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숨은 쉬어야지, 아델 (125/155)


125화. 숨은 쉬어야지, 아델
2023.04.14.


아델은 줄곧 비어 있던 옆자리의 로열석에 누군가 있는 걸 깨달았다.

극장 안은 어두웠지만 아델은 보지 않아도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빌어먹게도 그의 머리카락 한 올만 봐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아니, 그가 있는 곳은 이상할 정도로 공기부터 달랐다.

그런데 당신은 날 잊었겠지?

이 극장의 의미도, 저 노래에 대한 추억도 다 나 혼자만의 것…….

원망스럽게 노려보던 아델은 재빨리 로열석을 뛰쳐나갔다.

멈칫.

어느새 그가 로열석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그저 눈앞에 존재할 뿐인데도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여전했다.

이제 아픈 건 다 나은 건가? 다행이네.


“비켜…… 주십시오, 폐하.”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델은 침착하게 요청했다.

자신 때문에 그가 아프게 되는 게 싫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그가 밉기도 했다.


“왜 울고 있지?”

하지만 눈이 밝은 그에게 운 얼굴을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다들 우니까요.”

아델은 감정을 들킬까 봐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아델의 턱을 잡아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어두웠음에도 그의 시선이 얼마나 집요하고 뜨거운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놔 주십시오.”

“날 생각하며 울었나?”

 

 


“곧 남편이 올……!”

“그만!”

뜨거운 숨결이 훅 끼쳐 들며 익숙한 감촉이 그녀를 사납게 덮쳐왔다.


“흡! 폐……!”

그는 아델의 두 팔을 움켜쥐어 벽으로 밀치며 메마른 입술을 비벼왔다.

아델은 돌처럼 단단한 가슴과 벽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헐떡이는 숨결에, 갈급하게 찾아드는 입술에, 숨이 막히고 정신이 멍해졌다.

그는 이대로 폭풍처럼 덮쳐와 사납게 집어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국 갈가리 찢긴 채 버려질지도…….

하지만 그가 팔목을 쥔 손에 힘을 풀자 더는 밀어낼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이 풀려서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걸 알아챈 것처럼 그의 팔이 허리를 단단히 휘감고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두 몸이 밀착되고 서로의 애타는 체온이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아찔한 전율.

아델의 머릿속은 어느새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자존심도, 원망도, 두려움도 다 사라져버렸다. 허기진 사람처럼 그를 원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안타까워서 애달픈 한숨이 흘러나왔다.


“숨은 쉬어야지, 아델.”

놀리듯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서 풀어헤쳐 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넘겨 주었다.

이제 보니 그녀의 모자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지고,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풀려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아델은 정신이 확 들었다.

나 지금 무슨 짓을……!


“보내주십시오.”

도망치고 싶었다. 그를 향한 욕망을 고스란히 내보인 게 너무 수치스러워서.


“그대는 순식간에 불과 얼음 사이를 오가는군.”

크리스틴은 순순히 옆으로 비켜섰다.

얼른 모자를 집어든 아델은 로열석의 문을 열고 나갔다.

***



“하아아!”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쓰러지듯 창틀을 짚고 섰다.

입술이 아직도 아리고 화끈거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으로 제 입술을 어루만지자, 그와 닿았던 촉감이 다시 떠올라서 심장이 날뛰었다.


‘미쳤어, 미쳤어!’

아마 얼굴도 취한 사람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리라.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공연이 끝났으니 사람들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나가야겠다.

아델은 모자의 챙을 깊이 내리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똑바로 섰다.


“아델.”

그 순간 마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하지만 아델은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진료는 다 끝났나요?”

“미안해요. 워낙 환자 상태가 위급해서 시간이 걸렸네요. 근데 공연은 왜 안 보고…….”

“거의 끝났는데, 머리가 좀 아파서 나왔어요.”

“어디 좀 봐요.”

마크가 모자의 커다란 챙을 들어 올리자 아델은 당황해서 손을 쳐냈다.

