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당신의 함정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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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당신의 함정이었어?
2023.04.17.
“그는 반역자예요. 황제를 시해하려는 자들과 한패였죠.”
“……뭐?”
레아나의 말에 아델이 잠시 넋이 나가 있는데, 미아가 냅다 소리 질렀다.
“이 어린 게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여! 오빠가 반역자라니! 누명도 좀 더 그럴싸하게 씌우라고!”
화르르!
순간 미아의 앞에 불꽃이 떨어졌다.
“꺅!”
“미안해요, 어린 거라 화를 잘 못 참네요.”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려는 미아를 아델이 간신히 말렸다.
“부탁해, 레아나. 폐하를 꼭 좀 만나게 해 줘.”
“글쎄요. 워낙 증거가 확실해서 아무리 폐하라도 소용없을 거예요.”
“제발, 레아나…….”
아델은 결국 레아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마크를 살릴 수만 있다면.
“이게 무슨! 일어나요, 아델.”
당황한 레아나가 일으키려고 했지만 아델은 간절하게 애원했다.
“그를 만나게 해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 순간 들려온 나직한 중저음.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에선 어딘가 금속성이 느껴졌다.
아델은 안도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 앞으로 크리스틴이 다가오고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온몸에 짙은 피 냄새를 풍기며.
아델은 그가 늑대 일족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
그는 마치 사냥을 마친 늑대 같았다.
두 눈은 매섭게 번뜩였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피 냄새에 흥분한 사납고 예민한 짐승. 조금만 자극해도 금방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그는 레아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아델을 보며 잔뜩 인상을 썼다.
“일어나시오, 부인.”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몸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극장에서는 경황이 없어서 묻지 못했습니다.”
“부탁할 처지가 되니 내 건강을 염려해주는 건가?”
차가운 비아냥이 아델의 가슴에 꽂혔다.
“마크가 반역죄로 잡혀갔어요. 오해가 있었을 거예요. 제발 제대로 조사해주세요.”
크리스틴은 뒤에 있는 짐머를 돌아보았다.
“오해라는군.”
짐머가 앞으로 나왔다. 허리에 칼을 찬 짐머 역시 지금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 같았다. 얼굴과 옷 여기저기 피가 튀어 있었다.
“캐슬러 백작은 반란 사제들을 치료하고 숨겨주었습니다. 그들이 조금 전 오페라 극장에서 나오시던 폐하를 습격했고요. 저희가 한 발만 늦었어도 폐하께서 큰일을 당하실 뻔했습니다.”
교황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크리스틴은 사제들을 두 부류로 나눴다. 신성 능력을 쓸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전자는 가차 없이 처형했고, 후자는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교황청과 성당에 남겨 놓았다.
그 과정에서 도망친 세력들이 모리스를 중심으로 반란 사제가 되었다. 대부분 신성 능력을 쓰는 사제들로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그는 몰랐을 거예요! 환자니까 진료를 한 것뿐일 거예요!”
크리스틴은 다급하게 소리치는 아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둘이 할 얘기가 있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넓은 황궁의 정문 앞에는 이제 크리스틴과 아델 둘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가느다란 봄비가 두 사람의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를 주웠다.
“저기에 앉아.”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아델의 구두였다. 경비병들과 실랑이를 하느라 신발이 벗겨진 것도 몰랐던 것이다.
“폐하, 제가…….”
“부탁하러 온 거면 내 명령에 따라.”
아델은 하는 수 없이 아치형의 문틀을 떠받치고 있는 초석 위에 걸터앉았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씌워주었다. 아델이 놀라서 바라보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바닥을 내밀었다. 발을 달라는 것.
아델이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흙투성이가 된 발을 털고 구두를 신겨 주었다. 그것만으로 아델은 다시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습격을 받았다면서, 다치신 데는 없나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가?”
고개를 드는 그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당황한 아델은 크리스틴의 손에 잡혀 있는 발을 얼른 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겉옷도 돌려주었다.
“폐하께서 남들과 다른 신체를 갖고 있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녀를 따라 일어난 크리스틴도 다시 서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모리스는 캐슬러의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은 후 반란 사제들과 함께 나를 습격했어. 놈은 곳곳에 수배 전단이 뿌려진 1급 수배자야. 백작이 정말 몰랐을까?”
“몰랐을 거예요.”
“증명할 수 있나?”
“어떻게든…… 해볼게요.”
“안됐지만 반역자는 그 혐의가 인정되는 즉시 처형. 그게 나의 룰이다. 그는 사흘 내로 재판을 받고 처형될 거야.”
그의 목소리는 위엄이 가득해서 도저히 번복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델은 이 모든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마크는 생일파티의 주인공이었다. 다들 그를 축하하고 즐거워했었는데 처형이라니.
“크리…… 아니 폐하, 제발!”
울먹이며 매달리는 아델을 보는데 크리스틴의 심장에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가슴에 새긴 아델의 이름 위로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모른 채 실랑이를 하고, 젖은 바닥에 무릎 꿇고, 애원하며 눈물까지 흘리는 여자.
그 모든 게 다른 놈을 위해서였다.
나는 너로 인해 이토록 끔찍하게 괴로운데. 너는…….
“돌아가시오, 부인. 캐슬러에게 혐의가 없다면 재판에서 풀려날지도 모르지.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없지만.”
“아아…….”
아델의 몸이 휘청했다. 이대로라면 마크는 곧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아이들과 진료실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반역자라니.
“설마…… 당신이 파놓은 함정…… 아니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부인하지 않았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
아델의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일어섰다.
“당신, 사람도 아니야…….”
증오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럴수록 크리스틴은 그녀를 더 괴롭히고 싶어졌다. 그녀로 인해 심장이 터질 것처럼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내게는 욕이 아닌걸.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지 않나? 내가 짐승이라서 의사 놈에게 가버린 걸 테니.”
