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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널 기억 못 하는 나는 머저리 같아 (122/155)


122화. 널 기억 못 하는 나는 머저리 같아
2023.04.03.


사흘 후 아침.

흰옷의 W.G 기사들을 거느린 짐머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크리스틴을 기다리던 귀족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벌써 사흘째였다. 그는 사흘째 마블 궁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블 궁 주변은 W.G 기사들이 에워싸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마블 궁의 시종과 하인들도 최소한만 남기고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다. 그가 중병에 걸렸다거나, 늑대가 되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거나, 아니면 이미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폐하께선 오늘도 불참입니까?”

이자벨의 물음에 짐머는 의자에 앉으며 평온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선 칼라임의 전반적인 국정을 파악하시는 중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당분간 회의는 제가 주관할 것입니다. 다들 착석해주십시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술렁였다. 다들 짐머가 크리스틴의 부관일 때부터 보아 온 것이다.

그런데 공작으로 봉해진 것으로도 모자라 황제의 직무까지 대행한다는 건가?

콧대 높은 칼라임의 귀족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 편찮으시다는 얘기가 있던데…….”

이자벨의 말에 짐머는 여유 있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폐하께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다들 늑대 일족이 얼마나 강인한지 알 텐데요. 그럼 지금부터 본 회의를 시작하지요.”

“아니, 우리는 폐하를 기다리겠소.”

“그러는 게 좋겠소. 우리는 바하마르트 제국의 황제를 주군으로 섬길 뿐이오.”

귀족들은 고집스럽게 짐머를 배척했다.

짐머는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경들의 뜻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자신이 데리고 들어 온 기사단을 향해 사인을 보냈다. W.G 기사단은 일사불란하게 귀족들의 뒤를 막아섰다.


“무슨 짓이오, 크라이튼 공작!”

짐머는 서늘한 표정으로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는 폐하의 명을 받아 그분을 대행하고 있다고. 나를 따르지 않는 것은 곧 폐하를 거역하는 것. 지금부터 폐하를 거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벨 것입니다!”

스릉! 스릉!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자, 회의실은 금방 긴장감이 감돌았다.

회의실의 상석에 앉아 있는 것은 귀족들이 알던 크리스틴의 부관이 아니었다. 온화한 표정을 가면처럼 벗어버린 그는 또 다른 크리스틴!

짐머의 서늘하고 매서운 표정 앞에서 그들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공작님!”

그 무렵 기사 한 명이 빠르게 회의실로 들어와 짐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제야 짐머가 매서운 표정을 지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요. 회의는 내일 다시 열기로 하지요.”

 

 

***



“와우, 그동안 몰라보게 터프해졌군.”

회의실을 나오던 짐머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반가운 얼굴이 복도의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제니퍼!”

“거기서 나오는데 순간 단장님인 줄 알았네.”

그 말에 짐머가 웃으며 속삭였다.


“그동안 따라다니며 본 걸 흉내 내는 중이네.”

그러더니 두 사람은 서로 악수하며 어깨를 부딪쳤다.


“축하하네. 크라이튼 공작.”

“고맙네. 자넨 별일 없었고?”

“별일 많았지.”

그러더니 제니퍼는 눈짓으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이제 보니 그의 한쪽 다리에는 나무로 된 의족이 달려 있었다.

오래전 사제들 때문에 다친 다리가 재발해서 결국 절단하게 된 것이다.

건강하던 그를 기억하던 짐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쩌다가…….”

하지만 제니퍼는 여전히 유쾌하게 껄껄 웃었다.


“그런 슬픈 표정은 실례네. 이건 별일 축에도 못 드니까.”

“그럼 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엊그제 아내가 출산했거든. 캐슬러 백작의 조수로 있던 쥬디 알지? 그녀가 지금 내 아내라네. 아내가 고향 집에서 출산하느라 폐하께 인사도 못 왔네.”

