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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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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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일.
2023.05.05.
“아주 행복해 보이네.”
이자벨은 낮고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황후궁의 응접실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봄빛이 내려앉은 창밖으로 크리스틴과 아델, 그리고 아론이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나름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단란한 가족의 한때 같았다.
“그러게요. 망가뜨려 버리고 싶을 정도네요.”
맞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자벨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앞에는 아름다운 금발 머리 미인이 앉아 있었다. 예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던 이자벨은 매우 수수한 차림이라고 생각했다. 실크 드레스를 입지도, 화려한 장신구 걸치지도 않았으니까.
이자벨은 찻잔을 내리며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나를 떠보는 건가요?, 세이라 양.”
스톤이 늑대 일족인 게 발각되자 귀족회에선 재빨리 오스월드가를 제명해 버렸다. 그 후 전쟁이 지속 되면서 귀족회의 외면을 당한 후작가는 재산과 작위마저 모두 빼앗겼다.
그리고 세이라에 대해선 소문만 무성했다. 어느 귀족가의 정부가 되었다거나, 사제가 되었다거나, 매음굴에서 몸을 팔더란 얘기도 있었다.
하나같이 사나운 소문이었는데, 지금 세이라를 보면 그동안 평탄하게 살지는 못한 게 분명했다.
“설마 오페라 극장에서의 일로 겁을 먹으신 건가 해서 찾아왔어요.”
오페라 극장 앞에서 크리스틴이 습격을 받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오페라 극장에서는 너무 급했어요. 그렇게 무모하게…….”
“사흘이나 사경을 헤맸다던 황제가 그리 멀쩡한 줄은 몰랐죠. 정말 짐승이라고 할 수밖에요.”
이자벨은 코웃음을 쳤다.
“황제가 사경을 헤맸다는 건 그냥 헛소문이었겠죠.”
“마블궁의 경비를 서던 기사에게 들었는데도요?”
이자벨이 멈칫하자 세이라가 혀를 찼다.
“쯧, 같은 궁 안에 계시면서 이렇게 소식이 어두워서야. 사흘 동안 황제의 침실로 해열제와 진통제가 끊임없이 들어갔다더군요.”
“황제 곁엔 레아나라는 최고의 마법사가 있는데 어째서?”
“글쎄요, 어째서일까요?”
이자벨은 차를 음미하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아나가 치유 마법을 쓸 수 없게 됐거나, 쓰지 못하는 병인 건가?’
잘만하면 아델보다 더 강한 황제의 약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지금도 아델의 주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기사들을 배치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러니 당분간 그녀를 이용해 크리스틴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할 터.
더한 약점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어쨌건 황제에게 전서구를 들켜버렸어요. 당분간 연락은 끊는 게 좋겠네요. 여기 오는 것도 삼가고요.”
세이라가 도도한 표정으로 이자벨을 응시했다.
“연락할지, 말지는 우리 쪽에서 판단합니다. 이자벨 님께선 모리스 사제를 도우시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사실 그동안 세이라는 모리스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교황청의 힘을 등에 업고 몰락한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교황청이 크리스틴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모리스가 반란 사제로 낙인찍히면서 그녀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이자벨이 차갑게 웃었다.
“모리스 사제도, 그의 정부도, 이제 큰소리칠 처지가 아닐 텐데요.”
“뭐라고요?”
“뭐 하나요? 용건 끝났으면 이제 나가지 않고?”
차갑게 축객령을 내린 이자벨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론을 말에 태우고 있는 크리스틴이 보였다. 멀어서 그의 표정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햇살 때문인지 환하게 웃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아델이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건 누가 보아도 아버지와 아들인데?’
이제 보니 아델의 아이는 머리 색깔만 빼고 크리스틴과 쏙 빼닮지 않았던가.
‘설마 아델은 크리스틴의 아이를 캐슬러의 아이라며 키워온 걸까?’
캐슬러도 알고 있었을까?
아니,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무슨 생각이 들까?
듣자 하니 며칠 전엔 반란 혐의로 잡혀 왔다던데.
