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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내 아이가 나무처럼 자라난 시간 (128/155)


128화. 내 아이가 나무처럼 자라난 시간
2023.04.24.



“누구 목부터 베어줄까, 아델?”

“그냥 보내주세요.”

아델은 저들을 혼내주는 것보다 아론이 더 걱정스러웠다. 눈앞에서 사람이 칼에 찔리는 걸 봤으니까.

얼른 크리스틴에게 잡혀있는 아이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괜찮니, 아론?”

“응, 엄마는?”

아이는 숨이 막히는지 고개를 치켜들며 물었다.


“엄만 괜찮아. 아론이 지켜줬잖아.”

“헤, 다행이다.”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던 크리스틴은 피 묻은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생각 같아선 놈들의 목을 차례로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여기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봐, 그 여자는 반역자의 아내라고. 괜한 치기로 도와줬다간 황제에게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어.”

그러자 남자들이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그들은 온 대륙에 악명이 자자한 황제의 얼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사내의 살기에 겁을 먹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괴롭히는 건가? 황제가 모른 척할 것 같아서?”

크리스틴의 물음에 그들은 손사래를 쳤다.


“괴롭히긴 누가. 손님도 없길래 팔아 주려고…….”

그러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도망칠 길을 살폈다.


“뭐야, 물건도 안 사고 벌써 가려고?”

크리스틴은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생각해보니 도, 돈을 안 가져와서…….”

“내가 빌려줄게.”

짤랑!

크리스틴은 그들 앞에 플래티넘 금화를 던졌다.


“이 돈으로 여기 있는 빵을 전부 사 먹도록 해. 대신, 다 먹을 때까지는 절대 못 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빵들은 깨진 유리조각과 뒤섞여 있었다.


“노, 농담이지?”

“아닌데. 남기면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될 거야. 내가 그 황제거든.”

서늘한 표정의 크리스틴 뒤로 어느새 W.G 기사들이 가게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델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맙다면 차 한 잔 대접할 시간을 주지.”

 

***

아델은 크리스틴을 저택 응접실로 데리고 왔다. 처음 오는 곳이었는데도 그는 왠지 익숙한 장소에 온 기분이었다.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느낌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몇 번 봤던 것 같았다.

그녀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테이블 맞은편에는 아론이 앉아 있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꼭 다문 입술 안에 할 말을 잔뜩 머금고서.


“할 말 있니?”

“폐하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문득 치고 들어오는 질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네가 보기엔 어떤데?”

아론은 그와 닮은 투명한 청회색 눈동자로 빤히 보았다.


“음…… 좋은 사람일 거 같아요.”

“왜?”

“엄마가 그러는데 내 눈을 보고 있으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서 행복해진대요. 따뜻하고 좋은 사람의 눈이래요.”

“……!”

“폐하 아저씨도 나랑 똑같은 눈을 갖고 있으니까…….”

 

 
그때 아델이 찻잔 세트와 쿠키를 가지고 왔다.


“아론, 잠깐 자리를 비켜주겠니.”

“더 있고 싶어요.”

아이는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귀여운 강아지 같은 표정에 늘 약해지는 아델이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단호했다.


“안 돼. 타냐랑 나가 있어.”

타냐가 아론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아이는 재빨리 빠져나와 크리스틴에게 매달렸다.


“우리 아빠를 살려주세요!”

“아론!”

결국 아델이 아론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이는 고집 세게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아저씨가 진짜로 우리 아빠를 잡아갔어요? 오늘 아론하고 낚시 가기로 했는데……. 아저씨는 높은 사람이니까 우리 아빠 살려줄 수 있죠? 그렇죠?”

울먹이며 애원하는 아이를 보자 크리스틴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의 여자와 자신의 아이.

그들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마크를 풀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을 빼앗기기 싫었으니까.

그럴수록 점점 나쁜 마음이 자라는 것만 같았다.

타냐가 겨우 아론을 데리고 나갔다.


“캐슬러는 좋은 아빠였나 보군.”

대답 대신 찻잔에 차를 따라 건네며 아델이 물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폐하.”

“어제 당신이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어. 캐슬러와는 혼인서약도 하지 않았다고? 나를 기다리기 위해서.”

아델은 조금 후회했다. 어제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속에 담아뒀던 말이 튀어나와 버렸으니까.


“어제 들으신 말은 잊으세요.”

“그런데 캐슬러도 비슷한 말을 했지. 감히 나더러 당신을 믿지 못하는 멍청이라고.”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아론은 내 아이인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

아델은 이미 밝힐 각오를 했음에도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

“잘 생각해서 대답해. 캐슬러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정말 마크를 살려준다고 약속할 건가요?”

빌어먹을 또 마크!


“다시 묻지. 아론은 내 아이인가?”

아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깊은 초록빛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렇다면 믿을 건가요?”

“믿어.”

모든 걸 밝히고 나자 아델은 후련함과 함께 불안감이 찾아왔다. 그가 이제 어떻게 나올지 조마조마했으니까.

그러다 크리스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놀라서 쳐다보았다.


“어딜 가는 거죠?”

“내 아이니까 데려가야지.”

아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크를 살리기 위해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론을 보내는 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안 돼요! 난 아론과 헤어질 수 없어요!”

아델이 달려와 매달리자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었다.


