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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기억났어.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132/155)


132화. 기억났어.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2023.05.08.


[친애하는 나의 벗, 아델에게.

마크 오라버니는 다행히 오늘 아침에 돌아왔어.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몸이 많이 상했고, 얼굴도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어.

내 사랑하는 친구는 지금쯤 그리워하던 연인을 만나 행복할 텐데, 그들을 도운 죄로 내 오라버니는 이런 꼴을 당했지.

게다가 반역자라는 오명으로 아이들도 숨죽여 지내는 중이고.

네가 조금이라도 마크와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네 연인에게 부탁해줘.

반역자라는 잔인한 오명에서만은 자유롭게 해달라고.

내 조국 칼라임을 짓밟은 것처럼 그들을 짓밟지 말아 달라고.

제발.

아델, 난 여전히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조금 밉다.

속이 좁은 날 이해해줘.

미아 보니타.]

편지를 다 읽은 아델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오늘 하루 크리스틴과 아론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던 그 시간에 마크와 아이들은 이런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크가 고문까지 당했다니.

아델은 크리스틴을 만나러 마블궁의 정원으로 달려나갔다. 어둠이 내려앉는 정원 끝에서 짐머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폐하는 어디 계시죠?”

“귀족들과 회의가 끝났으니 곧 오실 겁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크에게 좀 가봤으면 해요. 크라이튼 경이 얘기 좀 해주시겠어요?”

짐머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아델이 마크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면 크리스틴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갔으니까.

아무리 그를 오래 모셨던 짐머지만 그럴 때는 간이 졸아드는 기분이었다.


“그건 직접 말씀하시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델은 예전보다 더 심술궂고 매정해진 그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허락해주시지 않을 것 같아요.”

“여백작 님의 청이라면 아무리 폐하라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물론 그분의 질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겠지만.”

“질투라고요? 설마요.”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폐하가 캐슬러 백작 얘기만 나오면 얼마나 예민해지시는지.”

“그래서 그를 붙잡아 고문한 건가요?”

고문이라는 말에 짐머는 움찔했다.


“고문은…… 폐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뭘 모르는 병사들이 실수로.”

“실수는 발을 밟거나 어깨를 부딪쳤을 때나 하는 말이죠. 사람을 그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 실수라니요!”

“그래, 고의였어.”

그때 들려온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짐머는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 대목에 나타나 그렇게 말하면 싸우자는 것밖에 더 될까?

다른 건 다 현명하고 합리적인 크리스틴이 아델 문제만큼은 왜 이리 고집불통 어린아이처럼 변하는지 몰랐다.

도대체 잘 해 볼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것인지.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이 끼어들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짐머는 조용히 물러나기로 했다.

사랑싸움에 끼어들면 잘해야 본전인 것이다.


“당신 정말 어디까지 날 실망하게 할 거죠?”

그 말에 크리스틴이 서늘하게 비웃었다.


“그는 반란 혐의로 잡혀 왔고, 자백받기 위해 심문하는 건 당연한 절차야. 안 그러면 내가 이 칼라임에서 비명횡사를 할 수 있거든. 그런데도 난 그대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혐의가 있는 반역자를 풀어주는 위험까지 감수했지. 어느 대목에서 그대에게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군.”

“마크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빌어먹을! 그자는 잘도 믿지!

그녀가 마크의 얘기만 꺼내면 크리스틴은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층 차가워졌다.


“아델, 그대는 지금 몸을 씻고 침실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약속을 지켰으니 당신도 지켜야 할 약속이 있을 텐데?”

아델은 크리스틴의 차가운 말과 눈빛에 모멸감을 느꼈다. 이럴 때의 그는 일부러 그녀를 상처 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마치 증오하는 사람처럼.

이것도 설마 마크를 질투해서라고?


“좋아요. 오늘 밤 약속을 지키면 내일은 아이들을 보러 가게 해주세요.”

“당신의 아이는 여기 있을 텐데.”

“캐슬러 가에 있는 아이들도 내 아이예요.”

“아, 당신이 낳지 않은 그 아이들.”

그의 비아냥에 아델은 울컥해서 노려보았다.


“6년 동안 당신이 일족을 위해 싸웠던 것처럼, 난 그 아이들의 엄마로 살기 위해 애썼어요. 내 소중한 아이들을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그래, 그 소중한 아이들과 그 아버지를 위해 당신은 오늘 밤 나와의 약속을 충실 이행하면 돼.”

 

***

탁!

침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아델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묵직한 발소리에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옷은 내가 벗겠어요.”

그의 손길을 거부하겠다는 뜻.


“그건 곤란해…….”

성큼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아델이 물러났지만, 크리스틴이 왼팔을 휘감아 허리를 끌어당긴 것이 더 빨랐다.


“시작도 끝도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그는 다른 손으로 아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등 뒤로 손을 뻗어 드레스의 훅을 풀어 내려갔다.

툭, 툭…….

훅이 하나씩 풀릴 때마다 상체를 조이던 드레스가 느슨해졌다.

아델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노려보았지만,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며 긴장한 걸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긴장을 감추려고 애를 쓸수록 심장이 빨리 뛰며 숨을 쉬기가 불편해지는 것 같았다.

감각이 발달한 크리스틴이 눈치챘을 것만 같아서 더 미칠 노릇이었다.

긴장하지 말자, 아델. 긴장 풀어!

