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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몸이 식어버려서 (129/155)


129화. 몸이 식어버려서
2023.04.28.


황궁으로 들어온 마차는 마블 궁에서 멈췄다.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자 나이 많은 귀부인이 아델에게 다소곳이 인사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면 수도의 귀족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델에 대한 소문이 조금은 늦게 퍼질 테니.


“그릴스 여백작님을 뵙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릴라 자작 부인이라고 소개한 귀부인은 아델을 2층으로 안내했다. 예전에 그녀가 쓰던 바로 그 침실로.

얼마 전까지 하얀 천으로 덮여 있던 가구들은 모두 광이 나도록 닦여 있었고, 침구도 새것으로 교체된 후였다. 그리고 벽난로가 타올랐고 침대 한가운데에 붉은 장미가 하트 모양으로 놓였다.

그 뿐만 아니라 사방이 온통 촛불과 꽃으로 꾸며져 있기까지…….

설마 짐머가 지시한 건가? 그는 꽃 성애자였으니.


“폐하께서는요?”

“그전에 몸에 걸친 것부터 모두 벗으셔야 합니다.”

“벗다니요?”

“폐하께 해가 될 만한 것을 소지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델은 기가 막혔다. 크리스틴이 어디 보통사람이던가? 해가 될 만한 것을 지녔다고 해도 그의 손끝 하나 상하게 할 수 없을 텐데.


“나 같은 사람이 그분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을 텐데요.”

하지만 마릴라는 완강한 시선으로 아델을 응시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잠자리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변을 당하기도 하지요. 더구나 여백작 님의 남편은 반역 혐의로 갇혀 있는 상태. 폐하의 안위를 위한 것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델은 기가 막혔다. 마크가 반역자의 누명을 쓴 것도 억울한데 자신도 같은 취급이라니. 크리스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놀라고 걱정할 사람이 누군데.

물론 그는 믿지 않겠지만.


“폐하께서 지시하신 일인가요?”

“황궁의 법도입니다. 따라주십시오.”

“잊었군요. 오늘 밤 만나는 분이 빌어먹을 황제 폐하시라는 걸.”

아델은 씁쓸하게 웃으며 겉옷부터 하나씩 벗었다.


“내가 할 테니 자넨 나가보게.”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아델은 놀라서 돌아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는 와인 잔을 든 채 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황제를 본 마릴라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침실을 나갔다.

***

뚜벅뚜벅.

느슨한 걸음으로 다가온 그는 탁자 앞의 붉은색 비로드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았다.

검은 리넨 셔츠에 팬츠를 입고 와인 잔을 든 모습이 예전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아델은 잠시 마블궁에 살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저 의자에 마주 앉아 함께 와인을 마시고는 했었는데.


“뭐해. 마저 벗지.”

하지만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델은 잠시 감상적이던 자신을 나무랐다.

그는 이제 점령국의 황제일 뿐인데.


 


“폐하께선 제가 해를 끼칠 수 있는 분이 아니실 텐데요.”

아델은 지금 얇은 실크 슈미즈 차림이었다. 그의 앞에서 이런 모습인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나라도 침대 위의 암살자는 조심할 필요가 있지.”

그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더니, 아델의 손목을 홱 잡아챘다. 그녀가 휘청이며 끌려오자 치맛자락 안으로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핫, 무슨!”

당황한 아델이 물러나려고 했지만,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그가 허벅지를 움켜쥔 게 더 빨랐다. 그러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그대는 재미있는 여자야, 아델.”

“……!”

“쉬이…… 움직이지 마. 위험하니까.”

속삭이듯 읊조린 그는 조심스럽게 아델의 다리를 더듬었다.

이내 치맛자락 안에서 빼낸 그의 손에는 피스톨이 들려 있었다. 아델은 늘 가터링 안에 피스톨을 숨기고 다녔던 것이다.


