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빼앗기긴 싫습니다 (119/155)


119화. 빼앗기긴 싫습니다
2023.03.24.



 
풀썩!

아델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마크는 손을 뻗어 드레스를 벗기려고 했다.


“옷, 옷은 내가 벗을게요! 그게 좋겠어요.”

아델은 얼른 마크에게서 빠져나와 침대에서 일어섰다.

등 뒤로 손을 돌려 드레스의 훅을 풀고 어깨에 반쯤 걸쳐진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묵직한 질감의 드레스 자락이 발밑으로 차르르 떨어졌다.

순식간에 속살이 비치는 슈미즈 차림이 되자 아델은 부끄러워서 가슴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하얗게 드러난 피부만으로도 충분히 야릇하고 관능적인 모습이었다.

잠시 넋이 나가 바라보던 마크가 짓궂게 웃었다.


“그것도 마저 벗어줬으면 하는데요.”

아델은 난처한 얼굴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와인 한 잔만 마시면 안 될까요?”

“기다려요.”

잠시 후 마크는 붉게 채워진 와인 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얼른 받아서 단숨에 마셔버렸다.


“한 잔 더 줄까요?”

“그래 줄래요?”

아델이 내민 잔에 마크는 와인을 가득 채웠다.

아델은 이번에도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다시 잔을 내밀었다.


“한 잔만 더요.”

“아델.”

마크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아델이 웃었다.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요.”

“독한 거라서 금방 취할 거예요.”

“잘됐네요.”

“그럼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상관없어요. 차라리 엉망으로 취하면…….”

결국 마크가 그녀의 손에서 와인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뭐가 그렇게 조급하죠? 그가 나타나니까 다시 마음이 흔들려요? 그게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는 건가요?”

“아뇨!”

“그럼 내게 몸으로 보은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요?”

아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마크는 침대 시트를 끌어다 가냘픈 어깨에 둘러주었다.


“당신 지금 굉장히 떨고 있는 거 알아요?”

“…….”

“몸도 너무 굳었고, 어깨와 팔에 소름까지 돋아 있어요. 그래놓고 나더러 안으라고요?”

그제야 아델은 자신의 팔에 소름이 돋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잔만 더 마시면 괜찮을 거예요.”

“그와 사랑을 나눌 때도 그랬나요? 이렇게 취해서.”

정곡을 찔러온 질문에 아델은 가슴이 덜컹거렸다.


“마크…….”

그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요. 떨고 있는 여자에게 술을 먹여서 욕망을 채우고 싶은 게 아니라.”

아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미안해요, 마크. 내가 너무 어리석었네요. 당신 말이 다 맞아요. 그에게 다시 마음이 흔들릴까봐 두려워요. 당신처럼 좋은 사람을 곁에 두고 너무 바보 같은 짓이잖아요.”

마크는 아델의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었다.


“나 때문에 이러는 거면 실망이에요. 난 지금 이대로도 좋으니까. 당신이 제이드의 엄마가 되어 준 것도, 내가 아론의 아빠가 되어 준 것도 그 아이들을 사랑해서였어요. 그러니 빚진 기분 같은 거 갖지 말아요.”

“마크, 아무래도 당신은 내게 너무 과분해요.”

“이제 알았어요?”

결국 아델이 엷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요.”

“하지만 오늘 밤 당신은 나와 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난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거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다정하던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당신을 빼앗기기는 싫거든요, 아무리 황제라도.”

아델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씁쓸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는 이제 나 따윈 안중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같은 남자인 마크는 읽을 수 있었다. 아델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의 무심한 표정 뒤에 들끓고 있는 기묘한 감정을.

***



“축하해, 아델! 아우 진짜 잘했어!”

아침부터 아델의 저택으로 들이닥치며 미아가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 타냐한테 다 들었어.”

타냐도 놀리듯 눈을 가늘게 떴다.


“새벽에 백작님 침실에서 나오신 걸 봤다는 사람이 한둘 아니거든요. 두 분 갑자기 너무 뜨거우신 거 아니에요?”

