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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심장의 기억 (118/155)


118화. 심장의 기억
2023.03.20.



 
스스스!

갑자기 크리스틴의 침실에 나타난 레아나로 인해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가 찾는다는 말에 그녀는 공간이동 마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폐하!”

레아나가 달려오자,


“다들 물러가라.”

등받이가 기다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던 크리스틴이 명령했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시종들과 호위들이 얼른 물러났다.


“내 방에 들어올 땐 반드시 문으로 드나들라고 했을 텐데.”

“그건 나중에 혼날게요. 그보다 괜찮으세요?”

레아나가 그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미간을 모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어서 침대에 누우세요.”

레아나가 얼른 부축해서 침대로 데려갔다. 사람들 앞에서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는 억지로 의자에 앉아 고통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에는 괜찮아지신 것 같더니…….”

“그래도 정신은 차리고 있었다.”

침대에 누우며 그는 핏기없는 입술로 웃었다.

그걸 본 레아나가 속이 상해서 화를 냈다.


“그러니 항상 절 옆에 두셔야 한다고 했잖아요! 아침부터 말도 없이 사라지시고…….”

“알았다, 환자에게 잔소리는 그만.”

“다 나으시면 그때마저 할 거예요. 뭐.”

“그보다 이게 뭔지 설명해줬으면 하는데.”

그는 고통스러워서 왼쪽 가슴을 움켜쥐면서도 다른 한 손으론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려 갔다.

이내 청동처럼 탄탄한 왼쪽 가슴 위에 드문드문 붉은 칼자국이 드러났다. 마치 지금 막 생겨난 것처럼 칼자국 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아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폐하의 부탁을 받아서 제가 그곳에 아델의 이름을 새겼어요. 그날 의식을 치르기 전에. 그런데 폐하를 살리기 위해 그녀를 지우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죠.”

그리고 지금 심장 위에 새겨 놓았던 이름이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항상 비슷했어.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워지는 순간은 아델이라는 여자를 떠올릴 때마다였지. 오늘처럼 상처가 드러난 건 처음이지만.”

“만나고 오신 거죠?”

“음.”

레아나가 쓰게 웃었다.


“심장은 기억하고 있었나 보네요.”

“그런가 보군.”

목숨을 건 의식 직전에 칼로 이름을 새겨넣을 정도의 여자.

그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마지막까지 놓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토록 절박하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여자라는 건가?

그런데 너는…….

마크를 향해 달려가던 아론과 그 옆에 자연스럽게 서 있던 아델의 모습에 배신감이 들었다.

너는 고작 몇 달도 기다리지 못한 건가?

그 아이의 나이를 가늠해보면 자신과 헤어지자마자 다른 남자를 받아들였다는 게 계산이 맞았다.


“치유 마법을 쓰겠습니다. 이제 말씀은 그만하십시오.”

“그러면 이 표식도 사라지는 건가?”

“아마도요. 제가 마법을 쓰지 않길 바라시나요?”

크리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아픈 건 끔찍하다.”

그래,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여자 따위 잊는 게 차라리…….


“그럼 얌전히 눈을 감으세요.”

레아나가 주문을 외우자 환한 빛이 그를 감쌌다.

***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아델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지만, 침대에 누운 아론은 말똥말똥 눈을 뜬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작은 아이가 마치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우습고도 귀여워서 아델은 살며시 코를 잡아 흔들었다.


“아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론?”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침대에서 발딱 일어나 앉았다.


“엄마, 폐하가 뭐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델이 당황했다.

설마 이 아이가 계속 그를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폐하는…… 아주 높은 분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야.”

“그럼 그 아저씨 아주 높은 분이야? 다들 폐하라고 불렀잖아.”

“응. 아주 높은 분…….”

이젠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사람.

높은 곳으로 올라가느라 자신 따윈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


“얼마큼 높은데? 하늘만큼 엄청 엄청?”

“응, 하늘만큼. 그러니까 아론 이제 그 아저씨랑 만나지 말자. 엄마는 그랬으면 좋겠어.”

아델은 낯의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처음 그가 아론을 데려갔을 땐 그대로 납치라도 하려는 걸로 알았다. 지금껏 버려둔 아이를 이제 와서 데려가려는 줄 알고 반쯤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바라볼 때도, 아론을 볼 때도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지던 표정.

설마 내가 보냈던 편지를 읽지 못한 건가?

그래서 아론이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는 건가?

그렇다면 계속 감추는 게 좋은 걸까? 아니면…….


“엄마는 그 아저씨가 싫어?”

아이는 크리스틴과 똑같은 청회색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빛도 그와 똑같았다.


“싫은 건 아닌데 너무 높은 사람이니까.”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뭐?”

아델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높은 사람이니까. 만나러 가려면 높이 올라가야 하잖아. 그러다 떨어지면 다치고.”

아이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아델은 씁쓸해졌다. 그 말이 맞았으니까.


“그래. 떨어지면 다칠까 봐. 엄마는 우리 아론이 안 다치고, 안 아팠으면 좋겠어.”

아델은 임신 기간 동안 수없이 걱정했었다. 늑대 일족의 아이라서 혹시라도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까 봐.

하지만 아이는 지금까지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랐다. 아이의 눈빛이 그와 닮지 않았다면 그녀조차 그의 아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리고 마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폴린과 제이드와 함께 우애 깊은 형제로 자랐다.

