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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영원한 꼬맹이일 뿐 (124/155)


124화. 영원한 꼬맹이일 뿐
2023.04.10.



 


“잘했다, 꼬맹이.”

그래, 그에게 자신은 영원한 꼬맹이일 뿐이었다.


“정신이 드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폐하.”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은 레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당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껴서…….”

레아나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해십니다. 숨을 안 쉬시는 거 같아서 그랬던 것뿐입니다.”

젠장!

그 말을 하는데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알고 있다. 숨을 안 쉬면 인공호흡을 당할 것 같아서 말이지.”

레아나는 두 뺨을 빨갛게 물들인 채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능구렁이 같으니! 그냥 좀 모른 척 넘어가 주면 안 되나?’

그래도 농담을 할 정도면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들려온 노크 소리에 레아나는 겨우 살았다 싶었다.


“폐하!”

문을 열고 들어온 짐머는 크리스틴이 깨어난 것을 보자 울먹이며 달려왔다.


“그럼 전 이만…….”

이때다 싶어서 레아나가 방을 나가려는데 짐머가 눈치 없이 물었다.


“레아나 양, 혹시 아픈 거 아닙니까?”

“아뇨. 전 아무렇지 않답니다.”

“얼굴이 너무 빨갛습니다. 열이라도 나는 게…….”

아악, 눈치 없는 아저씨!


“내게 인공호흡을 하려던 중이었거든.”

크리스틴까지 한술 더 떠서 그녀를 놀렸다.


“예, 그게 무슨?”

“폐하께서 숨쉬기 곤란해하셔서 그랬다니까요!”

“그랬다더군.”

“아아, 그랬군요.”

레아나는 수치사로 죽기 직전이었는데 두 사람은 재미있다는 듯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럼 전 이만. 혼수상태에 빠진 누구 곁에 사흘 밤낮 붙어 있었더니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서요.”

또박또박 할 말을 다 하는 그녀였지만 사실 크리스틴과 제대로 눈도 마주칠 수 없었다.

도망치듯 침실을 나가려는데,


“레아나.”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하고 그윽한지 레아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예, 폐하.”

“넌 언제까지나 사랑스러운 내 조카다. 잊지 마라.”

그 말에 레아나는 울컥해졌다.

그건 용서인 동시에 완전한 거부였으니까.


“저도 사랑합니다, 폐하.”

크리스틴에게 인사를 한 후 침실을 나갔다.

***



“좀 일으켜주게.”

레아나가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크리스틴이 손을 내밀었다.


“움직이셔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아직 움직일만한 상태는 아니야. 하지만 조금만 더 누워 있으면 썩어버릴 것 같아서.”

“농담하시는 걸 보니 괜찮으신 겁니다.”

짐머가 크리스틴의 등 뒤를 받치며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혔다.


“……으윽!”

하지만 그는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 신음을 지르며 온몸이 땀에 젖었다. 번들거리는 그의 상체 왼쪽 가슴에는 아델의 이름이 선명했다. 마치 지금 막 새겨 넣은 것처럼 피가 맺혀 있기까지 했다.


“옷을 좀 갖다 주게.”

그게 신경 쓰였는지 크리스틴이 말했다.

짐머는 침대 옆 콘솔에 놓여있는 리넨 셔츠를 입혀주었다.


“그래, 그동안 보고할 일이 많았겠지?”

“예, 귀족 원로회의를 내일 아침으로 미뤘습니다. 폐하께서 편찮으시다는 소문이 퍼져서 아무래도 얼굴이라도 한번 드러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음. 그런데…… 혹시, 그녀…… 아델이 다녀갔나?”

“예?”

크리스틴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아주 그리운.


“다녀갔습니다. 폐하께서 계속 그분의 이름을 부르셔서 제가.”

크리스틴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젠장…… 다 얘기한 건가?”

“얘기했습니다. 봉인 의식 때문에 아델 양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분이 더 이상 상처받는 건 폐하도 원치 않으실 테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선 동의하는지 크리스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아이에 관해 할 얘기가…….”

“아론 말인가?”

짐머는 잠시 망설였다.

만일 크리스틴의 상태가 더 나빠진다면 마법으로 아델을 완전히 지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론이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는 끝까지 마법을 쓰지 못하게 고집 피울지 몰랐다.

칼라임이 항복했다고는 해도 아직 적진의 한복판에 있는 상황.


‘그래 일단 폐하의 몸이 회복된 후에…….’

“참, 낮에 제니퍼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벌써 네 아이의 아빠가 됐더라고요. 어찌나 배가 아프던지.”

짐머는 말을 돌렸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아파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예리했다.


“아론에 대해 할 말이 있던 거 아니었나?”

“예, 아론. 단장님께서도 이제 아론 같은 후계자를 낳으셨으면 해서요. 아론을 예뻐하시는 걸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 아델을 데려와야겠지.”

“예?”

“잊었나? 늑대 일족은 한 여자만 안을 수 있는 거. 아델이 아닌 어떤 여자도 내 아이를 낳을 수는 없어.”

“하지만 마법으로 그녀를 지우셨으니 다른 여자를 안는 것도 가능하신 거 아닙니까?”

크리스틴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아델과 둘이 함께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마치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진 수천 장의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짧은 장면들이 떠오르는 동안에도 그는 고통을 잊을 만큼 행복했었다.

나는 대체 아델이란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었던 건가…….

너도 나를 그렇게 사랑했었나, 아델?

***

다음 날 아침.

크리스틴이 짐머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서자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래, 그대들이 그토록 나를 보고 싶어 했다지?”

그의 서늘한 목소리에 귀족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와중에 이자벨이 나섰다.