“이런 걸 숨기고 황제를 만나러 왔다면 시해범으로 체포돼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군요. 그럼 이제 돌려드리죠, 폐하.”

“돌려준다……?”

“그건 폐하께서 선물하신 거니까요.”

나를 스스로 지키라며 당신이.

그가 준 건 모두 상자에 넣고 잠가버렸는데, 그것만은 늘 지니고 다녔다. 오늘처럼 꽤 요긴하게 쓰이곤 했으니까. 그때마다 그가 대신 지켜주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당신은 그것도 다 잊었구나.


“줬다 뺏을 순 없지. 나갈 때 가져가도록.”

“제가 쏘면 어쩌시려고요?”

탁자 위에 피스톨을 올려두던 크리스틴이 픽 웃었다.


“총알이 없더군.”

아델은 늘 위협의 용도로만 지니고 다녔을 뿐 사실 총알을 장전하지는 않았다. 만일의 사고로 원치 않는 사람이 다치는 건 끔찍했으니까.


“자, 그럼 이번엔 또 뭘 숨기고 있는지 궁금한걸.”

“겁이 많으시군요, 폐하.”

“호기심이 많은 거지.”

“아쉽지만 더는 없네요.”

“그걸 증명해.”

“네?”

“마저 벗으라는 뜻.”

“……!”

그의 위압적인 분위기와 말투에 아델은 저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벗을 준비도 없이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텐데.”

“잊었군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래, 파렴치한 폭군 황제지.”

“그럼 약속해줘요. 내일 당장 마크를 풀어주겠다고.”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인상이 써졌다.

빌어먹을 마크, 또 마크!

그녀가 이곳에 오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오지 않기를 바랐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크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럴수록 그의 눈빛은 아델을 상처 낼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아론을 내놓지 않을 거면 내 후계자를 낳는 조건인 걸로 기억하는데?”

아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를 내일 당장 풀어줘요!”

크리스틴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협상하기엔 그대가 가진 카드가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이래도요?”

아델은 틀어 올린 머리를 고정한 기다란 핀을 뽑았다. 그 바람에 부드러운 실크 같은 머리카락이 차르르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델은 그 핀을 제 목에 겨눴다. 날카로운 끝이 그녀의 보드라운 목덜미를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 같았다.


“무슨 짓이야!”

쨍그랑!

놀란 크리스틴이 의자에서 사납게 일어서자 테이블의 와인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붉은 와인이 카펫을 피처럼 적셨지만, 그는 아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얗게 굳어진 그의 표정을 보는데 아델은 왠지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가 아직 나를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은 건가?

아직은 희망이 있는 건가?


“내가 죽으면 당신은 후계자는커녕 평생 여자를 안지도 못하겠죠?”

“당장 그걸 내려놔, 아델.”

“왜, 겁이 나나요? 평생 여자를 안지도 못하고 죽을까 봐?”

“아델, 이런 식으론 어떤 협상도 할 수 없어. 내려놓고 다시 얘기하지.”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하지만 그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분명한 건 그는 자신이 잘못 될까봐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

아델은 이제 협상의 주도권을 잡은 기분이었다.


“내일 마크를 풀어준다고 약속해요. 물론 당신과의 약속은 지킬 거예요.”

“약속하지. 그러니 그걸 내놔.”

아델은 순순히 그가 내민 손바닥 위에 핀을 올려놓았다. 그는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안으로 힘껏 던져버렸다.

휘익!

루비로 장식된 값비싼 핀이 금방 불꽃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마크를 구했으니 아델은 그걸로 만족했다.

물론 잔뜩 화가 난 짐승과 단둘이라는 것이 두렵긴 했지만.

***

하지만 화를 내며 사납게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는 아델의 앞에 의자를 내밀었다.


“일단 앉아, 아델.”

그녀가 마지못해 그곳에 앉자, 그는…… 몸을 숙여 깨진 와인 잔의 파편들을 주웠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아델은 당혹스러웠다.