“이러다 곧 넷째가 생기는 거 아니야?”

아델은 마크와 했던 얘기가 있었기에 두 사람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부부가 잠자리한다는 걸 부인하는 것도 우스웠고.


“그보다 타냐, 오늘 가게에 안 나가봐도 되는지 물어봐 줄래? 몸 상태가 좀 안 좋아서.”

아델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해가 지면 쌀쌀했다. 어젯밤 정원에 오래 있었더니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네, 제가 점장님께 잘 얘기할게요. 아무래도 마님은 무척 피곤하실 테니.”

“오오, 우리 오라버니 체력이 꽤 좋았나…….”

결국 아델이 못 참고 소리쳤다.


“둘 다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 안 그러면 쫓아낼 거야!”

“저, 마님…….”

“쓸데없는 소리 말래도!”

아델이 사납게 타냐를 째려보자, 그녀는 익살스럽게 입을 다문 채 옆을 가리켰다.

아델이 고개를 돌리자 타냐의 옆에 어린 하녀가 겁먹은 얼굴로 서 있었다.


“죄송해요, 마님. 그게…….”

“아, 미안. 무슨 일이지?”

“가게에 누가 오셨어요. 궁에서 엄청 높은 분이 왔다던데…….”

 


“짐머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죠?”

아델을 본 짐머는 웃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네,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달라지셨네요. 아, 멋있어지셨다는 말이에요.”

아델은 결코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6년 전에 그는 크리스틴의 부관으로 항상 제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조금 더 길어지고 옷차림도 세련된 젊은 귀족의 모습이었다. 표정도 어딘가 위엄있고 기품이 풍겼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사실 아델은 오랜만에 만나는 짐머가 반갑기보다 불안했다.

크리스틴과 다시 얽히게 된다는 예고 같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짐머는 바하마르트 제국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내밀었다.


“폐하께서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캐슬러 백작의 가족, 그리고 보니타 자작 부부의 가족까지 함께.”

엉겁결에 좋아하던 미아는 아델의 표정을 보자 곧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좋은 의도로 아델과 자신의 부부까지 궁으로 부를 리 없었으니까.


“너무 갑작스러운 초대네요. 감사하지만 저희도 일정이 있어서 곤란합니다.”

“네, 갑작스럽고 난처한 초대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칼라임에 와서 제일 처음 준비하신 일정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짐머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하고 깍듯했다. 하지만 사무적이고 차가웠다.

그는 아델에게 실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이 목숨 바쳐 사랑했던 여자가 불과 몇 달 만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사실에.


“그렇군요. 다른 사람도 아닌 폐하의 명령이시니…….”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다시 공손히 인사한 짐머는 가게 앞에 세워진 마차에 올라탔다. 크고 화려한 황궁의 마차가 지나가자 사람들이 다들 한 번씩 쳐다보았다.


“마님, 괜찮으세요?”

마차가 떠난 후에 타냐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아델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럼. 그보다 정신이 없어서 짐머 경과 인사도 못 시켜줬네.”

“아유, 인사라니요! 지체 높으신 귀족 나리랑 제가 무슨 인사를.”

타냐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상처가 컸다.

아델과 크리스틴이 헤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멀어졌지만 6년 동안 줄곧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 기사단을 거느리고 나타난 짐머의 모습에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부질없는 건 줄 깨달았다.

그가 모시던 주군이 황제가 되었다면 짐머 역시 높은 귀족이 되었으리라. 출신도 비천한 하녀 따위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높은 사람.

***



“우와, 여기가 왕궁이야?”

“엄청 크고 화려해!”

“형아, 나도 나도!”

아델과 가족을 태운 마차가 궁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창가에 매달려 구경하기 바빴다.

바하마르트 제국은 마법사들을 우대하고 아카데미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촛불 대신 마법 조명으로 궁을 화려하게 밝히고 있었다.


“형아, 저기 괴물이야!”

그때 아론이 소리쳤다.


“어디, 어디?”