아내와 아이를 빼앗기고 반역자라는 누명까지 썼다면…….
“설마 모리스 사제가 일부러 캐슬러에게 접근한 건가요?”
문을 열고 나가려던 세이라가 빙긋 웃었다.
“때론 수백만의 군대보다 한 방울의 독약이 더 치명적일지도 모르니까요.”
그 순간 이자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방법은 마음에 드는군요.”
***
“엄마!”
크리스틴과 함께 말 위에 올라탄 아론은 아델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론, 조심해!”
아델은 조마조마해서 소리쳤다. 커다란 말 위에서 아이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뚝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괜찮아. 아저씨가 있잖아.”
하지만 아이는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감을 담은 눈빛으로 웃었다.
“움직일 테니 꽉 잡아라!”
고삐를 부드럽게 흔들며 크리스틴이 말의 옆구리를 툭 찼다.
“와! 달려요!”
햇살 아래 신이 난 아이의 투명한 얼굴이 눈부시게 빛났다. 아론을 앞에 태우며 달리는 크리스틴을 보고 있으려니 둘이 너무 잘 어울려서 아델은 눈가가 시큰해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바랐던 일이던가?
그와 그의 아이가 저토록 행복하게 어울리는 장면을.
“행복한 얼굴이시네요.”
돌아보자 레아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드레스가 아닌 몸에 달라붙는 레깅스 팬츠에 부츠를 신었다. 재킷과 어깨에 케이프까지 두른 걸 보니 어디 멀리 가려는 모양이었다. 신비로운 은색 머리카락도 하나로 높이 올려 묶었는데 아직도 앳된 얼굴이 남아 있었다.
아델은 소녀 시절의 레아나가 떠올랐다. 그때는 되바라지긴 했지만 귀여웠는데.
“어디 멀리 외출하는 거야?”
레아나는 당당하고 오만하게 대답했다.
“반란 사제들을 잡으러 가요. 그래야 캐슬러 백작도 완전히 혐의를 벗을 수 있겠죠.”
“역시 폐하가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었구나?”
“실망이네요. 아델까지 그분을 의심했다니.”
하기야 예전의 크리스틴이라면 절대로 그런 비열한 방법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네. 그동안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나 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그게 무슨 뜻?”
“……편지 일은 죄송했어요. 사실 계속 사과하고 싶었는데.”
“지난 일이지만 사과해줘서 고마워.”
아델의 말에 레아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요. 아델 말이 맞았어요. 편지를 감춘 건 폐하의 결정을 돕기 위해서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요. 가뜩이나 그분 머릿속엔 아델로 가득한데 아이까지 생긴 걸 알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겨우 얻은 내 가족이었는데 버림받을 것 같았거든요.”
“사과하면서 변명이 많네, 레아나.”
아델이 살짝 놀리자 레아나가 귀엽게 입을 삐죽거렸다.
“치, 그만큼 폐하에게는 아델뿐이었다는 얘기예요. 6년이란 시간이 아무리 길었어도 늘 한결같이. 내가 아무리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하며 덤벼들어도 도저히 싸움이 안 됐다는 거죠.”
“그게 무슨…… 뜻?”
레아나는 쭈뼛거리며 고백했다.
“사실 폐하에게 입 맞추려고 했어요. 그런데 놀림만 당했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창피해서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찬다니까요.”
“진짜 민망했겠다.”
“확인사살 하지 말아줄래요?”
발끈하는 레아나를 보며 아델이 쿡쿡 웃었다. 그러다 다시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도 때때로 친절하다가 차갑게 돌변하는걸.”
시무룩해진 아델에게 레아나가 짓궂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음, 두 분 아직 아무 일도 없었군요.”
“그걸 어떻게……?”
아델의 순진한 반응에 레아나가 까르르 웃었다.
“소문엔 어젯밤 아델이 폐하의 후계자를 임신했을 거라던데 아닌가 보네요.”
아델은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다.
“그동안 야하고 성격 나쁜 어른이 됐네, 레아나.”