“지금 뭘 하는 거죠?”

“보시다시피. 이번엔 이걸로 위협하면 곤란하니까.”

깨진 와인 잔의 파편을 줍는 그의 옆 모습에서 아델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자신이 유리에 찔리거나 다칠까 봐 이렇게 했을 것이다. 설마 지금도 그런 마음인 걸까?

그랬으면 좋으련만…….


“뭘 그렇게 보지?”

아델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 동안 당신이 내가 알던 사람처럼 보여서.”

“그대가 알던 녀석은 머저리였나 보군. 지금 내가 그렇게 느끼거든.”

아델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런 당신이 좋았는데.”

크리스틴은 몸을 일으켜 아델에게 다가왔다.

길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과 슈미즈 차림이 된 그녀의 모습이 과거의 잔상과 겹쳐졌다. 요염하면서도 청순하고, 고혹적이면서도 순진했던 그녀.

그리고 침대 위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그를 원하던 연인.

그는 아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쓸어넘겼다. 그 손이 자연스럽게 내려와 네크라인을 조이고 있는 리본을 풀고, 풍성한 소매를 어깨 아래로 천천히 끌어내렸다.

이내 뽀얗고 새하얀 살결이 눈부시게 드러나자, 당황한 아델은 두 손으로 얼른 가슴을 감싸 안았다.

그가 턱을 움켜쥐어 바라보게 하자 붉어진 두 뺨과 녹빛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며 촉촉해졌다.


“……!”

순간 크리스틴의 심장에 고통이 찾아왔다. 그녀를 멀리하라는 경고처럼.

그럴수록 갖고 싶었다. 심장이 터져 죽어도 좋을 만큼.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며 입술을 겹쳤다.

그러나 보드라운 살갗을 살며시 대고만 있을 뿐이었다.

잇몸이 근질거리고 숨이 거칠어졌지만 인내심을 갖고 참았다.

안 그러면 필시 그녀를 상처 내고 다치게 할 테니까.

그와 입술을 맞댄 아델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미약한 움직임은 그를 더 자극했다.

잔뜩 겁먹은 연약한 짐승 같아서.

살며시 입술을 떼자,


“크리스…….”

제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숨결이 뜨거웠다.

그것만으로 단정한 귀부인에서 금방 요염한 요부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크리스틴은 왜 이 여자에게 그토록 빠져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할 것만 같아서 입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이대로 폭주하고 싶었다. 그녀가 망가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심장의 이 고통을 잊을 때까지 거침없이 달려들어 갖고 싶었다.


“늦었는데 쉬도록.”

그러나 한발 물러섰다. 물론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지만.


“왜……?”

더 이상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난감해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그대가 하는 짓을 보니 몸이 식어버려서.”

“……!”

“물론 약속대로 내일 아침 마크는 풀어줄 거야. 대신 그대는 이제 마블궁에서 지내게 될 거다.”

“그런 법이 어딨어요!”

아델이 항의했지만 크리스틴은 나직하게 비웃을 뿐이었다.


“아델, 이곳에선 내가 곧 법이야. 후계자를 낳기 전까지 내게 빚지고 있다는 걸 잊지 마.”

“아론은 아직 엄마가 필요해요!”

“물론 원한다면 아론을 데려와도 좋아. 당신이 후계자를 낳아줄 때까지 난 그 아이가 필요하거든.”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틴은 침실을 나가버렸다.


“하아!”

아델은 긴장이 풀려서 털썩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나쁜 자식!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아델이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었다.

마크는 풀려나고 자신과 아론은 크리스틴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그녀가 다칠까 봐 놀라던 그 표정은 예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입은 칼날을 문 것처럼 왜 그렇게 못 된 말만 하는 건지.

혼자 남은 아델은 속절없이 짙은 꽃향기와 촛불이 왠지 허무하게 느껴졌다.

크리스, 나 조금은 당신과 함께 있길 원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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