분 남짓 거리였다.

그런데 옆자리의 아이가 조용해서 보니 아론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짧은 다리로 반나절을 쫓아다니느라 꽤 피곤했었나 보다.

덜컹!

돌부리에 걸렸는지 마차가 작게 흔들렸다.

그러자 꾸벅꾸벅 졸던 아론의 머리가 그의 무릎으로 툭 떨어졌다. 그러고도 아이는 세상 모르게 잤다.

통통한 두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아이에게선 달짝지근하고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목덜미에 가지런히 돋아있는 솜털이 창가에서 들이치는 빛에 투명하게 반짝였다.

크리스틴은 손 그림자를 만들어 아이의 얼굴에 내려앉는 햇볕을 막아주었다.

이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비틀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델과 마크 캐슬러의 아이라…….

만일 자신이 그녀를 지우지 않았다면, 다 포기하고 그녀에게 돌아갔다면, 지금쯤 둘 사이에 이토록 예쁜 아이가 있었을까?

그 아이에게 이렇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었을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만일이라니…… 이제 와서 다 소용없는 일.

***



“아론!”

아론이 마차에서 내리자 두 명의 소년이 달려왔다.


“형아!”

아이는 양팔을 벌린 채 소년들을 향해 뛰어갔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응! 아저씨가 나쁜 사람을 혼내줬어.”

그리고 아론은 크리스틴을 돌아봤지만, 그는 마차 안에 그대로 있었다. 굳이 캐슬러의 아들들과 인사를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차의 창으로 장난치는 아이들이 눈에 자꾸 들어왔다.

큰아이가 폴린, 작은 아이가 제이드.

그래, 기억난다. 오래전 아델을 잘 따랐던 그 콩알만 하던 꼬마 녀석들.

그런데 이제 폴린은 코밑이 거뭇거뭇하고 덩치가 제법 어른만 했고, 날렵하게 검을 찬 제이드는 소년 기사다워 보였다.

아론이 자랑할 만큼 믿음직한 형들이었다.

그러다 아이의 얼굴이 활짝 펴지더니 어딘가로 와다다 달려갔다.


“아빠!”

고음의 미성으로 소리친 아이는 한 남자에게 폴짝 뛰어가 안겼다. 남자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요 녀석, 어딜 갔다 왔어. 엄마랑 형들이 걱정했잖아.”

이런 장면을 예전에도 보았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때도 부러워했었던가? 지금처럼.

크리스틴은 무언가 비틀린 기분이 들었다.

못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환하게 웃고 있는 저들 부자를 파멸시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가자.”

애써 나쁜 충동을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


“이랴 핫!”

마부가 채찍을 휘두를 때였다.


“……!”

심장이 갑자기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뭐지 싶어서 저도 모르게 마차 밖을 내다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숲을 담은 것 같은 짙은 초록 눈동자와…….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에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틀어 올린 검은 머리 아래로 가냘픈 목선을 우아하게 드러낸 여자. 그녀 역시 뚫어지게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아델이라는 걸.

그를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여자.

버린 건 자신이었는데 우습게도 버림받은 기분이라니.

그래서였을까? 비틀리고 일그러진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들려고 했다.


“멈춰.”

 

아델 앞을 지나가던 마차가 멈춰서더니 문이 열렸다.

저벅.

마차에서 내리는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할 정도로 수려했다.

화려하게 나풀거리는 은발 머리에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서늘한 분위기의 남자.

지난 6년 동안 수없이 그녀의 꿈속을 찾아와 괴롭히던 남자.

단념하고 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써도 끔찍하게 잊히지 않던 그 남자.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폐하를 뵈옵니다.”

그런 마음 따위 싹 다 지워버린 얼굴로 아델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두근.

크리스틴은 심장이 욱신거리다 못해 터져버릴 것처럼 날뛰었다. 이런 끔찍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대가…….”

“아론을 무사히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새 두 사람에게 다가온 마크와 아들들도 그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러자 뭣도 모르고 눈치를 보던 아론까지 냉큼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공손함이 크리스틴을 오히려 화나게 했다. 자신과의 사이를 명확하게 선 긋는 것 같았으니까.

그들에게서 배제되어 따돌려진 기분이었다.

그는 이제 수천만 명의 백성을 거느린 제국의 황제.

그런데 겨우 저 다섯 명이 같은 편이라는 사실에 왜 이렇게 초라한 기분이 드는지 몰랐다.


“다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군. 조만간 황궁으로 초대하지.”

그래서였을까? 결국 예정에도 없던 말을 하고야 말았다.


“초대라고요?”

아델이 깜짝 놀라 묻자, 크리스틴은 잔인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소, 초대. 왜 납치라도 해주길 바란 건가?”

두근.

아델의 초록 눈동자가 짙고 어두워졌다.

그를 경멸하는 게 분명한 표정. 그럴수록 심장의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더 못되게 굴고 싶어졌다.


“그럼 다음 만남을 손꼽아 기대하겠소, 부인.”

그는 아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두 눈을 싸늘하게 빛내며.


 

***



“으윽……!”

마차에 올라탄 크리스틴은 참지 못하고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몸을 웅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조여왔다.


“……황궁! 빨리 황…… 하아!”

겨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부를 향해 외쳤다.

가끔씩 이럴 때가 있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심장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하면 심할 땐 정신을 잃기도 했다.

레아나의 말로는 의식의 후유증일 거라고 했다.

그래선지 아무리 실력 있는 의사를 불러와도 소용없었다. 이럴 땐 오직 레아나의 치유 마법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마저도 고통을 일시적으로 줄여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엔 거의 이런 일이 없어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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