“진짜 아쉽네. 폐하의 몸을 보셨다면 진심을 어느 정도는 아셨을 텐데.”
“그의 몸을 보다니? 그걸 보고 뭘 알 수 있다는 거지?”
점점 더 뜻 모를 소리에 아델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성격 나쁜 레아나는 더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배 아파서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진짜 성격 나빠졌어.”
“궁금하면 폐하를 벗겨보시던가요.”
“숙녀가 그런 야한 말을!”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결정하세요. 캐슬러 백작을 택할지, 폐하를 택할지. 그게 모두를 덜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그래야겠지.”
아델은 황궁 정원에서 천천히 말을 달리고 있는 크리스틴 부자를 바라보았다.
다정하게 아론을 보듬고 웃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피의 황제라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그저 아이를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
오랫동안 아델이 꿈꿔오던 그림.
어쩌면 그는 처음 아론과 만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아이라는 걸 알았을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조차 계속 그의 얘기만 했었으니까.
마크에겐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크리스틴의 곁이었다.
“그럼 전 이만.”
마음의 짐을 털어낸 레아나가 후련한 표정으로 돌아설 때였다.
“저기, 레아나!”
아델이 망설이다 그녀를 불렀다.
“돌아오면…… 애플파이를 같이 먹자. 맛있게 구워놓고 기다릴게.”
“핫! 정말요?”
아이처럼 레아나의 표정이 금방 환해졌다. 이럴 때는 꼭 아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리고 그동안 그를 지켜줘서 고마워.”
크리스틴이 지금껏 무사했던 건 그녀의 도움이 컸을 테니까.
“맞아요. 그건 고맙단 말을 들을 만해요. 그 천방지축인 분을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천방지축이라니, 누가?”
아론을 태운 크리스틴이 어느새 말을 몰아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야 지금 찔리는 사람이겠죠.”
쾌활하게 대답하며 레아나는 아론에게도 아는 체를 했다.
“네가 아론이구나?”
“네! 저는 아론 캐슬러예요.”
“난 레아나. 세계 최강의 마법사지.”
“와, 진짜 마법사예요? 불도 막 나오게 할 수 있어요?”
“그럼. 마음만 먹으면 여기도 전부 불바다로 만들 수 있어. 보여줄까?”
레아나가 사악하게 눈을 빛내자 아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요. 불장난하면 오줌싸요!”
“뭐?”
다들 황당해서 웃는데 아론만 진지한 표정으로 레아나를 응시했다.
“근데 마법사 누나도 나랑 눈 색깔이 똑같네요.”
“그러게. 피는 못 속이나 보다.”
“피가 속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레아나는 크리스틴과 아델을 한번 쓱 돌아보더니 쾌활하게 대답했다.
“너 같은 꽃미남이랑 똑같다니 기분 좋다는 뜻. 그럼 나중에 보자, 꼬맹이.”
레아나는 손을 쭉 뻗어 아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크리스틴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보았는지.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것도 있었다. 아델과 아론에게 크리스틴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고.
이렇게 함께 어울려서 가족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돌아오면 다 함께 모여 앉아 아델이 구운 파이를 먹어야겠다.
그 옛날 그녀가 가장 행복했을 때처럼.
진짜 가족들과 함께.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일이었다.
***
하루종일 말과 씨름을 하느라 아론은 피곤했나 보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꾸벅꾸벅 졸더니 식사가 끝날 무렵엔 그대로 식탁 위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아론을 재운 아델이 복도로 나오는데 마릴라가 다가왔다.
“캐슬러 가에서 온 편지입니다.”
아델은 얼른 서신을 받아들었다.
오늘 아침 마크가 풀려나 집에 돌아갔다는 얘기를 듣고 타냐에게 편지를 썼다. 마크는 괜찮은지,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제 제대로 얘기도 못 하고 나왔으니까. 그러나 저녁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서 궁금해하던 중이었다.
서둘러 편지를 열어보던 아델은 멈칫했다.
그건 타냐가 아닌 미아에게서 온 편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