그러는 동안 그는 드레스를 어깨에서 살며시 끌어 내리더니 하얗게 드러난 살결에 입을 맞췄다.

초옥.


“……!”

아델은 저도 모르게 그의 팔뚝을 움켜쥐며 움찔했다.

크리스틴이 눈을 들어 쳐다보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귀밑까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벌써 흥분한 건가?”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나른하게 들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아델이 발끈하자 그는 눈짓으로 자신의 팔뚝을 가리켰다.


“내 팔뚝을 너무 꽉 쥐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놀란 아델이 얼른 그의 팔에서 손을 떼어내자, 그가 아델의 몸을 돌려세워 거울을 바라보게 했다.


“이 얼굴을 그럼 뭐라고 설명할까?”

“놔줘요.”

아델은 저항했지만 그에게서 놓여날 수 없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탄탄한 가슴이 마치 단단한 장벽처럼 느껴졌다.


“잘 봐, 아델. 네가 이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뒤에 있던 그는 아델의 몸에 걸쳐진 옷가지들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그 순간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



“이건 뭐지?”

그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건 아델이었다. 그는 아델의 등에 있는 문신을 보고 놀란 게 분명했다.


“설마 그것도 잊은 건가요?”

흠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위에는 그의 이름이 날개처럼 뒤덮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소유물이라고 새겨 놓은 낙인처럼.


“젠장…… 내…… 짓인가?”

자책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델은 씁쓸해졌다. 그는 이 문신에 관한 일까지 다 잊었구나. 그러니 자신이 알던 크리스와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

함께 공유했던 많은 기억이 사라져 버린 그는 단지 바하마르트의 황제일 뿐인 건가?


“이제 알겠군. 왜 내가 아닌 캐슬러를 택했는지. 이런 끔찍한 짓을 여인에게 잘도…….”

거울 속에 비치는 크리스틴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녀에게 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이럴 때의 그는 아델의 크리스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못 될까봐 안절부절못하던 그녀의 연인.

아직은 뒤틀린 관계를 바로잡을 희망이 있는 걸지도.


“내가 한 거예요.”

아델은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 스스로 왜 이런 짓을?”

“스톤이란 자가 내 몸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거든요. 가운데 두 개의 머리글자. 내가 그걸 당신의 이름으로 덮은 거예요.”

“그래도 몸에 이런 걸 새길 생각을 하다니.”

“당신이 말해줬어요. 전쟁터의 병사들이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몸에 새기는지. 나도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아아……!”

“그리고 난…… 이렇게라도 당신의 일부와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 6년 동안…….”

그녀를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가 깊은 수면의 파동처럼 흔들렸다.


“이제 알 것 같군. 내가 왜 그때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런 선택이라니, 무슨 뜻이죠?”

“봉인 의식 직전에 나도 당신의 일부를 가졌거든.”

그가 자신의 몸에 아델의 이름을 새긴 것도 같은 행위였던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던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


“내 일부를요?”

대답하는 대신 그는 아델의 등에 새겨진 글자들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지금 막 생겨난 상처를 만지듯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아팠을 텐데.”

“생각보다 꽤 아팠죠. 그런데 이 문신을 새기던 날, 옆에 있던 당신이 나보다 더 아파하는 바람에 아픈 티를 못 냈었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델이 조금 엷게 웃었다.

전쟁터의 영웅이라는 남자가 바늘이 그녀의 살갗을 찌를 때마다 옆에서 신음을 흘리며 어찌나 아파하던지.


“기억나는 것도 같아…….”

크리스틴은 인상을 쓰며 제 왼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래요. 우리는 그토록 사랑했었어요. 그 사랑 속에서 생겨난 아이가 아론이었고요.”

“그래. 늑대 일족의 아이는 원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아이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던 것 같아.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는 녀석이 태어났더군.”

아론을 떠올리며 웃는 크리스틴의 모습에 아델은 울컥해졌다.

이건 오래전 그녀가 알았던 크리스의 얼굴이었다.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그가 아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은 이 순간 심장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미치도록 애를 쓰고 있었다.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긴 했지만 늘 덜 맞춰진 퍼즐 조각처럼 애매하던 그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많은 조각이 쏟아져나와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것만 같았다.

이 방 안에서 그녀와 나눴던 많은 일이 기억났다. 수많은 사랑의 밀어와 맹세와 행복했던 웃음소리.

기억 속에 흐릿하던 아델의 표정조차 이제는 모두 떠올랐다.

항상 자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던 저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자신을 얼마나 충만하게 만들었던가?

하지만 그 기억의 대가로 그만큼의 고통이 따라왔다.


“내일 마크에게 다녀오도록 해. 정리할 시간을 주지.”

심장의 고통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아델을 뒤로하고 서둘러 침실을 나왔다.

***



“으으윽!”

복도로 나와 모퉁이를 돌자마자 크리스틴은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폐하!”

놀란 짐머가 달려왔다. 하지만 그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기억났다, 짐머.”

“뭐가 말씀입니까?”

“내가,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모두 다 기억났어.”

짐머는 어이가 없었다.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로 그의 셔츠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는데도 그는 웃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이렇게 좋아하니 축하해 줄 수밖에.


“경하드립니다, 폐…… 폐하!”

“케니에게 마법으로 아델과 아론을 깊이 재우라고 해. 그리고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모두 마블궁에서 물리도록.”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오늘 밤 폭주하게 될지도 모르거든.”

그 말과 함께 크리스틴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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