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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위험한 제의 (133/155)


133화. 위험한 제의
2023.05.12.


다음 날 아침.

맑은 아침 햇살이 흘러드는 침실의 광경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침대와 가구들은 여기저기 부서져서 잔해들이 나뒹굴었고, 벽과 바닥은 다섯 개의 발톱에 푹 패인 자국이 선명했다. 캐노피에 달린 커튼과 침대 시트도 갈기갈기 찢겨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 한가운데 알몸의 크리스틴이 탈진한 채 쓰러져 있었다. 양팔이 쇠사슬로 침대 기둥에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마저 물린 채였다.

두꺼운 가죽 재갈은 너덜너덜했고, 바위처럼 단단한 피부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가득한 걸 보면 지난밤 몸부림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주위에는 피 묻은 수건과 각종 약병도 나뒹굴었다.

마치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죽어가는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폐하를 뵐 수 있을까요?”

죽은 사람처럼 늘어져 있던 크리스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바로 문 뒤에서 들려오는 아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아직 주무시는 중입니다.”

“이 시간까지요? 어디 아프시기라도 한 건가요?”

“아닙니다. 밤새 집무실에 계시다가 조금 전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렇군요. 캐슬러 백작에게 다녀오려고 하는데…….”

“이미 전달받고 마릴라 부인에게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염려 말고 다녀오십시오.”

“고마워요. 폐하께 대신 말씀 전해주세요.”

“염려 마십시오.”

어젯밤 아델과 헤어진 크리스틴은 극심한 심장의 고통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 늑대로 각성하던 그 날처럼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고통의 크기만큼 살육의 본능도 커졌다. 누군가를 해치지 않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짐머에게 자신의 몸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리라고 지시했다. 진통제와 진정제도 죽지 않을 만큼 복용했다.

그러고도 몇 번을 혼절했다가 깨어나서 몸부림쳤는지 몰랐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에서야 겨우 통증이 조금씩 잦아들며 차츰 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다행히 아델과 아론은 아침까지 깊이 재우도록 마법을 쓴 덕에 아무것도 몰랐다.


 
달칵!

문이 열리며 그의 침실로 들어오던 짐머는 크리스틴이 눈을 뜬 걸 알아차렸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폐하?”

그러나 함부로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어젯밤 은빛 늑대로 변해서 무섭게 달려들려던 모습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열쇠를 갖고 와서 재갈과 결박을 풀었다.


“빌어먹게 좋은 아침이군.”

크리스틴은 살갗이 벗겨지고 피멍이 든 팔목을 매만지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짐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는 동안에도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직은. 그래도 변이를 통제할 정도의 이성은 돌아왔어.”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번엔 진짜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레아나 양도 없는데 잘못되실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그제야 짐머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울먹였다. 밤새 크리스틴의 곁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그는 하루 만에 두 눈이 퀭해져 있었다.


“고생했다. 그런데 레아나는 아직인가?”

“닉서스 다리 근처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모리스 일행을 바싹 추격 중이랍니다.”

“마지막 보고가 들어온 시각은?”

“폐하께서 쓰러지시기 직전입니다.”

“하룻밤이 지났군.”

“다른 사람도 아닌 대마법사 레아나 양입니다. 폐하 걱정부터 하십시오.”

짐머는 안쓰러워서 혀를 찼다. 크리스틴의 미끈한 육체는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고, 메마른 입술은 말을 할 때마다 갈라지며 피가 베어 나왔다.


“모리스는 생각보다 교활한 자야.”

“예, 다시 상황을 알아보고 보고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델은…… 돌아간 건가?”

“조금 전 마릴라 부인이 모시고 갔습니다. 당부하신 대로 최정예 기사단에게 호위를 맡겼으니 염려 마십시오.”

“음.”

크리스틴은 가슴을 움켜쥐며 스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돌아올 거라고 믿으면서도, 한 편으론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제는 그녀와의 기억이 모두 돌아온 것이다. 그토록 소중한 사람을 겨우 다 기억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없으면…….

그 마음을 읽어낸 짐머가 웃으며 속삭였다.


