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마블궁의 새 식구
(130/155)
130화. 마블궁의 새 식구
(130/155)
130화. 마블궁의 새 식구
2023.05.01.
이른 아침 눈을 뜬 마크는 다가오는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들었다.
어제 크리스틴의 지시로 고문도 멈추고 치료도 받았지만,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반란 사제들과 그들을 도운 자들은 대부분 하루 이틀 안에 처형당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마크는 반란 사제와 한패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끼이익!
감옥 안의 철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크 캐슬러 백작 나오시오.”
마크는 긴장해서 물었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되오.”
“집?”
“그렇소. 집.”
의아해하는 그를 보며 병사들이 비죽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아내를 잘 둔 덕분인 줄 아시오.”
“……!”
마크는 어젯밤 크리스틴이 지껄이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델에게 좋은 제안을 할까 해. 내 후계자를 낳으라고. 그러면 반역자라도 한 번은 살려줄 수 있을지도.”
설마 아델과 그가?
크리스틴이 나타나는 순간 아델이 그에게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믿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자신과 아이들 곁에 남아줄 거라고.
자신의 생일날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크리스틴을 좋아하지만 그 마음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고.
그녀는 크리스틴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온 시간이 짧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정리가 될 거라고 생각한 게 어리석었다.
상대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정복한 피의 황제.
그런 자에게 아델의 뜻이 통할 리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게 그자일지도…….
“고생 많았습니다. 캐슬러 백작.”
생각에 잠겨 있던 마크는 정중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 성의 지하 계단을 올라 지상에 도착하자 짐머가 서 있었다. 마크와 마주친 그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택까지 타고 갈 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분의 옷도 준비했으니 갈아입으십시오.”
치료를 받긴 했지만 체포되던 날 고문을 당한 마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 그가 입은 옷은 여기저기 찢기고 피가 묻어 있었다.
“내 반역 혐의가 풀린 거요? 아니면 그분의 명령이요?”
“백작의 반역 혐의는 아직 조사중입니다. 그러니 댁에 돌아가시면 조용히 지내도록 하십시오.”
마크는 그 순간 울컥한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가 아델을…….
“그러면 반역 혐의가 있는 자를 그냥 풀어준다는 말입니까? 어째서요? 황제가 뭔가 구린 데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마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릴 정도로. 그래 봐야 소용없는 짓인 걸 알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백작!”
짐머는 나직하지만 서늘하게 경고했다.
“폐하를 만나게 해주시오!”
“알현은 절차를 갖춰서 일정을 잡아주십시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백작.”
짐머가 돌아서자 W.G 기사들이 마크를 마차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며칠 전 체포해 올 때와는 달리 정중한 태도였다.
***
“아버지!”
“마크!”
마크가 저택 앞의 마차에서 내리자 아이들과 미아, 그리고 타냐가 달려와 맞이했다.
“세상에! 대체 끌려가서 무슨 짓을 당한 거야!”
마크의 얼굴을 보자 미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기는 했지만 피멍이 든 얼굴과 피딱지가 앉은 입술은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황제 폐하가 그런 거예요?”
“폐하는 얼어 죽을! 황제 그 나쁜 자식!”
제이드의 물음에 폴린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세상 물정을 아는 큰아이는 이 모든 일이 황제의 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황제가 마크를 가두고 아델도 아론도 데려간 것이라고.
“그런데 아델과 아론은?”
마크의 물음에 타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입궁했습니다.”
타냐의 대답만으로는 부족한 걸 느꼈는지 미아가 울분을 토했다.
“아델은 어제 황궁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오늘 아침 사람들이 와서 아론까지 데려갔어.”
타냐는 마크가 오해하지 않도록 얼른 덧붙였다.
“마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지켜야 했으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을 지키다니?”
마크가 의아해하자 타냐가 울먹였다.
“반역자의 집안이라며 불량배들이 가게에서 행패를 부렸어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요. 그때 폐하가 오시지 않았더라면 마님도 아론도 큰 봉변을 당했을 거예요.”
“처음부터 황제가 오라버니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았으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
미아의 말에 제이드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아버지가 누명을 쓴 건 맞지만 누가 꾸민 일인지는 모르잖아요.”
“제이드, 넌 대체 누구 편이야! 아버지가 저렇게 되신 게 억울하지도 않아!”
하지만 폴린의 고함에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마크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제이드 말이 맞다. 누가 꾸민 일인지 밝혀질 때까지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게다가 황제를 비방하는 건 반역 혐의를 받는 우리 집안에 좋을 게 없으니 말조심들 하고. 알았지?”
“예.”
“그럼 난 이만 쉬어야겠다. 다들 볼일들 봐.”
집 안으로 들어가는 마크를 미아가 부축하며 따라왔다.
“어디 크게 상한 데는 없고?”
“응 다행히.”
“정말 속상해. 6년 동안 희생해서 두 사람을 지켜준 대가가 결국 이거라니.”
피딱지가 앉은 마크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미아가 푸념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 아니야. 희생을 한 건 더욱 아니고. 아델과 아론은 6년 동안 내게 선물 같은 사람들이었어. 그동안 즐겁게 받았으니 돌려줘야지.”
“아우 속 터져! 진짜 이 정도면 성인이다, 성인!”
화를 내는 미아를 보며 마크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미아가 더 솔직하고 순수한 걸지도 몰랐다.
