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대가 하기에 달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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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그대가 하기에 달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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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그대가 하기에 달렸지
2023.03.31.
침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밖에서 들이치는 빛이 흐릿해서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델은 본능적으로 그게 누군지 알았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심장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 그 사람을.
하지만 이렇게 단둘이 있으려니 왠지 두려웠다.
이 어둠 속에서 그는 무슨 생각으로 잠든 자신을 보고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리움은 아닌 것 같았다. 그에게서 엷은 술 냄새와 함께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으니까.
마치 언제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지 모를 맹수의 앞에 놓인 것처럼 두려웠다.
“송구합니다, 폐하.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들었네요.”
아델은 최대한 담담하게 침대에서 나왔다. 그리고 크리스틴과 거리를 두며 조금 물러났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물론 아델은 보지 못했지만.
“손님은 응접실로 안내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부인은 피곤하면 아무 침실이나 들어가 잠드는 버릇이 있는 건가? 아니면…….”
그러다 크리스틴이 바싹 다가오며 속삭였다.
“아니면…… 내가 그리웠나?”
놀란 아델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적막한 어둠을 타고 그가 나직하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라고? 침대에 엎드려 흐느껴 울어놓고서. 아, 가끔씩 내 이름도 부르더군. 매우 달짝지근하게.”
아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설마 진짜로 꿈속에서 그를 그리워하며 울었던 걸까?
자신을 가차 없이 버린 이 남자를 아직도 못 잊어 우는 여자라니.
얼마나 바보스럽고 우스워 보일까?
“약주가 과하셨습니다, 폐하. 나중에 맑은 정신으로 대화하는 게 좋겠군요.”
이대로 소멸해버리고 싶은 기분에 아델은 얼른 돌아섰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다시 마주 보게 했다.
그의 손등이 자연스럽게 뺨을 쓰다듬다가 가녀린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입술이 가까워졌다.
“폐하…….”
너무나 그리웠던 그의 숨결.
그의 손길.
아델은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자신이 끔찍했다.
얼른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데,
“소문이 자자하더군. 마크 캐슬러와 꽤 사이좋은 부부라고.”
그 순간 아델은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노려보았다.
“설마 마크에게 무슨 짓이라도……?”
마크를 걱정하는 그녀를 보자 크리스틴의 심기가 사나워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감정과 행동이 자꾸 통제력을 잃고 제멋대로 굴었다.
“그대가 하기에 달렸지.”
그는 아델의 턱을 움켜쥐며 엄지로 천천히 입술을 문질렀다. 보드랍고 촉촉한 살결은 힘을 주면 금방 찢길 꽃잎처럼 여리고 고왔다.
저릿한 전율이 심장을 자극했다. 잇몸이 근질대며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꽃이 너무나 아름답고 탐스러워서 잡아 뜯어 버리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었다.
발자국 하나 없는 순백의 눈 위를 엉망으로 더럽히고 싶은 심술일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또…….
그 순간 아델의 이름을 새긴 그 자리가 다시 칼날로 베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이 고통이 그녀로 인한 것임을 알기에 크리스틴은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네가 뭔데 나를!
다른 놈에게 가버린 너 따위가 왜!
“폐하…….”
크리스틴의 사나워진 감정을 알아챘는지 아델이 뒤로 물러나자, 그는 팔을 뻗어 단단히 허리를 휘감았다. 자꾸 도망치려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감히 내게서 네가!
“제게 뭘 원하시는 거죠?”
순간 마주한 초록빛 눈동자. 원망을 담은 서늘한 눈빛이 그의 심장을 깊이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러자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피의 황제라 불리는 자신이 겨우 이 여자의 눈빛 하나에 두려움을 느끼다니.
그래서 더 못되게 굴었다. 마치 겁먹은 짐승처럼.
“글쎄, 내가 뭘 원할까?”
“하, 날 그렇게 비참하게 버려놓고서……?”
아델은 짙고 어둡게 물든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온 힘을 다해 참았다.
자신의 연인 크리스틴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것이다.
사랑스럽던 그 사람 대신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바하마르트 제국의 황제.
그녀는 물론 가족들의 생사를 손에 쥔 점령국의 황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델의 비난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비난받을 짓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힐난하듯 바라보는 눈동자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너야말로 남자가 없으면 안 됐던 거 아닌가? 나와 헤어지자마자 의사 놈의 아이를…….”
순간 아델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역시 내가 보낸 편지를 받지 못했구나!
하지만 자신을 믿었다면 아론이 본인의 아이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나에 대한 믿음이 겨우 그것뿐이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믿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선 그 방법뿐이었으니까.
멍청한 아델…….
그가 찾아와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니?
얘기를 듣고 나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고 위로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는 널 버리고 권력을 택한 남자야.
“그래, 당신은 결국 그런 사람이었어. 내 잘못이야. 황제가 될 위대한 분을 몰라보고 사랑 따위를 믿은…….”
가까스로 울음을 참았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텅 빈 듯 공허해졌다.
아직도 그를 비워야 할 마음이 남아 있었나 보다. 미련하게도.
“오늘은 보내줄 테니, 돌아가시오. 부인.”
크리스틴은 결국 아델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었다.
“하해와 같은 배려에 깊이 감읍하옵니다, 폐하.”
비아냥거리듯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인사한 후 아델은 싸늘하게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쾅!
“허억!”
동시에 크리스틴은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침대 위에 쓰러졌다. 어느새 그의 하얀 셔츠 왼쪽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으윽!”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억 속으로 희미한 잔상이 떠올랐다. 마치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 속처럼 흐릿하고도 불분명한 장면들. 그것은 낱장의 기억이기도 했고, 연속된 기억이기도 했다.