‘이 여자는 설마 아들만 데려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면 캐슬러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뜻인가?’

하긴 어제 마크가 반역자가 된 것도 자신이 함정에 빠트린 거라고 했던가?

그녀에게 자신은 이제 피에 굶주린 폭군 황제일 뿐인가보다.

마크를 함정에 빠트려 처형하고, 아들을 빼앗아가는…….

그는 아델의 바람에 부응해 정말 폭군이 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쩌지 아델. 난 후계자가 필요하고, 그대는 아론과 헤어질 수 없다니. 그렇다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무슨?”

양손으로 아델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며 그가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궁지에 몰아넣은 사냥감에게 알량한 은혜를 베푸는 포식자처럼.


“그대가 또 다른 후계자를 낳아주는 수밖에.”

“……!”

놀라서 움찔하는 아델을 보자 그는 자꾸만 심술이 났다.

한때는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더니…….

그래서 더 달콤하고, 못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당신과 아론은 캐슬러와 함께 살도록 해줄게. 알잖아, 아델. 당신이 아닌 누구도 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거. 나는 바하마르트 제국을 이을 후계자가 아주 간절하거든.”

“그 말은 설마……?”

“물론 선택은 당신 몫이야.”

그는 아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저녁에 마차를 보내지. 캐슬러가 내일 아침을 무사히 맞이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대가 하기에 달렸어.”

그는 잔뜩 굳어진 아델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

크리스틴이 가게를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짐머가 궁금해서 달려왔다.


“두 분 얘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아론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사실 그녀에게 물어볼 필요도,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엄마가 그러는데 내 눈을 보고 있으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서 행복해진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의혹은 확실해졌으니까. 아니, 처음부터 알았을지도 몰랐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그토록 마음이 쓰이고, 눈을 뗄 수 없었던 걸 보면.

피의 끌림이란 게 이런 건가?

하지만 크리스틴의 대답은 비딱하게 흘러나왔다.


“내 아이가 맞다는군. 하지만 캐슬러를 살리기 위해 무슨 말인들 못 할까?”

짐머가 혀를 찼다.


“아니, 설마 그 말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세상 어떤 어미가 자식을 두고 거짓말을 합니까?”

크리스틴은 그런 짐머를 매섭게 응시했다.


“네놈, 몰래 아델과 만나기라도 하는 건가? 어떻게 그리 잘 알지?”

짐머는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닙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크리스틴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늘 밤 내 침실로 그녀가 올 거다. 캐슬러를 살리고 싶으면 새로운 후계자를 낳으라고 했거든.”

짐머가 결국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아니, 정말 그런 파렴치한 폭군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델 양이 폐하를 뭐로 생각하겠습니까?”

“파렴치한 폭군으로 생각하겠지.”

짐머는 답답해서 제 가슴을 쳤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사실은 이자벨 부인이 해코지할까 봐 걱정돼서 오신 거잖아요? 그렇게 말해도 잘 될지, 말지…… 모르는데.”

“잘되면?”

“예?”

“어차피 세간엔 남의 아내를 빼앗은 폭군밖에 더 될까?”

“하지만 그들은 혼인서약도 안 한 위장 부부였다고요. 그리고 폐하는 아델 양을 아직도 원하시잖아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그분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게 하셨으면서. 이제 겨우 괜찮아지셨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들은 6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다. 그녀는 캐슬러를 살리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기세고. 그들은 그리 간단한 사이가 아니다.”

크리스틴은 훌쩍 말 위에 올라탔다.


“아무도 따르지 마라.”

“폐하!”

“이라 핫!”

말 고삐를 세차게 흔들며 크리스틴은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랬다. 6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다.

그가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수많은 왕과 귀족을 무릎 꿇리고 황제가 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백여 년간 굳건하던 교황청을 무너뜨리고, 늑대 일족을 세상에 자리 잡게 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도 몰랐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그토록 사랑스럽게 자라난 시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델은 캐슬러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린 것이다. 오늘 밤 자신에게 오는 것도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행복하고 단란해 보이던 그들 가족을 떠올리자 크리스틴은 마음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불행하게 짓밟아 버리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매일 밤 아델이 자신을 증오하며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기를 바랐다.

그렇게라도 캐슬러를 지우고 그녀의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

***

날이 어두워지자 저택 앞으로 황궁의 마차가 도착했다.

일찌감치 아론을 재운 아델은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마님…….”

걱정스럽게 따라나서는 타냐에게 그녀는 의연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마크에게 죄가 없다는 걸 잘 말씀드리면 폐하도 이해해 주실 거야. 알지? 예전부터 폐하가 내게 약하셨던 거.”

“알죠.”

하지만 예전의 크리스틴이 아니었으니 문제였다. 그는 임신한 연인을 버리고 황좌에 올랐다. 그리고 이제 옛 연인을 보는 눈빛에 온기라고는 없었다.

어젯밤 아델이 찾아가서 애원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황궁에서 마차까지 보냈을까?

그것도 이 밤중에 왜…….

타냐는 기분 나쁜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돌아오실 때까지 안 자고 기다릴게요.”

“얘기가 길어질지도 몰라. 그러니 너도 그냥 자.”

“정말 얘기만 나누시는 건가요?”

아델은 그 말을 못 들었는지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아니 못 들은 척 한 걸지도.

곧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타냐는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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