적어도 지금까지 행복한 가정 속에서 결핍도 슬픔도 모르는 아이로 키워온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아이가 그렇게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버림받은 엄마, 버림받은 아이라는 사실 따윈 까맣게 모른 채.


“하아암~.”

졸린 지 크게 하품을 하더니 아론은 스르르 눈이 감겼다.


“안 다칠 게 엄마. 걱정하지 마.”

안 만나겠다는 건지, 안 다치게 만나겠다는 건지…….

하지만 아이는 금세 새근거리며 잠이 들어 버렸다.

아론이 잠든 걸 확인한 아델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캐시미어로 된 숄을 둘렀다.


“이 밤에 어딜 가시려고요?”

타냐가 따라 들어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델이 낮에 크리스틴을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계속 신경 쓰였던 것이다. 듣기로 그는 그녀를 낯선 사람처럼 무심히 대했다고 했다.

그 얘기에 타냐가 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아델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상상도 안 갔다.


“산책 좀 하려고.”

“저도 같이 가요.”

“미안. 마크랑 같이하기로 했어.”

“이 시간에요?”

대외적으로 아델과 마크는 부부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실 두 사람은 철저하게 무늬만 부부였다.

저택 안에서도 아델과 마크의 침실은 서로 다른 건물에 있었다. 그녀와 아이들은 빵 가게와 이어지는 본관에서 지냈고, 마크는 그 옆의 별관 건물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6년 동안 부부로 살면서 한 번도 서로의 침실을 드나든 적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서로 아이들의 엄마 아빠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온 것이다.


“왜? 이 시간에 남편과 산책하는 게 이상한 일이야?”

“아뇨, 그게 아니라…….”

아델의 표정을 살피던 타냐는 안심한 듯 웃었다. 그녀의 표정 어디에도 낮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럼 기왕 나가시는 김에 화장이라도 좀 하세요.”

타냐가 화장대로 달려가 화장품을 뒤적거리자 아델은 당황했다.


“무슨 소리야. 잘 밤에 화장은 왜…….”

“그래도 백작님께 예뻐 보이면 좋잖아요.”

“필요 없으니 너도 그만 정리하고 자. 늦게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아유, 밤새 안 들어오셔도 돼요. 그러니까 두 분 얘기 많이들 나누세요.”

타냐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현관 앞까지 아델을 배웅해 주었다.


“하여간 저 오지랖…….”

“오늘 밤 파이팅!”

 

***

본의 아니게 집에서 쫓겨난 아델은 한동안 정원을 거닐었다.

물론 마크와 산책한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걱정되어서 쫓아오겠다는 타냐를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었다.

우울한 감정이 심장으로 파고들어 참을 수가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혼자 있고 싶었다. 더는 괜찮은 척, 꿋꿋한 척할 수가 없었으니까.

사실 그녀의 안에는 누구보다 겁 많고 약한 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강해 보였을 뿐.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애쓸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아아…….”

결국, 정원 테이블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서늘한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이제껏 단념하지 못한 그녀를 조롱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국의 황제가 된 그의 앞에서 자신은 또 얼마나 초라한 기분이 들었던가?

낮에 일이 떠오를 때마다 아델은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기분이었다.


“아직 밤공기가 찹니다, 아델.”

마크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마크…….”

“잠이 안 오나 봐요.”

“네.”

“이러고 있으면 감기 들어요.”

그는 겉옷을 벗어 아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녀가 울고 있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해주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남편이 해야 할 일인걸요.”

“오늘은 좀…… 기분이 엉망이네요…….”

마크는 옆자리에 앉아 아델의 어깨를 보듬었다.


“알아요.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요.”

“싫어요. 그 사람 때문에 우는 건 이제 더는 안 할 거예요.”

하지만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얼른 닦아내는 아델을 보며 마크가 혀를 찼다.


“너무 참는 것도 안 좋아요.”

그 말이 기폭제라도 된 것 같았다.


“……흑!”

아델은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울음소리를 참아보려고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으흐흑! 아아!”

그의 다정한 배려가 사람을 무너지게 만든 것이다.


“잘했어요, 아델. 당신 단점은 항상 너무 많이 참는 거였어.”

어른스럽게 등을 토닥이는 그의 앞에서 아델은 결국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수치심도 잊고 감정의 밑바닥까지 다 토해내면서.

한참 후 울음이 잦아든 아델이 고개를 들자,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과 마주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앞에서 실컷 울고 났을 뿐인데 뭔가 은밀한 비밀이라도 나눈 기분이 들었다.

그건 마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의 따뜻한 눈빛이 점점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으니까.

그의 커다란 손이 아델의 얼굴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이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왔다. 그의 숨은 뜨겁고 거칠었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아델은 잘 알았다.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며 그녀가 물었다.


“날 안고 싶나요, 마크?”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볼 때마다. 항상.”

민망해진 아델은 살며시 눈을 흘기며 웃었다.


“그런 엉큼한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네요.”

“당신이 도망갈까 봐.”

나 따위가 감히 뭐라고…….

이토록 완벽한 사람을 곁에 두고 지금껏 허상 속의 남자를 놓지 못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던 아델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해요, 마크.”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크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함께 사라지는 남녀를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눈동자는 빙하처럼 싸늘했다.

아니, 더 깊은 곳에는 검붉은 화염이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둠에서 나온 그림자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델의 숄을 주워들었다.

참을 수 없는 어떤 기분에 그 숄을 주워 얼굴을 깊이 묻었다.

미치도록 달큼한 체취였다.

심장 언저리가 다시금 욱신거리며 피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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