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토록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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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그토록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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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그토록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어떻게
2023.04.21.
“나와 마크는 혼인서약도 하지 않았으니까. 왜일 것 같나요?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어.”
“당신 마음이 지옥인 건 그 여자를 믿지 못해서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짐머.”
“예, 폐하.”
“네가 기억하는 아델은 어떤 여자였지? 내게 진심인 것 같았나?”
왼쪽 가슴에 그녀의 이름이 드러난 이후 함께한 추억들이 조금씩 떠오르곤 했다.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은 항상 행복한 얼굴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델의 표정이 어땠는지 가물가물했다.
“제 눈엔 서로가 전부였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짐머가 어렵게 말을 꺼내자 크리스틴은 그 순간 직감한 것 같았다.
“설마 아론이 내 아이라는 농담은 하지 마라.”
짐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우뚝!
계단을 오르던 크리스틴이 멈췄다. 수많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으윽!”
또다시 심장이 지끈거려와 가슴을 움켜쥐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크리스틴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지?”
“아델 양이 임신 소식을 편지로 알렸답니다. 하지만 중간에서 사라졌나 봅니다. 당시 수도 그린힐은 늑대 일족에 대한 혐오가 강해서 폐하의 아이인 걸 숨겨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 캐슬러의 아내가 됐다는 건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크리스틴의 머릿속에 6년의 시간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그 시간 동안 아델이 어떻게 견뎌냈을지 상상이 되었다. 하지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함과 후회, 참회와 슬픔이 하나로 뒤엉켜서 분노가 치밀었다. 그 분노의 대상은 아마도 자신이리라.
그래서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내 아이일 리 없다. 그 여자의 거짓말이다.”
크리스틴은 한 가지만은 분명히 기억했다. 그녀를 안으면서도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 늑대 일족의 아이는 낳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자신의 아이가 평생 핍박받고 이방인의 슬픔을 안고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피를 물려준 아비를 원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일로 아델과 싸우기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니 아론이 어떻게 자신의 아이란 말인가?
그토록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어떻게…….
크리스틴에게 짐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델 양과 캐슬러는 혼인서약도 하지 않았답니다. 함께 아이들을 키우며 부부행세를 했을 뿐, 실질적인 부부도 아니었답니다. 생활도 각자 다른 건물에서 했었고.”
“그만.”
크리스틴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여전히 자신의 여자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다가갈 수 없는 상황에 화를 내고 있었던 걸지도.
***
황궁에서 돌아온 아델은 미아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아이들과 타냐가 달려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모두 걱정하며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아델은 걱정 가득한 아이들의 눈을 보며 억지로 웃었다.
“걱정하지 마! 곧 돌아오실 거야.”
아론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말했다.
“내가 폐하 아저씨 만날래요. 우리 아빠 살려달라고 말할 거예요. 형들이 그랬어요. 폐하가 아빠를 잡아간 거라고.”
아델은 참담한 기분에 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괜찮아, 아론. 엄마가 꼭 아빠를 데려올게. 그러니까 너희들도 걱정하지 말고 자렴.”
아델은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하지만 아론은 여전히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아저씨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 아빠를 아프게 하면 어떡해요?”
“아론…….”
“그럼 아론은 화가 나서 싸울 거예요. 우리 아빠 아픈 거 싫어요!”
“아론은 아빠가 그렇게 좋니?”
“네! 아저씨도 좋은데 아빠가 훨씬 더 좋아요!”
너무나 순수한 아이의 표정을 보며 아델은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작은 어깨를 꼭 끌어안고 복받치는 감정을 삭였다.
“그래, 엄마가 폐하에게 잘 말해볼게.”
아이들이 모두 침실로 들어가고 나자 아델은 응접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미아가 차를 준비해서 다가왔다.
“차라도 좀 마시고 쉬어.”
“고마워, 미아. 늦었는데 너도 그만 돌아가 봐야지. 오늘 곁에 있어 줘서 너무 힘이 됐어.”