아델의 차갑던 눈에 슬픔과 경멸이 드리워졌다.
“당신은 정말 다 잊었구나.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됐어.”
크리스틴은 그 원망스러운 눈빛을 받아내기가 힘겨웠다.
“조심히 돌아가시오, 부인.”
돌아서려는 그에게 아델은 분명히 말했다.
“그릴스 여백작. 다들 날 그렇게 불러요.”
“……?”
“왜냐하면 나와 마크는 혼인서약도 하지 않았으니까. 왜일 것 같나요?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어. 마크도 이해해주었고. 그런데 내가 너무 어리석었지. 당신이 이렇게 변할 줄 꿈에도 모르고…….”
크리스틴은 오히려 비아냥거렸다.
“그럼 혼인서약도 하지 않고 임신부터 했다는 건가? 그대는 남자가 없으면 못 사나 보지? 하긴 극장에서도 금방 뜨거워지더군.”
순간 아델의 붉은 입술이 싸늘하게 치켜 올라갔다.
“넌 늑대가 아니라 개자식이야, 크리스틴 바이스!”
그리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가버렸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멍하니 서 있던 크리스틴은 차츰 이성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날 기다렸다고?’
“짐머!”
“예, 폐하!”
아델이 사라지자 크리스틴은 몸을 돌려 소리쳤다. 병사들을 데리고 멀리 서 있던 짐머가 얼른 달려왔다.
“모리스는 잡혔나?”
크리스틴을 습격했던 반란 사제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나 모리스를 비롯한 최상급 사제들 몇 명은 빠져나간 것이다.
“제보가 들어와서 레아나가 추격 중입니다.”
레아나는 사제들의 마나를 읽을 수 있었기에 추격에 가장 적임자였다.
“마크 캐슬러는?”
“검은 성의 취조실로 보냈습니다.”
젠장 벌써!
한때 칼라임의 근위대장이었던 크리스틴은 알고 있었다. 검은 성의 취조실에서는 온갖 고문이 이루어진다는 걸.
“지금 심문 중인가?”
“예, 모리스의 행방을 알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만나겠다. 심문을 당장 멈추라고 해.”
“예 폐하!”
***
북쪽의 검은 성안은 횃불이 대낮처럼 밝았다. 반란 사제들을 도운 혐의로 수십 명이나 잡혀 왔기 때문이다. 마크도 그중 한 명이었다.
크리스틴은 마크가 갇혀 있는 취조실로 들어갔다. 순간 훅하고 끼쳐 드는 역겨운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인생 절반을 전쟁터에서 보낸 그였다. 그럼에도 고문실 특유의 잔혹하고 역겨운 냄새는 참기가 힘들었다.
마크는 벽과 연결된 쇠사슬에 양팔이 매달려 있었다. 채찍질을 당했는지 하얀 셔츠 여기저기가 찢기고 길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도 땀과 피,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뒤범벅되었다.
항상 단정하고 온화하던 그를 보았던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자신이 이 정도인데 아델이 봤다면…….
“마크 캐슬러, 모리스는 어디 있지?”
그러나 취조실 안을 울리는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무정하고 위압적이었다. 어쨌든 마크에게는 반란 사제들을 도운 혐의가 있었으니까.
“…….”
대답이 없자, 취조실의 병사들이 마크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촤아악!
그제야 마크의 몸이 꿈틀하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맞았는지 두 눈이 잔뜩 붓고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끔찍한 몰골이군.
“모리스는 어디 있나, 캐슬러!”
“모릅니다……. 다친 환자를 치료했을 뿐…….”
“그는 1급 수배자로 사방에 전단이 붙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지?”
“화상으로 얼굴을 다친 환자라며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알았다면 아델과 공연도 놓친 채 치료하지 않았겠죠.”
마크의 입에서 아델의 이름이 나오자 크리스틴은 뭔가 뒤틀린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아델은 놈을 걱정하며 잠들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 사이를 갈라놓은 끔찍한 악당이 된 기분이었다.
“아델이 다녀갔다. 네놈을 살려달라며 애걸을 하더군.”
“큭……!”
마크의 입가에서 나직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그런 표정이셨군요, 폐하.”
크리스틴의 오른손이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로 옮겨졌다.
놈을 베어버리고 정말 악당이 되어버릴까?
“그래, 아주 더러운 기분이지. 그래서 아델에게 좋은 제안을 할까 해. 내 후계자를 낳으라고. 그러면 반역자라도 한 번은 살려줄 수 있을지도.”
“풉! 푸하하하!”
오히려 마크의 웃음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졌다.
스릉!
크리스틴의 레이피어가 빠져나와 그의 턱 밑에 겨눠졌다.
“뭐가 그리 우습지?”
마크는 잔뜩 충혈된 눈과 피투성이가 된 입술로 차갑게 웃었다.
“폐하께서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십니까? 당신 마음이 지옥인 건 그 여자를 믿지 못해서지.”
“……!”
“손에 쥐고도 그게 보물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자.”
“감히 폐하께!”
뒤에 서 있던 취조실 병사들이 채찍을 들고 달려들었다.
크리스틴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마크 캐슬러를 감옥으로 보내라. 심문은 내가 할 테니 아무도 손대지 말고.”
“예, 폐하!”
“다친 곳은 치료해주도록.”
“예, 폐하!”
캐슬러와 헤어진 크리스틴은 검은 성의 지하 계단을 올라왔다. 그 뒤를 짐머가 조용히 따랐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과 신음이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메아리쳐 들려왔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와 마크는 혼인서약도 하지 않았으니까. 왜일 것 같나요?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어.”
“당신 마음이 지옥인 건 그 여자를 믿지 못해서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