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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마블 궁의 침실에서 너와 나 (120/155)


120화. 마블 궁의 침실에서 너와 나
2023.03.27.


마크와 크리스틴은 내기라도 하듯 술잔을 멈추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아델이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데 짐머가 다가왔다.


“방을 마련해두었으니 아이들과 올라가서 쉬십시오. 술자리가 끝나면 저희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이미 술이 과해 보이는걸요. 좀 말려주시면 안 될까요?”

아델이 부탁했지만 짐머는 사무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폐하의 유흥을 제가 어찌 감히 중단시키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아델과 일행들은 소연회장에서 내쫓기듯 나와야 했다. 술에 취해 기절한 보니타 자작까지 시종들에게 업혀서 나왔다.

소연회장 안에는 크리스틴과 마크 둘만 남았다.

아델이 걱정스럽게 그들을 돌아보는데 옆에 있던 미아도 중얼거렸다.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지금 아델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틴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무참하게 깨트려버린 사람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는 지금 마크나 자신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는 자리에 있었었다.


‘제발 크리스틴, 그를 건드리지 마…….’

간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술잔을 들이켜던 그의 입꼬리가 야릇하게 올라간 기분이었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당신!’

어쩐지 이 모든 게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종들이 곧 식당의 문을 닫는 바람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

마아는 술에 취한 보니타 자작과 함께 1층의 메인 응접실로 들어가고, 아론을 비롯해 아이들은 마블 궁을 구경하고 싶다며 시종들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아델은 2층으로 안내되었다. 하필 예전에 그녀가 쓰던 침실 옆에 딸린 응접실이었다. 부랴부랴 치우고 벽난로를 피웠는지 실내에는 아직 온기가 감돌지 않았다.

가뜩이나 감기 기운이 있던 아델은 한기를 피하려고 벽난로 앞으로 갔다. 그러다 침실과 연결된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는 걸 보았다.

오랫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는지 자물쇠 위에 먼지가 자욱했다. 묘한 호기심이 생겨서 만져보니 걸려 있기만 할 뿐 잠겨 있지는 않았다.

달그락.

자물쇠를 벗기고 조심스럽게 밀자 문이 열렸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문은 몹시 뻑뻑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침실의 가구들은 하얀 천으로 덮여있었다. 창가엔 아델이 좋아하던 고풍스러운 레터 테스크가 있었고, 그 옆에는 타원형의 거울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화사한 살구색 캐노피가 달린 커다란 침대…….

마치 6년 전 그 시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하얀 시트가 덮여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이곳에서 서로를 수없이 탐닉했었다.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보였었다.

더없이 뜨거웠고, 미치도록 격정적인 연인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델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뺨이 달아오르고 야릇한 열기에 휩싸이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하나 보다.


“미쳤다, 아델…… 미쳤어…….”

아델은 그대로 침대 위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직도 그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이 너무 화가 났다.

***



“한 잔 더 받겠소? 아니면 여기서 기권인가?”

“기권이라니요! 어, 근데 폐하가 왜 자꾸 늘어나는 겁니까? 하나, 둘…….”

“자네도 마찬가지네. 분신술 하는 재주가 생긴 건가?”

“어, 그런 모양입니다.”

마크는 껄껄껄 웃었다.

별로 즐거울 것 없는 술자리고, 유쾌하지 않은 상대를 앞에 두고 있었으면서도 빌어먹을 웃음이 왜 자꾸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럼 더 받게.”

크리스틴이 빈 잔을 채우려고 하자 마크가 얼른 손으로 막았다.


“그러지 말고 사내답게 화끈하게 갑시다, 폐하.”

그는 브랜디 병을 집어 들어 2개의 커다란 물잔에 가득 채웠다.

콸콸콸 시원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술을 보며 크리스틴과 마크는 둘 다 껄껄 웃었다.


“빌어먹을…….”

그러다 크리스틴이 중얼거렸다. 그 역시 웃고 싶어서 웃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빌어먹을 술이 문제였다.


“그럼 한 번에 가는 겁니다, 폐하.”

“두말하면 잔소리.”

크리스틴이 먼저 잔을 입에 들이부었다.


“앗, 반칙입니다!”

마크도 얼른 술잔을 벌컥벌컥 비우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게슴츠레하게 풀린 와중에도 두 사람을 서로를 노려보았다.


‘웃다가 노려보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군.’

소연회장에 들어와 분위기를 살피던 짐머는 쯧쯧 혀를 찼다.

캐슬러 백작 가족을 초대한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걱정했었다. 크리스틴이 무슨 생각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으니까.

자신이라면 배신한 여자와 그 여자의 남편 따윈 결코 보고 싶을 리 없었다. 해코지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 보면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실 크리스틴은 그다지 주량이 강한 편이 아니었으니 곧 잠들 테니까.


“폐하께서 잠드시면 침실로 조심히 모시게. 손님도 끝까지 잘 돌봐드리고.”

“예, 공작님.”

 

짐머는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멀리서 호숫가 주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늦은 시간인데 다들 졸리지도 않은지 새로운 장소에서 신이 나 보였다.

저 아이가 그 아이인가?