이 침대 위에서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남녀가 보였다.
오래된 헛간에서 춤을 추는 어린 소년소녀가 보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행복하게 프러포즈하는 연인들도 있었다.
잠든 여인을 보며 너무 행복해서 편지를 쓰는 남자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가슴 위에 칼로 새겨진 이름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 이름은 바로…….
ADELE!!!
***
“엄마!”
아델이 마블 궁의 정원으로 나오자 아론과 아이들이 달려왔다.
그녀의 심란한 사정 따위와 상관없이 세 아이는 즐거웠던 모양이다. 빨갛게 상기된 뺨과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다들 잘 놀았어?”
아론을 안아들며 아델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네, W.G 기사들이랑 대련했어요. 진짜 실전 같았어요!”
장래 희망이 화이트 스톰 기사단원인 제이드는 굉장히 만족한 얼굴이었다.
질세라 아론도 한마디 했다.
“아론도 같이했어요!”
“그래? 다들 좋았겠네. 그런데 캐이시는?”
폴린이 맏이답게 의젓하게 말했다.
“자작님께서 많이 취하셔서 미아 고모님네는 먼저 돌아가셨어요.”
“그랬구나. 그럼 내가 아버지를 모셔올게 얼른 돌아가자. 다들 졸리겠다.”
그러자 아델을 배웅하러 나온 시종장이 대답했다.
“백작님께선 마차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약주가 과하셔서 좀 쉬고 싶으시다고…….”
아델은 안도했다. 그래도 마크에게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군요. 그럼 어서 돌아가자.”
아델은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아이들과 함께 마차로 걸어갔다. 그 옆에 타냐가 따라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일…… 없으셨죠?”
“응? 무슨 별일?”
아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뇨, 전 또 괜히 걱정돼서…….”
“걱정? 뭐가?”
“그게…… 크라이튼 공작님께 물어봤는데 마님이 보내신 편지를 못 받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아론에 대해 얘기할까 하다가…….”
아델은 놀라서 타냐의 입을 틀어막았다.
“안 돼! 절대 아론에 대한 얘긴!”
알았다는 듯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은 손을 내렸다.
“미안. 당황해서.”
“예, 마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잘 알았어요.”
“그래, 이제 그분은 제국의 황제시잖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아델은 결심한 것이다. 크리스틴에게 아론의 출생에 대해 알리지 않기로.
그는 아델이 기다리던 연인이 아니었다. 그저 권력과 힘을 가진 황제.
아론이 자신의 아이라는 걸 알면 빼앗아 갈 것 같아서 두려웠다.
***
마차 안에는 마크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시더니 잠이 든 건가?
아델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며 마부에게 출발을 지시했다.
사실은 그가 이대로 계속 잠들어 있기를 바랐다. 지금은 왠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으니까.
크리스틴과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온 것도 아닌데 미안했다.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며 싸웠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올 땐 가슴이 뛰었으니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으니까.
그가 밉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웠던 만큼 미웠던 건지도…….
멍청한 아델. 그런 사람 따위 이제 지워버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마크의 목소리에 아델은 깜짝 놀랐다.
“마크, 깼어요?”
“집에 다 왔어요.”
어느새 창밖으로 그들의 저택이 보였다. 아론은 아델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마크는 아무 말 없이 그런 아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째선지 그가 크리스틴과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론, 내리자.”
마크의 시선에서 도망치듯 아델은 잠든 아론을 안아 들었다. 이미 다른 아이들은 모두 마차에서 내린 후였다.
“줘요. 내가 안고 내릴 테니.”
마크가 아론을 받아안으려고 했다.
“제가 그냥…….”
아델은 고집스럽게 아론을 품 안에 보듬었다.
“왜요, 취해서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아뇨, 아이를 안을 땐 아빠보다 엄마가 더 힘이 세지거든요.”
농담처럼 겨우 웃어 보였다.
“괴변이네요.”
“엄마가 돼 보면 절로 알게 될걸요.”
“평생 알 수 없겠군요.”
아델이 아이를 안고 마차에서 내리자, 재빨리 달려온 하인들이 받아 안으려고 했다. 아델은 그들에게도 괜찮다고 했다.
이 아이가 자신의 품에 있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엄마…….”
선잠에서 깬 듯 아론이 눈을 비비며 아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델은 그런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으응, 아론. 엄마 여깄어.”
아이에게서 나는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 냄새를 맡으면 모든 시름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폐하 아저씨는?”
등을 토닥이던 손이 멈칫했다.
“폐하는 성에 계시지. 여긴 우리 집이고. 그러니까 계속 코 자…….”
“으응…….”
다시 눈을 감는 아이는 아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사실은 이렇게 불안한 이유가 뭔지 알고 있었다. 아론이 자꾸만 크리스틴을 신경 쓰기 때문이었다.
마치 어쩔 수 없는 끈에 묶인 것처럼.
만일 그가 누군지 알면 아론이 먼저 그를 따라가겠다고 할 것만 같았다.
“마크.”
아델의 목소리에 그가 얼른 돌아보았다.
“오늘은 아무래도 아론과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당신에게 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러도록 해요. 오늘 밤은 나도 신사적일 자신이 없군요.”
“……!”
놀란 아델이 쳐다보았지만, 그는 어느새 몸을 돌려 별관으로 가버렸다.
‘빌어먹을!’
등 뒤에 아델의 시선을 느끼며 마크는 인상을 썼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도 자꾸 욕심이 났다.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이니 그때가 오면 쿨하게 놓아주겠다고 다짐했었다. 잠시라도 행복한 가족으로 지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수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점점 욕심이 났나 보다. 아델도 아론도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나 보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빼앗기기 싫었다.
크리스틴 바이스.
왜 이제 나타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