짐머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이런! 아빠가 된 걸 축하하네! 첫 출산이라 각별히 신경이 쓰였겠군.”

“첫 출산이라니! 이번이 넷째네. 우리 부부가 워낙 어른들의 세계를 좋아해서 말이지.”

뜻밖의 말에 짐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자네 그동안 너무 잘 지낸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다리를 제외하고 제니퍼의 모습은 훨씬 더 유쾌하고 좋아 보였다.

제니퍼는 다시 껄껄 웃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미안할 정도로. 그나저나 날 급히 찾은 이유가 뭔가?”

사실 제니퍼는 짐머가 수소문해서 불러온 것이었다.


“자네라면 내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궁금증이라니?”

그러면서도 제니퍼는 그가 뭘 물을지 눈치챈 얼굴이었다.


“아델 그릴스의 아이 말일세. 자네는 그 아이에 대해 잘 알겠지?”

순간 유쾌하게 껄껄거리던 제니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왜 궁금한 건가?”

“단장님의 아이 맞나?”

“아니. 절대 아닐세!”

제니퍼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그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짐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의 아이가 맞는군.”

“빌어먹을! 이제 와서 왜!”

이 정도 반응이면 확실했다.

***

제니퍼와 헤어진 짐머는 곧장 마블 궁으로 향했다.

W.G 기사단이 포위한 마블 궁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운영 중이었다.

지금 크리스틴의 상태가 외부에 알려지면 매우 곤란했으니까. 그러면 당장 칼라임의 왕이 군대를 이끌고 이곳을 습격할 것이다.

침대에 누운 크리스틴은 사흘째 깨어나지 못하는 중이었다. 간혹 정신이 들었다가도 고통스러워하며 혼절해버리고는 했다.

전쟁터를 누비며 피의 황제라 불리던 그는 지금 시체와 다름없었다.

핏기없이 창백하고, 죽은 사람처럼 온몸이 차가웠다. 이불을 몇 개나 덮어 놓았는데도 몸을 떨며 좀처럼 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방법이 없는 겁니까? 레아나 양의 마법이라면…….”

답답한 나머지 짐머는 레아나를 채근했다.


“폐하께서 마법을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제 마법은 아델의 기억을 지우고 그분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뿐이니까. 봉인 의식이 끝난 직후와 같은 상태가 되는 거죠.”

위대한 대마법사인 레아나는 사흘째 그의 옆에서 간호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것도 그녀였다.


“저러다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그러면 전 또 결정해야겠죠. 폐하의 명을 거역하고 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죽지 않는…… 다…… 염려 마…….”

그 순간 크리스틴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반색하며 다가들었다.


“폐하!”

“폐하!”

그는 창백하고 파리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은 견딜 만…… 해. 그러니 마법은…… 나중으로…….”

“이러다 돌아가실 수도 있어요!”

레아나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레아나를 화나게 했다.

대체 그는 왜 이토록 아델을……!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이미 다른 남자와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는 여자를 기억해서 뭐 하시려고요. 상처만 받으실 거잖아요! 아픈 거 싫다면서요!”

크리스틴은 힘겹게 웃어 보였다.


“그러게. 그런데…… 그 여자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가 된 기분…… 끔찍하다……. 빚진 기분도 싫고…….”

그러자 짐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의 얘기라면 나중……. 아직 좀 힘들…… 크으윽!”

그는 다시 고통이 밀려오는지 심장을 움켜쥐며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레아나 어떻게 좀……!”

놀란 짐머가 그를 끌어안으며 소리치자, 크리스틴은 손을 내저었다.


“아…… 직…… 괜찮…….”

그의 손이 툭 떨어지며 그대로 다시 의식을 잃었다.


“ঊনਫ਼պੴ৫ !!”

레아나가 다급하게 주문을 외우자 허공에 은은한 붉은 빛을 띤 고대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의 명령을 거역하고 마법을 쓸 생각인 것이다.