그러나 미아는 아델의 앞에 한동안 서 있기만 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폐하가 일부러 그런 거지?”
아델은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가 널 보는 눈빛은 줄곧 짐승 같았어. 자기 걸 빼앗긴 분노로 가득한.”
“미아…….”
“왜, 그를 욕하니까 기분 나빠?”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속단하지마.”
예전의 크리스였다면 절대로 그런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예전의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델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실낱같은 믿음이라도 갖고 싶었다. 그가 너무 많이 변하지 않았기를.
물론 미아는 그를 믿지 않았고.
“아델, 아론을 데리고 폐하에게 가. 그리고 마크를 풀어달라고 해. 자신의 여자와 아이를 지켜줬으니 아무리 짐승이라도 그 정도는 해주겠지.”
“미아, 넌 지금 너무 예민해. 나중에 얘기하자.”
“나중에 언제? 마크가 죽고 난 후에? 기어이 오라버니가 너 때문에 목숨까지 잃어야 속이 시원하겠니? 평생 딴 남자를 마음에 품은 여자를 곁에 두고 힘겨워 한 거로도 모자라?”
“미아…….”
“그는 지금까지 널 위해 많은 희생을 했어. 이제 너도 보답해야지. 아니지, 좋아하는 남자에게 돌아가는 거니까 잘된 일이잖아. 빌어먹을 마크만 불쌍하지.”
미아의 말은 송곳처럼 아델을 찔렀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마크의 혈육으로서 원망스러운 게 당연할 테니 아델은 그저 미안했다.
“그래, 미아. 네 말이 다 맞아. 내가 바로잡을게. 하지만 그에게 돌아가는 건 네 생각처럼 쉬운 결정만은 아니라는 걸 알아줘.”
자신을 지우고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온 남자.
어쩌면 그는 아론만 데려가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마크부터 살리는 게 맞았다.
***
다음 날 아침.
시녀들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던 이자벨이 걸음을 멈췄다.
황후궁의 미로 정원 입구 한가운데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아침 햇살에 은빛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을 응시하는 두 눈과 마주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자벨은 허리 숙여 공손히 예를 올렸다.
“어제 큰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별일이 없으셨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폐하.”
“그러게 말입니다. 별일이 있었다면 부인은 이토록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없었을 테니.”
이자벨은 사색이 된 표정을 겨우 감추며 웃었다.
“설마 저를 의심하시나요? 저는 승패가 뻔한 싸움은 하지 않는답니다.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데…….”
“알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크리스틴은 뒤에 있던 짐머에게 고갯짓했다. 짐머가 앞으로 나와 이자벨에게 유골함처럼 생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자벨의 시녀가 얼른 나와서 대신 받았다.
“열어라.”
그녀의 명령에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던 시녀는,
“꺅!”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며 상자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상자에선 피투성이의 죽은 새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 새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을 법한 꼬깃꼬깃 접힌 쪽지.
거기엔 이자벨의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아델 그릴스를 주목할 것]
“조심하십시오, 다음엔 아드님의 목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
이자벨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충고 감사합니다, 폐하.”
***
매주 금요일은 안 쓰는 물건과 빵을 바꿔주는 날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델의 빵 가게가 한산했다. 그린힐에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이다. 캐슬러 백작이 반란 사제들과 함께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고.
곧 처형당할 거라거나, 아델과 아이들도 잡혀갈 거라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니 행여 아델의 빵 가게에 왔다가 한패로 오해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빵 가게 직원들은 물론이고 하인들도 대부분 오늘 아침에 그만둬 버렸다.
“오늘은 그만 쉬세요. 손님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네요.”
타냐가 말렸지만 아델은 바쁘게 빵과 디저트를 진열했다. 밤새도록 한잠도 안 자고 일을 한 게 분명했다. 생각이 많아지면 쉬지 않고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였으니까.
“그래도 금요일은 손님들과 약속한 날이야. 헛걸음치는 손님은 없어야지.”
