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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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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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2023.04.07.
본궁을 나온 아델은 저도 모르게 마블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바람조차 훈훈하게 느껴지는 봄이었다. 마블 궁의 호숫가 나무들도 모두 초록 어린잎을 매달고 있었다.
“곧 벚꽃도 피겠구나.”
아델이 씁쓸하게 중얼거릴 때였다.
“멈추십시오!”
서너 명의 기사들이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 놀란 아델은 움찔하며 물러났다.
흰 옷차림을 보니 화이트 스톰 기사단이었다. 제니퍼가 이끌던 제1 기사단이었다면 아델을 알아봤겠지만 이들 중에는 없는 모양이다.
“이곳은 출입이 통제되었으니 돌아가십시오.”
아델은 호숫가 너머에 있는 마블 궁을 응시했다. 확실히 저번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주변에 경계를 서는 인원이 훨씬 늘었고, 일하는 시종들이나 하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폐하께 혹시 무슨 일…….”
걱정돼서 묻던 아델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긴 이제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 저들이 대답해 줄 리 없었다.
“아닙니다. 그럼.”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길을 열어드려라.”
위엄있는 목소리에 기사들이 얼른 양옆으로 물러나자, 짐머의 모습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부인.”
그는 아델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태도를 지켜본 기사들도 얼른 예를 갖춰 인사했다.
“궁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폐하께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려서요. 뭐, 그냥 소문일 뿐이겠지만.”
그 말을 하던 아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으리라.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아뇨,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제가 어리석었네요.”
아델이 얼른 돌아서려는데 짐머가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께는 지금 부인이 필요합니다.”
아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필요하다는 그 한마디에 마음이 동요했던 것이다.
그러다 며칠 전 침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한심해졌다.
“폐하에겐 더 훌륭한 분들이 곁에 있을 텐데요.”
“하지만 그분이 혼수상태 속에서 부르는 이름은 딱 하나뿐이죠. 아델.”
“……!”
***
아델이 마블 궁의 침실로 들어가자 넓고 호화로운 침대 한가운데 크리스틴이 누워 있었다. 창백하게 야윈 얼굴에 핏기없이 갈라진 입술이 죽어가는 사람 같았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두려울 만큼 강인해 보이던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그 곁을 레아나가 지키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크리스틴과 그녀를 두고 수군거릴 만도 했다. 그녀는 아델의 기억 속 앳된 소녀가 아니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길게 풀어 내린 모습은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같은 여자라도 보고 있으면 넋을 놓을 만큼…….
“오랜만에 보네요, 아델.”
“오랜만이야, 레아나. 그동안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덕분에요.”
둘 사이로 짐머가 다가왔다.
“잠시 나가 있어 주시겠습니까, 레아나 양.”
레아나는 그 주문이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모았다. 그러다 크리스틴을 흘끗 쳐다보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있을 테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세요.”
이 짧은 만남으로 아델은 느꼈다.
레아나에게 그는 주군 이상이라는 것을. 6년 만에 만난 그녀의 눈빛은 아델에 대한 경계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델은 크리스틴의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녀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미련한 아델.
그에 대한 마음 따위 다 지워버리자고 해놓고선.
“그런데 어떻게 된 거죠?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레아나가 나가자 아델은 얼른 잡념을 떨치며 물었다.
짐머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폐하께선 이미 한 번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니요?”
아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늑대 일족의 봉인을 열기 위해선 폐하의 목숨을 바쳐야 했으니까요. 그걸 레아나 양이 마법으로 살렸고요.”
“말도 안 돼…….”
아델은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크리스틴이 죽었다니.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건 너무 끔찍해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마 지금 아프신 게 그 일과 연관 있다는 건가요?”
아델은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예.”
“내게 오지 못했던 것도 설마……?”
“맞습니다. 살아나는 대가로 부인을 지워버려야 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폐하를 살리는 대신 그분에게 목숨만큼 소중한 것과 맞바꿔야 했죠. 마법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고 하더군요. 아마 지금껏 부인의 얼굴도 기억 못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때……?”
며칠 전 크리스틴과 처음 재회하던 날이 떠올랐다. 6년 만에 만났는데도 조금의 감정조차 느낄 수 없었던 눈빛. 그게 그녀에겐 큰 상처였었는데…….
“하지만 부인을 만나고 지워버린 기억이 되살아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힘들어하시는 거고요. 사흘 동안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셨죠.”
아델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죽어가는 크리스틴이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자신을 까맣게 지워버린 그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워서.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마음 놓고 미워하기라도 했으련만.
“그래서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짐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깨어나지 못하시면 부인을 다시 지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멀리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알려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폐하가 어떻게 되든 나완 상관없는 일이에요.”
아델은 화가 났다. 이제는 그에게 다가갈 수도, 미워할 수도 없었으니까.
이렇게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나선 기껏 듣는 말이 그를 살리기 위해선 멀어져야 한다니…….
그런 아델에게 짐머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인. 부인께서 보내신 편지는 아마 중간에서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아론을 지키기 위해 마크 캐슬러의 아이라는 소문을 만들어내셨던 거겠죠. 그것도 모르고 폐하를 배신했다고 잠시 오해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심려가 크셨을지 이해합니다.”