그러자 짐머가 크리스틴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요!”

레아나가 소리쳤지만,

스릉!

그는 오히려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감히 날 상대로 싸우겠다고요?”

물론 레아나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는 진지하다 못해 엄숙했다.


“폐하의 명을 거역하는 자는 살려두지 않는다! 이 원칙에 예외는 없습니다.”

“폐하가 돌아가셔도요?”

“이겨내실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결국 레아나가 손을 흔들자 붉은 고대어도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레아나 양.”

“둘 다 멍청이들이에요!”

레아나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쾅!

짐머는 고통으로 혼절한 크리스틴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왜 이 지독한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그녀를 기억하려는 걸까? 지금은 남의 아내일 뿐인 그 여자를.

그의 마음이 여전히 아델에게 묶여 있기 때문일까?

지금이라도 그녀를 기억하는 게 좋은 걸까?

둘 사이에 아이가 있으니…….

크리스틴의 아이.

아델은 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을까?

아니, 중간에서 어떤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설마…… 마님께서 보낸 편지를 못 받으신 건가요?”


“편지요?”


“맙소사!”

 
누군가 아델이 보낸 편지를 가로챈 걸까? 감히 누가?

***



“그게 정말인가요? 황제가 다 죽어간다는 얘기.”

난데없이 들려온 말에 아델은 흠칫 놀라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델은 지금 대여섯 명의 귀부인들과 함께 이자벨의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얼마 후 열리는 성당 바자회에 대해 논의할 게 있어서였다. 벌써 6년째 후원하는 행사였다.

그런데 오늘은 다들 회의보다 다른 얘기에 관심이 많았다. 대부분은 황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릴스 여백작님은 뭔가 알고 계시죠?”

자기들끼리 떠들던 사람들이 호기심을 어린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뇨, 폐하에 관한 일을 감히 제가 어찌 알겠어요.”

아델은 딱 잘라 말했다.


“그래도 예전에 꽤 특별한 사이였잖아요.”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들이 들으라는 듯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이 무슨 소용이래요. 지금은 대마법사라는 여자가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데.”

“황제의 조카라는데요.”

“조카는 무슨. 며칠째 둘이 마블 궁의 침실에서 나오질 않는다던데. 황제는 아픈 게 아니라니까요.”

“어머, 누가 짐승들 아니랄까 봐.”

귀부인들은 야유하며 까르르 웃었다.

결국 아델은 참지 못하고 매섭게 말했다.


“다들 바자회에 관해선 관심들이 없으신가 보네요.”

그러자 이자벨이 나서서 분위기를 정리했다.


“자, 자! 쓸데없는 얘기들은 그만. 황제 폐하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건 예의가 아니랍니다. 다시 바자회 안건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죠.”

하지만 아델은 더이상 이 자리에 있기가 힘들었다. 귀부인들은 크리스틴에 대해 떠들면서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다는 눈으로.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웠어요, 그릴스 여백작.”

“천만에요. 그럼.”

모자를 눌러 쓴 아델은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자 남아 있던 귀부인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황제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았겠죠?”

“왜 아니겠어요. 캐슬러 백작 부인이 아니라 그릴스 여백작의 호칭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텐데.”

“캐슬러 백작과는 아직 혼인서약도 안 했다면서요.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겨서 그냥 살게 된 거라고 하던걸요.”

“하여간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난잡한 여자네요.”

“예전부터 소문이 안 좋았었잖아요.”

사람들의 수다를 들으며 이자벨은 창가로 갔다.

본궁을 나간 아델이 정원을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날씬하고 우아한 뒤태가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궁 안의 경비병들도 힐끔거리며 바라볼 정도였다.

그러니 황제라고 다를까? 한때 죽고 못 살던 여자였는데.

게다가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이자벨은 조용히 웃었다.


‘아델 그릴스. 황제를 쓰러뜨릴 훌륭한 열쇠가 돼 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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