“워낙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염려되었습니다. 강건하신 모습을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폐하.”

“그대들의 마음이 놓인다니 나 또한 마음이 놓이는군. 그럼 오늘 회의 안건은 크라이튼 공작과 논의하게. 난 바이마하르의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파서.”

크리스틴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고는 금방 회의실을 나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아나가 얼른 달려와 속삭였다.


“괜찮으세요, 폐하?”

“젠장! 걸을 때마다…… 몸이 부서지는 것 같군.”

“그럼 어서 침실로!”

“아니, 그래도 콧바람을 쐬니 한결 낫다.”

그는 복도의 창밖을 응시했다. 나뭇잎들이 조금씩 푸른 빛을 올리며, 벚나무에선 분홍 꽃망울이 올라와 있었다.


“곧 벚꽃이 피겠구나.”

레아나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썼다.


“저 지금 너무 무서웠어요. 꽃을 보며 감상에 젖는 폐하시라니…….”

크리스틴은 레아나의 이마를 통 튕겼다.


“나도 알고 보면 섬세한 남자다.”

“아야!”

레아나는 과장되게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어서.


“괜찮으시면 마차라도 타고 산책하시겠어요?”

“그것도 좋겠군.”

 

***

오페라 극장의 분장실 안은 꽃 향기로 가득했다. 수많은 팬들이 다이애나에게 보내온 꽃다발 때문이었다.


“캐슬러 백작님께서 눈길 한번 안 주신 이유가 다 있었군요. 이렇게 미인 아내를 곁에 두셨으니.”

“아닙니다. 다이애나 양이야말로 ‘만인의 연인’이라는 찬사와 어울리는 분이시네요.”

아델의 말에 다이애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최정상에 있는 프리마돈나였다. 진한 화장 때문에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나 몸짓이 무척 요염하고 매력적이었다. 오늘도 그녀의 공연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로 극장 앞이 북적거렸다.

그런 다이애나는 마크의 단골 환자였다. 덕분에 이번에 올리는 공연에 마크 부부를 초대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조금전 위급 환자가 있다는 전갈을 받고 돌아갔지만.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두 분의 자리는 제일 좋은 로열석으로 빼놨답니다. 아니지, 두 번째로 좋은 로열석이네요. 제일 좋은 자리는 항상 비워두거든요.”

그 말에 아델은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크리스틴과 함께 이 극장으로 오페라를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내가 후원했거든. 공연 내내 로열석 한 곳을 언제든 비워두는 조건으로.”


“설마 나랑 데이트하려고 후원했다는 건…… 아니지?”


“그 이유가 아니면 뭐겠어?”

 


“예전에 그 조건으로 후원을 받았거든요.”

아델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얼른 틀어막았다.


“그 후원자분께서는 오신 적이 있나요?”

“아뇨, 한 번도.”

아델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공연 잘 보겠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난 후 로열석으로 향했다. 예전에 크리스틴과 앉았던 옆자리였다. 물론 객석이 빈틈없이 들어찼는데도 그 자리는 계속 비어 있었다.

암전되고 공연의 막이 오를 때까지.

***

공연이 거의 다 끝날 때까지 마크는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환자의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아델은 사람들이 배꼽 잡고 웃는 장면에서도 웃을 수 없었으니까. 두 시간 동안 펼쳐지는 공연이 그저 눈앞에서 스쳐 지나갈 뿐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슬픈 장면인지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부르는 이별의 아리아가 넓은 극장에 울려 퍼졌다.

붉은 태양이 머리 위에 빛나던 그 날

당신은 약속했죠

장미가 피는 계절에 돌아오겠노라



“……!”

아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노래는 그와 마지막 헤어지던 날 짐머가 부른 것이었다.

칼라임 지방에 떠도는 민요라고 했던가?

그때만 해도 몰랐었다. 이 노래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그대여, 지금 어디쯤 오고 있나요?

우리의 장미는 희미하게 빛바래져 가는데

그대의 명성은 여전히 먼 곳에서 빛나네요

그는 이제 일족의 구원자가 되고, 세계를 지배하고, 수많은 사람의 주군이 되어 추앙받았다.

그러는 동안 장미가 피는 계절은 벌써 여섯 번이 지났고, 그들의 아이는 푸른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먼 곳에서 돌아온 그는 다 잊어버린 것이다.

가장 빛나고 아름답던 그들의 시간을.

전부다…….

먼 훗날 많은 사람이 당신을 기억하겠죠

당신의 무덤에 꽃을 바칠 거예요

그러니 나는 그만 잊을게요

당신과 했던 그 약속을 5월의 붉은 장미를

그 푸르고 빛나던 시간을…….

아델의 뺨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놀라서 얼른 손등으로 닦아냈다. 하지만 자꾸 떨어져 내리더니 기어이 흐느낌이 되어 터져 나왔다.


 


“흑! 으흐흑!”

사람들에게 들릴까 봐 아델은 입을 꽉 틀어막고 흐느꼈다. 여기저기 훌쩍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줄곧 비어 있던 옆자리의 로열석에 누군가 있는 걸 깨달았다.

극장 안은 어두웠지만 아델은 보지 않아도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빌어먹게도 그의 머리카락 한 올만 봐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아니, 그가 있는 곳은 이상할 정도로 공기부터 달랐다.

그런데 당신은 날 잊었겠지?

이 극장의 의미도, 저 노래에 대한 추억도 다 나 혼자만의 것…….

원망스럽게 노려보던 아델은 재빨리 로열석을 뛰쳐나갔다.

멈칫.

어느새 그가 로열석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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