이 말을 크리스틴이 해줬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제 그에겐 잊힌 인연일 뿐인 것이다.
아델은 간신히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 아이를 지킨 것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짐머 경에게 이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네요. 그럼 이만.”
아델이 문을 향해 돌아설 때였다.
“아델…….”
메마른 입술 사이로 들려온 애절한 목소리.
그것만으로 아델은 단단하게 붙잡은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분이 혼수상태 속에서 부르는 이름은 딱 하나뿐이죠. 아델.”
그렇게 부르지 마…….
아델은 이를 앙다문 채 거칠게 문을 밀고 나가버렸다.
나쁜 놈! 개자식!
이제 와서 나보고 어쩌라고.
다 잊었다면서!
나를 지운 대가로 일족도 구하고, 황제도 됐잖아!
세상을 전부 가졌잖아!
그래놓고 이제 와서 뻔뻔하게 뭐 어쩌라고!
***
겨우 울음을 참고 침실을 나오던 아델은 벽에 기대 서 있는 레아나와 마주쳤다.
“다 들었겠지?”
그녀는 늑대 일족이라서 귀가 밝을 테니까.
레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너였니? 내 편지를 가로챈 게…….”
이제는 소용없는 질문. 그래도 궁금했다.
레아나는 크리스틴과 닮은 눈으로 아델을 말갛게 바라보았다.
“네.”
담담한 표정으로 시인하는 그녀에게 죄책감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아델을 시기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델도 침착할 수가 있었다.
“왜……?”
“그는 당신을 잊었고, 전쟁은 멈출 수 없었으니까요. 그 편지를 받았다면 괴롭기만 했을 뿐 결국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그는 수많은 목숨을 책임지고 있었으니까.”
레아나를 매섭게 쏘아보던 아델은 비틀린 웃음을 토해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해도 너 자신은 속일 수 없어. 넌 그를 빼앗길까 봐 겁이 났던 거야.”
그 순간 고요하던 레아나의 표정에 파문이 일었다.
“미안해요, 아델. 하지만 당신은 이제 행복한 가정이 있잖아요. 내겐 그분뿐이에요.”
“어리석은 레아나. 그는 아니야.”
아델은 레아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돌아섰다.
***
목이 탔다.
심장의 고통이 여전히 끔찍했다. 마치 가시 돋친 장미 넝쿨이 친친 휘감고 옥죄는 기분이었다.
“아델…….”
그 와중에도 크리스틴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여자 하나만은.
아델.
내가 버린 내 연인.
끝없이 깊은 초록 눈동자.
“폐하, 정신이 드세요?”
레아나가 얼른 다가왔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눈앞이 흐릿해서 그녀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코끝에 맴도는 그리운 향기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향기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 가르덴 호숫가의 벚꽃이 필 때 결혼하자고 했었지.
아니 장미가 필 때였던가?
“아델…….”
“잠시만 계세요. 마실 물이라도…….”
크리스틴은 작은 손을 찾아 꼭 움켜쥐었다.
그녀에 대한 흐릿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를 놓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놓치면 이대로 텅 비어 버릴 것만 같아서.
“가지 마, 아델.”
“폐하…… 전…….”
“아델. 날 평생 미워해도 좋아. 그렇게라도 날 지워버리지마…… 제발.”
그는 애원했다. 그녀 앞에선 부끄러울 것도, 자존심을 세울 것도 없었다.
그녀는 또 다른 자신이었으니까.
“그럴게요……. 어떻게 지워버리겠어요. 내겐 당신뿐인데…….”
레아나는 두 손으로 크리스틴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날렵한 생김새와 다르게 전쟁터에서 살아온 남자의 손은 거칠고 단단했다.
레아나는 이 손이 너무 좋았다. 아니, 그의 모든 게 너무 좋았다.
처음엔 아빠와 닮아서였다.
아빠처럼 용맹하고, 어른스럽고, 믿음직스러워서.
하지만 성인이 될수록 그를 향한 마음이 점점 변해갔다.
그가 자신의 머리와 뺨을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크리스틴…….”
기억 속에서 헤매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오만하고 무자비하던 남자.
모두의 숭배를 받고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는 군주.
그 남자가 지금 이렇게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자신의 소유인 것만 같았다.
이 완벽한 남자를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레아나는 그의 입술을 향해 제 입술을 조심스럽게 내려보았다.
하지만 곧 하아, 안타까운 한숨과 함께 물러났다.
“어리석은 레아나. 그는 아니야.”
이미 알고 있었다. 혼수상태 속에서 그가 부르는 이름은 아델뿐이었으니까.
6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곁을 지킨 건 자신이었는데.
그녀가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어도 그에겐 평생 어린 레아나일 뿐이다.
그 순간 크리스틴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레아나가 포기한 걸 칭찬이라도 하듯이.
설마?
놀란 레아나가 당황해서 쳐다보는데, 그는 초점이 흐릿한 눈과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다, 꼬맹이.”
그래, 그에게 자신은 영원한 꼬맹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