탁!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났다.


“미안해요, 이제 정말 괜찮아져서…….”

하지만 마크의 시선은 서늘했다. 그는 마치 조금 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낸 사람 같았다.


“그만 가죠, 마크.”

그 시선이 견디기 힘들어진 아델이 돌아설 때였다. 마크가 어깨를 움켜쥐며 다시 돌려세웠다.


“아델…….”

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아델은 어깨를 움츠렸다.


“마크…… 아파요.”

“오늘 밤 아론의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네?”

갑자기 아론의 동생이라니?


“또 만나는군. 캐슬러 백작.”

그때 등 뒤에서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일부러 그에게 들리라고 한 얘긴가?’

그러는 동안 크리스틴은 마크와 아델에게 다가왔다. 옆에는 레아나가 그림자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아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마크가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지금은 조용히 산책 중이니, 그런 호칭은 삼가게.”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부인을 만나서 얘기를 나눴더니 좀 좋아진 것 같군. 부인에게도 좋은 시간이었길 바라오.”

그러면서 크리스틴은 엄지로 제 입술을 쓱 훑었다. 조금전의 키스를 상기시키려는 듯이.

아델은 그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건지, 아니면 마크를 도발하려는 건지…….


“그럼 저희 부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겨우 인사를 하고 그에게서 벗어났다.

***

마차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거리의 소음과 말발굽 소리만 어둡고 고요한 안으로 흘러들어올 뿐이었다.

아델은 그 침묵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마크는 똑똑한 사람이었으니 분명 크리스틴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챘으리라. 그래서 아까 아론의 동생이니, 그런 말도 꺼낸 것이리라.

결국 그녀가 먼저 입을 뗐다.


“마크…….”

“원한다면 황제에게 가요, 아델.”

“네?”

“거울을 봐요. 당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게 무슨?”

“지금처럼 상기된 당신을 본 적이 없어요.”

“……!”

“황제와 다시 만나고 있는 겁니까?”

아델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마크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짓지 말아요. 사실 당신과 나,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서로의 목적을 위해 부부행세를 했던 것뿐이고. 아론이 누구의 아이인지 알면 황제도 당신을 받아들일 거예요.”

“……날 빼앗기기 싫다면서요.”

“네, 싫어요. 빌어먹을 황제가 아니라 신이라고 해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저급한 인간인지 알아요? 당신을 억지로 범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요. 그래서 아론의 동생을 임신시키면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라도 붙잡고 싶어서.”

“마크…….”

“그리고 황제를 죽이는 상상까지 하죠.”

그런 끔찍한 말을 하면서 마크의 두 눈은 충혈되어 젖었다.

아델은 결국 마크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마크. 내가 당신을 다 망쳐버렸어요.”

그는 현명하고 기품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자신을 혐오했을지 알만했다.

아델을 밀어내며 마크는 억지로 웃었다.


“아델. 미안함 때문에 내 곁에 머물진 말아요. 그건 너무 비참하니까.”

“당신이 비참하면 난 처참한걸요. 당신 곁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데. 그래요. 난 아직도 그가 좋아요. 어리석을 정도로 그를 원해요. 하지만…… 더는 만나지 않을 거예요. 좋아하는 마음이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으니까.”

마차의 창밖을 보며 읊조리는 아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크리스틴이 자신의 일족을 선택했듯이, 그녀에게도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

잠시 후 마차가 멈춰 섰다. 어느새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마차에서 먼저 내리던 마크는 당황했다.

아직 잠들 시간도 아닌데 저택의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백작 내외가 돌아왔는데 하인들조차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저택에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잠깐 거기 있어요.”

긴장한 마크와 달리 아델은 뭔가 생각났는지 조용히 웃었다.


“괜찮으니까 안심해요.”

“네?”

“저런. 완전히 잊고 있었군요.”

“그게 무슨……?”

그때였다.

팟!