그들이 선물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면서도 선물을 빼앗긴 아이처럼 화가 났으니까.
머릿속은 선물을 빼앗아간 사람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이토록 통제 못 하는 감정은 처음이었다.
***
“안녕하세요, 폐하 아저씨.”
마차에서 내리던 아론은 크리스틴을 보자 얼른 배꼽 인사를 했다.
자그마한 아이가 푸른색 연미복에 리본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 모습이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한편으론 몹시 불편하겠구나 싶기도 했다.
“그래, 왔구나, 아론.”
“…….”
하지만 아이는 얼굴이 굳어진 채 눈치만 살폈다.
밤새 심장의 통증으로 잠을 설친 크리스틴은 새벽같이 사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그의 뒤로 늑대 일족인 바울로와 W.G 기사단원 십여 명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찬 칼과 피 냄새로 인해 아이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다들 물러가라.”
크리스틴의 명령에 모두 물러났다.
동시에 그는 금방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아침 일찍 오느라 고생했겠구나.”
아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래? 부지런하구나.”
그러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야…… 아빠를 풀어달라고 빨리 말할 수 있으니까요.”
크리스틴의 표정이 서늘해지자 아론은 겁먹은 얼굴로 쭈뼛거렸다.
“우리 아빠…… 살려주실 거죠?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왜? 내가 너랑 똑같은 눈 색깔을 갖고 있어서?”
아이는 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더니 크리스틴과 똑같은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생각해 봤는데 아론은 폐하 아저씨랑 있는 게 좋아요. 엄마가 그러는데 좋은 사람은 주위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대요. 그래서 좋은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많은 거래요. 폐하 아저씨 곁에도 사람들이 많잖아요.”
크리스틴은 어이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건 내가 황제이기 때문이지. 너처럼 부탁하거나 바라는 게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니까.”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받아서일까? 아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아론은 부탁할 게 없어도 아저씨랑 있는 거 좋아요. 아저씨랑 있으면 아빠랑 낚시가기 전날 밤 같은 기분이 되니까.”
“낚시가기 전날 밤 같은 기분?”
“음…… 내일 무슨 물고기를 잡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이 안 오는 것 같은 기분이요.”
크리스틴은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이 아이랑 같이 있으면 묘하게 설레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은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그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려고 일부러 쭈그려 앉았다.
“아빠는…… 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거다, 아론.”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우와! 진짜요?”
그러더니 두 팔을 벌려 크리스틴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거봐, 아론이 뭐랬어요. 아저씨 좋은 사람 맞잖아요! 아저씨가 아빠를 아프게 했으면 많이 슬펐을 거예요.”
그 작고 가냘픈 팔과 아이에게서 풍기는 달큼하고 보드라운 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크리스틴은 견딜 수 없이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하게 아려오는…….
빌어먹을!
바보 머저리 같은 짓을 해서라도 기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또 한 명 생긴 것이다. 평생 아델 한 명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 작은 손을, 이토록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론!”
그때 아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얼른 팔을 풀더니 아델을 향해 와다다 달려갔다.
“엄마!”
조금 전까지 느꼈던 따뜻함 때문일까? 아이가 사라지고 난 서늘함이 뼛속까지 시리게 느껴졌다.
크리스틴은 몸을 일으켜 아델 모자에게 다가갔다.
“캐슬러는 집으로 보냈어.”
“거봐 엄마, 내가 뭐랬어! 폐하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랬지?”
아델은 그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감사드립니다, 폐하.”
“어젯밤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나?”
“덕분에 편안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크리스틴은 왠지 모를 심술이 났다. 아델은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아론을 치마폭 뒤로 감추고 있었으니까.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오늘은 아닐지도 모르지.”
“……!”
“사냥을 다녀온 뒤라 몸이 뜨겁거든.”
긴장한 그녀의 표정을 외면하며 크리스틴은 아론에게 지나칠 정도로 상냥하게 웃었다.
“아론, 아빠랑 낚시를 못 갔으니 아저씨가 낚시에 데려가 줄까?”
“…….”
하지만 아이는 흘끔 엄마의 눈치를 볼 뿐 대답이 없었다.
“그대의 허락이 필요한가 보군.”
아델은 작게 한숨을 쉬며 아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으면 가도 돼, 아론.”
아이는 그래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최대한 나긋하게 물었다.
“왜 아빠가 아니면 싫어?”
“아뇨. 그건 아닌데…… 아빠랑 먼저 약속했으니까.”
“그래, 낚시는 아빠랑 먼저 가야겠구나. 폐하 아저씨가 미처 그걸 생각 못 했다.”
아론은 그를 실망시킨 게 미안한지 조금 고민하다가 반짝 웃었다.
“그럼 아빠랑 낚시갈 때 아저씨도 올래요?”
“고맙지만 사양하마.”
단호한 대답에 아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론이랑 둘만 가고 싶어요?”
“뭐?”
“그럼 아빠한테 허락받으면 갈게요. 아빠는 형들도 있는데 아저씨는 없으니까.”
크리스틴은 기가 막혔다.
“설마 지금 내가 동정을 받는 건가?”
아론이 씩 웃었다.
“아론이 놀아줄 테니까 화내지 마세요.”
“그래, 아.주. 신나는구나.”
정말이지 이 작은 생명체는 그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그 뒤에 아델이 말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크리스틴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은 가족 같은 모양새는 갖춰진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