짐머는 근위대들의 주변을 맴돌며 종알거리는 사내아이를 보았다.

제 엄마를 닮아서 검은 머리에 꽤 미인형의 이목구비였다. 푸른색 눈빛은 캐슬러 백작을 닮은 건가?

아니, 그보다는 크리스틴의 눈동자 색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정말 폐하의 아이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짐머가 알기로 크리스틴은 늑대 일족의 아이가 태어나는 걸 두려워했다. 그 문제로 아델과 다투기까지 했으니 그의 아이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델은 크리스틴과 헤어지자마자 마크와 함께 살았고, 두 사람은 사이좋은 부부로 유명했다.


“저…….”

그때 조심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거기엔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타냐?”

“오랜만에 뵙습니다. 짐머 님, 아니 크라이튼 공작님.”

타냐는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며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냥 예전처럼 불러도 돼요, 타냐 양”

“아닙니다. 지체 높으신 분을 제가 감히 어찌.”

타냐가 손을 내저으며 도리질 치자 짐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잘 지냈죠? 핸리에게 루스울프에 왔다가 다시 돌아갔다는 얘긴 들었어요.”

“예, 마님이 보고 싶어서요. 제겐 가족이나 다름없으시니까요.”

“가족도 그렇게는 못 할 겁니다.”

“공작님도 그러셨을걸요. 폐하와 헤어지셨다면.”

잠시 생각하던 짐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렇겠군요. 우린 닮은 구석이 많네요.”

짐머로서는 별말이 아니었을지 몰랐지만 타냐는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지체 높은 공작이 되었으니 자신 따윈 모른 척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도 예전처럼 다정하고 자상했다.

부질없는 기대감이 들게 말이다.

하지만 이젠 멀어도 너무 먼 사람이 되었다.


“저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그게……. 폐하께서 아델 마님을 왜 떠나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크리스틴의 얘기가 나오자 짐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남녀가 헤어지는 이유는 본인들만 아는 거겠죠.”

“하지만 두 분, 서로에게 진심 아니셨나요? 옆에서 보는 제가 다 속상해서요.”

“그 물음은 타냐 양의 주인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지금 무척 행복해 보이던데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의도가 뭡니까?”

짐머의 차가운 반응에 타냐는 당황했다.


“설마…… 마님께서 보낸 편지를 못 받으신 건가요?”

“편지요?”

“맙소사!”

타냐는 혼잣말처럼 비명을 질렀다.


“무슨 편지 말인가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럼 쉬세요.”

그녀는 얼른 자리를 물러났다.

이제 보니 황제는 아론을 정말로 마크의 아이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설마 그래서 아델을 버린 건가?

지금이라도 얘기를 해주는 게 나은 것인지 모르겠다. 이 문제는 우선 아델과 상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만취한 크리스틴과 마크는 비틀거리며 2층 집무실로 향했다. 주변에 시종들과 근위병이 불안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모두 물러나라고 소리치자 얼른 사라졌다. 그래놓고 그는 마크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딱 한 잔만 더 마시는걸세. 딱 한 잔.”

“원래 다 딱 한 잔으로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나랑 한잔하는 게 싫은가?”

“그럴 리가요. 한 잔만 하는 게 더 싫습니다.”

“역시 마음에 들어! 마크 캐슬러!”

“감사합니다. 폐하도 제 마음에 아주 쏙 드십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젖히며 껄껄 웃었다.

물론 마지막엔 동시에 빌어먹을…… 하고 중얼거리면서.

감정과 행동이 통제력을 잃고 자꾸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당장 눈앞의 문을 여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폐하, 문이 정말 안 열립니다.”

“그러게. 빌어먹을!”

그들은 문에 자물쇠가 걸린 것도 모르고 문손잡이와 실랑이 중이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밀겠습니다.”

“아니, 내가 부수지.”

“좋습니다, 같이 부수도록 하죠. 하나, 둘……!”

우지끈!

마크가 셋을 세기도 전에 크리스틴이 먼저 돌격해 어깨를 문에 부딪쳤다. 그러자 자물쇠가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쿠당탕!

동시에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래놓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 웃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어깨가 아프긴 하지만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군.”

“아쉽군요.”

“뭐……?”

크리스틴이 인상을 썼지만 마크는 어느새 그대로 코를 드르렁거렸다.


“하!”

크리스틴 역시 대자로 누운 그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 계속 낄낄 웃어대던 그의 표정이 점점 서늘해졌다. 그러다 일어나 앉아 두 손을 마크의 목에 가져다 댔다.

움켜쥐고 손에 힘을 줘버리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황제였다. 이 나라의 왕조차 제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이까짓 백작 나부랭이 따위야…….

감히 나의 것을 탐했으니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거라.


“빌어먹을……!”

하지만 결국 마크의 목을 움켜쥐려던 손을 거두고 방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마크가 천천히 눈을 뜨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하아!”

 

***



“……!”

아델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나 보다. 감기 기운 때문에 몸이 나른하고 무거웠다.

그사이 슬픈 꿈이라도 꿨는지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마크는 별일 없는 건가?’

얼른 눈물을 훔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침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밖에서 들이치는 빛이 흐릿해서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그게 누군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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