“괴물이 아니고 늑대 일족이야.”

크리스틴이 오기 전까지 그린힐에는 늑대 일족이 거의 살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인 반수의 모습을 한 늑대 일족까지 궁 안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늑대 일족, 괴물 아니야?”

아론의 말을 듣고 있던 아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이는 자신이 늑대 일족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것이다.

이대로 모른 채 자란다면 좋으련만 만일 크리스틴처럼 뒤늦게 변이가 나타난다면…….


“그래, 늑대 일족은 전사야. 아주 힘이 세고 잘 싸우는 전사. 저번에 널 데려다준 폐하도 늑대 일족이야.”

제이드의 말에 아론의 눈이 금방 빛났다.


“그럼 나도 늑대 일족할래! 그 폐하 아저씨처럼!”

“바보야, 넌 사람이라서 안 돼.”

“엄마, 진짜예요?”

아이는 제이드의 말이 틀렸다고 해달라는 듯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차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마크가 물었다.


“아론은 늑대 일족이 되고 싶니?”

“네! 힘이 세지면 엄마랑 아빠를 지켜주려고요.”

아이의 계산 없는 대답에 마크는 물론 아델도 웃고 말았다.


“아론은 이미 엄마랑 아빠를 잘 지켜주고 있는걸. 엄마는 아론이 없으면 무서워서 잠도 잘 못 자는데.”

그러자 아론은 아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달래듯 토닥여 주기까지 했다.


“걱정 마요, 엄마. 아론이 지켜줄게요.”

 

 
아이의 그 말에 아델은 마음이 가득 찼다. 언제나 그렇듯 이 아이만 있으면 그걸로 모든 게 충분했다.

그러는 동안 마차는 화려한 본궁을 지나 고즈넉한 가로수길로 향했다.

봄의 초입이라 잔뜩 물이 오른 나뭇가지에 푸릇푸릇 새싹이 움트고 있었다.

아델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잘 알았다.

마블 궁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6년 전 그때와 똑같은 계절이었다.

대체 그는 왜…….

***



“황제 폐하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들 일어나 크리스틴을 맞이했다.

마블 궁의 소연회장 안으로 크리스틴이 시종과 기사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황제라는 호칭이 주는 위화감 때문인지 같은 사람이었는데도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자, 앉지.”

그는 기다란 테이블의 제일 상석에 앉았다. 왼쪽에는 아델의 가족이 나란히 앉고, 오른쪽에는 미아의 가족이 앉았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마블 궁은 여전히 아름답네요.”

어색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을 꺼낸 미아는 곧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은 과거 크리스틴과 아델이 신혼을 보내던 곳이었으니까.


“캐슬러 부인도 그리 생각하오?”

크리스틴의 서늘한 시선이 아델에게 꽂혔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런데 음식이 너무 훌륭해서 배고픈 아이들에게는 고문이 될 것 같군요. 부디 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아델은 불편한 분위기를 빠져나가기 위해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델의 말에 아론과 캐이시도 맞장구쳤다.


“배고파요, 폐하.”

“폐하, 식사하면 안 돼요?”

식당 안은 잠시 얼어붙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예전의 크리스틴이 아닌 제국의 황제였으니까. 그것도 주변국을 무참하게 정복한 피의 황제.

다행히 크리스틴은 엷게 웃으며 먼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래, 식사부터 하지.”

그의 말이 끝나자 시종들이 따뜻하게 데운 요리를 더 내왔다. 그리고 술잔도 가득 채웠다.

크리스틴이 잔을 들어 올리자,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덩달아 음료가 든 잔을 들었다.

그리고 표면상으로는 평화로운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폴린은 피아노를 연주했고, 제이드는 검무를 선보였다.

그러나 식사 중에도, 식사를 마친 후에도 남자들은 계속 술을 마셨다. 크리스틴이 작정한 듯 마크와 보니타 자작에게 술을 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보니타 자작은 식탁에 그대로 엎어졌다.

그 후에도 마크와 크리스틴은 내기라도 하듯 술잔을 멈추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