“걸레가 된 치마를 조각내서 스카프 6장이라고 들고 오는 손님이요? 길에서 주운 신발 한 짝을 들고 오는 손님이요? 그런 사람들도 손님이라고 잘 해주면 뭘 해요. 이럴 땐 자기 살겠다고 코빼기 하나 안 비치는데.”
타냐는 가게 앞을 빙 돌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누구나 자기 목숨이 소중한데 어쩌겠어.”
“네, 그런 손님들은 제가 상대할 테니 그만 들어가 쉬세요. 한잠도 못 주무셨잖아요.”
하지만 아델은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손님, 안 쫓아낼 테니 염려 마세요!”
“됐으니까 이따가 외출할 때 가게나 봐줘.”
“어디 외출하시려고요?”
“바람이나 좀 쐬려고. 그리고 난 여기 있는 게 마음 편하니까 신경 쓰지 마.”
“하여간 고집불통이세요!”
결국 타냐는 화를 내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집불통…….
넓은 가게 안에 혼자 남은 아델은 수북하게 쌓여 있는 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크리스틴에게 자주 듣던 말이었으니까.
아델은 그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게 싫지 않았다.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속내가 담겨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어젯밤 자신의 신발을 신겨 주던 크리스틴과 마크를 처형할 거라고 선언하던 황제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
어쨌든 마크가 잘못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녀는 새로 구운 빵의 진열을 마치고 황제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가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마크를 데려와야지.
아론을 빼앗기더라도…….
그때였다.
쨍그랑!
가게의 유리문이 산산조각이 나며 깨진 것이다. 깨진 유리문 너머로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다들 손에 각목이나 갈퀴가 달린 쇠스랑 같은 걸 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거리의 불량배들이었다.
그들은 들고 있던 연장으로 나머지 유리문도 전부 깨부수며 안으로 들어왔다. 밤새 술을 퍼마셨는지 다들 심한 악취와 술 냄새가 났다.
“당신들 뭐 하는 거죠?”
아델은 아랫배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이자들을 막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저택에 있는 아이들까지 위험해질지 몰랐다. 이제 아이들을 지킬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니까.
“우리? 우린 손님인데.”
그러더니 남자들은 어슬렁거리며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으로 빵을 쿡쿡 쑤셔대기도 했다.
“일단 술부터 좀 내와. 맛있는 안주도.”
“뭐해? 술 가져오라고!”
콰장창!
남자 한 명은 빵이 놓인 진열대를 걷어찼다. 그 바람에 빵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델이 그들을 노려보자 한 남자가 허리춤을 매만지며 다가왔다.
“이봐, 부인. 그렇게 노려보면 다리가 후들거리잖아. 특히 세 번째 다리가.”
구경하던 남자들은 머저리처럼 키득거리며 웃었다.
“돈은 금고에 있으니까, 얼른 갖고 나가.”
아델이 매섭게 소리치자,
“이 반역자의 계집년이!”
남자의 두툼한 손이 그대로 날아왔다.
철컥!
하지만 아델이 놈의 머리통에 피스톨을 겨눈 게 더 빨랐다.
“셋을 줄게. 머리통에 구멍 나기 싫으면 당장 꺼져. 하나!”
“알았어. 갈게, 간다고!”
피스톨 앞에서는 남자들도 겁을 먹었다. 그들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둘!”
그 순간 한 남자가 재빨리 아델의 등 뒤로 돌아가 각목을 휘둘렀다.
“까불지마, 계집!”
“엄마!”
마침 가게로 들어오던 아론이 남자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물어뜯었다. 남자는 각목을 그대로 아론에게 휘둘렀다.
“아론!”
스컥!
동시에 그는 피를 튀기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퍽!
쓰러진 놈의 뒤에는 크리스틴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레이피어는 살아 있는 것처럼 피를 흘렸고, 다른 한 손으론 아론을 붙잡고 있었다.
“누구 목부터 베어줄까, 아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