정원의 등불이 일제히 환하게 켜지고, 양초를 손에 든 사람들이 마크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생일 축하해요, 캐슬러 백작님!”

“생일 축하해요, 아빠!”

아이들과 미아의 가족, 그리고 수많은 지인이 그를 축하하며 모여들었다.


“아아, 내 생일!”

마크는 그제야 기억난 듯 읊조렸다.


“아빠, 축하해요!”

그때 의젓하게 정장을 입은 아론과 드레스를 입은 캐이시가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아이들의 뒤로 하인들이 음식을 들고 따라왔다.

정원은 이미 가든파티 준비가 완벽했다. 쌀쌀한 날씨에 추울까 봐 커다란 화로가 곳곳에 놓였고, 악단까지 와있었다.

마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걸 누가 다…….”

미아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당연히 백작 부인이지. 음식도 전부다. 난 다음에 아델의 남편으로 태어날래.”

“미안하게도 난 남자로 태어날 예정인데.”

“히힝, 아델 미워!”

그때 아이들이 소리쳤다.


“아빠 빨리 촛불 끄세요!”

“어, 그래! 근데 초가 너무 많은데?”

아론이 씩 웃으며 자수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빠. 아론이 도와줄게요.”

“캐이시도 도울 거예요!”

“그래, 너희 덕분에 열 살은 더 먹겠구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세 사람은 케이크의 촛불을 껐다. 그리고 흥겨운 파티가 시작되었다. 왁자한 수다, 노래, 자유롭게 춤을 추는 사람들로 정원은 금방 활기에 가득 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크는 조금전 아델의 말뜻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좋아하는 마음이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으니까.”

 
그래, 이런 식의 삶도 충분히 괜찮을지도…….

크리스틴만 돌아간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 엄마도 같이 춤춰요!”

그때 아론이 마크와 아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의 등쌀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부인.”

마크가 정중하게 춤을 신청하자,


“발을 안 밟을 자신 있나요?”

아델이 새침하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한때 춤꾼이 꿈이었답니다.”

“사기꾼. 언제는 배우가 꿈이었다더니.”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춤을 추는 사람들의 대형에 합류했다. 그렇게 파티가 한창 흥이 오를 무렵이었다.

한 남자가 정원을 가로지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백작님, 백작님, 피하십시오!”

일순 파티장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며, 아델이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는 진료소의 사무장이었다.


“궁에서 나온 사람들이 진료소를 수색 중입니다! 곧 백작님을 체포하러 이리로 올 겁니다!”

 

***



“폐하를 뵙게 해주세요!”

아델은 미아와 함께 한달음에 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정문에서부터 경비병들에게 가로막혔다.


“밤이 늦었습니다, 내일 아침 다시 오십시오.”

“제발! 아델 그릴스가 알현을 요청한다고 전해주세요!”

아델이 매달려 애원했지만 경비병들은 오히려 더 매몰차게 밀어냈다.


“당장 돌아가십시오. 안 그러면 무력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미아가 사납게 소리쳤다.


“당신들! 아델 그릴스가 누군지 몰라! 폐하의 약혼녀였다고! 폐하가 알면 다 죽었어!”

아델은 난처했지만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나 보다. 잠시 기다리라며 경비병 한 명이 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요, 아델.”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아나였다. 지금 막 외출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는지 머리에 후드를 쓴 붉은 케이프 차림이었다.


“폐하를 만나게 해줘, 당장!”

“남편의 일로 온 거라면 너무 당당한 거 아닌가요?”

“마크의 일…… 이미 알고 있었어?”

“물론이죠. 폐하의 코앞에서 벌어진 일인데.”

아델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조금전 파티가 열리던 저택으로 황제 직속의 W.G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그대로 마크를 체포해 끌고 간 것이다. 죄명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단 한 마디. 곧 처형될 거라는 살벌한 얘기 외에는.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진료소에서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하지만 레아나는 서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반역자예요. 황제를 시해하려는 자들과 한패였죠.”

“……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