“그런데 아론은 지금 마블궁에 있습니다.”

아론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함께 간 게 아니었나?”

“폐하의 말동무를 해드리라며 남겨두고 갔습니다.”

자신의 속내를 너무 투명하게 들킨 게 민망했는지 그는 괜히 시치미를 뗐다.


“말동무가 필요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 아론도 캐슬러 가로 돌려보낼까요?”

능구렁이 같은 짐머의 물음에 크리스틴은 인상을 썼다.


“됐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시종이 고했다.


“폐하, 아론 캐슬러가 뵙기를 청합니다.”

크리스틴은 얼른 옷을 달라고 손짓하며 문밖에 명했다.


“잠시 기다리도록 하라!”

“폐하, 아직 아론을 만나시기엔…….”

짐머의 우려에도 그는 단호했다.


“충분히 회복됐다.”

재차 옷을 달라고 손짓하는 그에게 짐머는 하는 수 없이 옷을 가져와 입혀주었다. 그러나 팬츠와 셔츠 등 간편한 옷차림을 갖추는 동안에도 크리스틴은 이따금 멈칫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얼굴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주며 짐머가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염려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 일족의 회복력을 우습게 보지 마라.”

 

잠시 후 짐머는 크리스틴을 부축해서 문을 열고 나갔다.

문 앞에 사람들과 함께 서 있던 아론이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쪼르르 뛰어왔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짐머의 팔을 풀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폐하!”

배꼽 인사를 하는 아론을 보자 크리스틴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었다.


“음, 그래. 너도 잘 잤니?”

“네! 아론은 아까아까 일어났어요. 근데 엄마가 폐하랑 같이 아침을 먹으라고 해서 기다렸어요.”

“배가 많이 고프겠구나, 아론.”

“네! 엄청엄청요.”

“그럼 얼른 식사하러 가자.”

“네, 빨리 가요!”

아론은 앞장서서 뛰어갔다. 그 뒤를 따라가는 크리스틴을 짐머가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지금 그는 혼자서 움직이기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칼라임의 궁 안에서 그가 쇠약한 상태라는 게 알려지는 건 위험했다. 게다가 레아나도 자리를 비운 상황.

그런 상황을 모르는 아론은 저만치 달려가다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근데 폐하, 아침 먹고 뭐 할 거예요?”

“글쎄, 너는 뭘 할 생각이지?”

“말 타고 싶어요! 혼자요. 아니, 폐하랑 같이 타는데 혼자 타는 거요.”

아론의 말뜻을 이해한 크리스틴이 웃었다.


“그럼 각자 말을 타고 함께 산책할까?”

“네, 따로따로 같이 산책이요.”

크리스틴을 뒤따라오던 짐머가 결국 작게 속삭였다.


“아직 말을 타시는 건 무립니다, 폐하.”

하지만 그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론에게 제안했다.


“좋아, 아론. 아침을 다 먹으면 말을 타고 산책하자. 그다음 또 뭘 하고 싶지?”

“검술 대련이요! 폐하가 제이드 형보다 세죠?”

“아마 그럴걸.”

“와!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신나서 들떠 있는 아론을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워서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는데도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짐머는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알 것 같았으니까.

***



“아델 마님!”

아델이 마차에서 내리자 타냐가 반갑게 달려왔다.


“마크는? 고문을 당했다던데 몸은 어때? 치료는 받은 거야?”

잔뜩 걱정하며 묻는 아델에게 타냐가 웃어 보였다.


“아유,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거 없어요. 보니타 부인이 괜히 욱한 마음에 마님께 편지를 쓴 거예요.”

하지만 아델은 여전히 걱정을 지우지 못한 얼굴이었다.


“내 눈으로 좀 봐야겠어.”

“지금 안 계세요.”

저택으로 들어가던 아델이 멈칫했다.


“안 계시다고?”

“예, 어젯밤 나가셔서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진료소에는?”

“폴린이 가봤지만 안 계셨대요. 조금 전 제이드가 그러는데 밤에 낚싯대를 가지고 나가시는 걸 봤대요.”

마크는 진료소와 집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외박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정기 진료를 위해 다른 마을에 방문하거나, 낚시하러 갈 때였다. 대부분은 아이들과 동행했지만 가끔은 혼자서도 가곤 했었다.

***

봄볕이 기분 좋게 내려앉은 천변 어귀. 이곳은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찾아오는 낚시터였다.

마크는 종종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낚시와 캠핑을 했다. 가끔 생각할 일이 많을 때면 하염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며칠 전에도 아론과 함께 이곳에서 낚시하자고 약속했었는데…….

이제 다시는 그 아이와 함께할 수 없게 된 건가?


“젠장!”

생각하는 것만으로 울컥해진 마크는 옆에 둔 술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어머, 한 마리도 못 잡았네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술병을 내리며 돌아보았다.

푸른 눈에 눈부신 금발 미인이 양산을 펼쳐 든 채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누구십니까?”

대답 대신 그녀는 마크의 옆에 주저앉아 반짝이는 물을 응시했다.


“좀 화가 나지 않나요? 당신을 실컷 이용하고 그들은 행복해졌는데, 그 대가로 당신이 얻은 건…….”

“당신 뭐요!”

마크가 잔뜩 경계하며 쳐다보자, 여자는 조용히 소리 내어 웃었다.


“그쪽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

“무슨 수작인지 모르지만 돌아가시오.”

마크는 그녀가 안 가면 자신이 가겠다는 듯 주섬주섬 낚시도구들을 정리했다.


“이대로 황제에게 짓밟힌 채 끝낼 건가요?”

“뭐?”

여자는 싸늘한 표정으로 마크를 응시했다.


“황제는 당신뿐 아니라, 곧 당신 가족들도 손댈 거예요. 어떻게든 반역자로 만들어서 캐슬러 가를 쓸어버릴지도 모르죠. 수많은 왕가를 짓밟은 그 자에겐 망설일 필요도 없는 간단한 일이니까요.”

“당신, 누가 보낸 거지?”

“요새 황제가 지내는 마블궁으로 많은 약이 들어간다더군요. 황궁의도 없이 약만 원하는 걸 보면 황제에게 알려져선 곤란한 병이라도 있는 모양이에요.”

“그에겐 마법사들이 있으니 황궁의가 필요 없겠지.”

“약만 원한다는 건 마법사는 치유할 수 없는 상황이란 뜻이죠.”

“그래서?”

“곧 궁에서 사람이 올 거예요. 당신이 황궁의로 일해주면 참 좋겠다고 추천했거든요.”

“나더러 황제에게 독이라도 처방하라는 거요?”

“말귀가 빠르시네요.”

사르르 웃는 여자를 보며 마크는 저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건 너무나 엄청난 얘기였으니까.


“사람 잘못 봤소. 난 생명을 살리는 의사요.”

“이건 당신과 가족들을 살리는 일이에요. 황제를 죽여야만 그들이 살 수 있으니까.”

마크는 괴로운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어쩌면 이 여자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운 건 황제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직 그는 반역 혐의를 다 벗지 못했다.

그건 언제든 다시 잡혀 들어갈 수 있다는 뜻. 황제가 원한다면 아이들이나 미아를 같이 엮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흔들려선 안 된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지? 황제가 그토록 교활하다면 이건 날 진짜 반역자로 만들기 위한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뭐라고요?”

“그쪽은 아직 신원도 밝히지 않았소. 그만큼 떳떳하지 못하다는 증거 아닌가?”

“난, 오스월드가 사람이에요! 당신처럼 아델과 황제를 돕다가 멸문을 당한 가문!”

마크는 눈앞의 여자를 유심히 보았다.

설마 세이라 오스월드?

한때 사교계를 주름잡던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자취를 감춘 채 흉흉한 소문만 무성했다. 그런 세이라가 자신에게 접근해 황제의 암살을 언급하다니.

설마 이 여자는 반란 사제들과 한패인 건가?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소리. 오스월드 가문이 아델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세상이 다 알고 있소. 그리고 당신을 보낸 사람들에게 전하시오. 황제든 반란 사제든 내 식구들을 건드리는 자는 모두 지옥으로 보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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