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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그 아이들의 엄마 (134/155)


134화. 그 아이들의 엄마
2023.05.15.



“와하하, 내가 말을 탄다!”

혼자 말을 몰기 시작하자 아론은 스스로가 신기한지 입이 함박만큼 커졌다. 늑대 일족의 피를 물려받아선지 아이는 놀랍도록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멋지구나, 아론! 하지만 아직 위험하니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크리스틴은 옆으로 바싹 말을 몰아 다가왔다.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 그의 눈엔 아이가 마냥 위태롭고 불안해 보이기만 했다.


“그럼 언제 달려요?”

“벌써 달리고 싶니?”

“네! 그럼 아빠한테 간식을 빨리 갖다 줄 수 있으니까요. 아론은 아빠 간식 담당이에요.”

“그래……?”

“우리 아빠는 엄마가 만들어준 애플파이를 제일 좋아해요. 그래서 엄마는 매일매일 애플파이를 만들어요. 근데 제이드 형은 이제 질렸다고 엘리자에게 몰래 줬어요. 엘리자는 폴린 형 여자 친구예요. 근데 아빠한테 말했더니 모른 척하래요. 폴린 형이랑 제이드 형이 결투하는 건 보고 싶지 않대요.”

그러고도 아론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아이의 얘기 속에는 대부분 아빠가 등장했다. 그 아빠는 당연하게도 크리스틴이 아닌 마크였다.


“아론은 아빠가 좋으니?”

“네, 하지만 폐하도 좋아요.”

“얼마큼?”

참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물었다. 그리고 아론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아빠는 다섯 개 만큼, 폐하는 두 개…… 아니, 세 개 네 개 만큼이요.”

손가락까지 펴 보이며 아이는 제 뜻을 분명하게 전했다.


“고맙구나. 네 개씩이나. 그런데 왜 오늘은 폐하 아저씨라고 안 하지?”

“사람들이 전부 폐하라고 하니까요. 다시 폐하 아저씨라고 할까요?”

크리스틴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았다.


“그보단……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니?”

“안 돼요. 아빠는 한 명이에요!”

아론은 여섯 살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호했다.

그 단호함이 크리스틴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나는 황제고, 황제는 모든 백성의 어버이다. 그러니 아론, 이제 날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그의 목소리가 너무 위압적이었기 때문일까? 아론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싫어요! 아론의 아빠는 집에 있어요. 집에…… 갈래요.”

“당분간은 여기가 네 집이다, 아론.”

아론은 급기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얼른 소매로 쓱 문지르며 그를 나무랐다.


“폐하 아저씨, 이제 보니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 아빠도 잡아가고, 아론도 집에 못 가게 하고! 으흑! 아론은 아빠랑 낚시 가려고 했는데! 엄마…… 보고 싶어. 흐아앙! 엄마…… 엄마!”

아이는 꾸역꾸역 울음을 참다가 엄마라는 말을 내뱉고 나자 감정에 복받쳐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에 겨우 참고 있던 크리스틴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인상을 쓰자 불안하게 지켜보던 짐머가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고통을 참느라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로 그가 겨우 말했다.


“아론을 좀 달래주게.”

그러고는 재빨리 말을 몰아서 산책로를 벗어났다.

***

검술 훈련을 마친 제이드가 저택으로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푹 젖은 제이드에게선 땀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뿐 아니라 아이는 요새 들어 부쩍 키가 컸다. 아직 통통한 볼은 남아 있었지만 이목구비도 뚜렷해지며 한창 성장기의 소년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제이드 혹시 오늘 시간 있니?”

아델이 다가가 물었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목소리까지 변성기 소년 특유의 쉰 소리가 났다.


“간식을 만들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자주 가는 낚시터에 좀 갖다 줬으면 해서.”

“어머니도 같이 가시면 생각해볼게요.”

“그럼 마차는 제가 몰게요!”

어느새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폴린까지 끼어들었다.


“폴린 네가 마차를?”

“염려 마세요. 아버지 몰래 자주 몰아봤어요.”

이제 자신보다 더 키가 커버린 두 아이를 보며 아델은 묘한 감회가 몰려왔다. 평생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일 줄만 알았는데…….


“좋아, 날씨도 좋은데 모처럼 다 같이 피크닉이나 갈까?”

아델의 말에 두 아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럴 때 보면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남아 있기는 했다.

***

집무실의 카우치 소파에 누워있던 크리스틴은 짐머의 발소리를 들었다.


“아론은?”

“엄마를 하도 찾아서 아델 양의 침대에서 재웠습니다. 엄마 냄새가 난다며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냄새에 집착하는 것까지 똑같군.”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겠죠.”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크리스틴은 파리한 입술로 픽 웃고 말았다.

별것 아닌데도 그 아이와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게 묘하게 뿌듯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진통제를 먹었더니 좀 견딜만해.”

크리스틴은 가슴을 움켜쥐며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아직도 창백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게 좋지 않아 보였다.


“레아나 양에게 급히 귀환하라고 할까요?”

“됐다. 그 애의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도 늑대로 변이는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왜? 갑자기 변해서 네놈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것도 겁나지만…… 아론의 앞에서 늑대로 변하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까진 아니니 안심해.”

카우치 소파에서 나온 크리스틴은 아델의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델의 침대 위에는 그녀 대신 그녀와 닮은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울다 잠든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론 사랑스럽고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긴 속눈썹이 가지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발그레 볼을 붉힌 채 잠든 아이는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나왔다. 통통한 볼에 입 맞춰주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야 했다.

이토록 예쁘게 자라는 아이를 혼자 바라보며 아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껏 존재조차 모르다가 이런 보물을 탐내는 자신이 염치없을 정도였다.


“으으응…… 엄마…….”

아이가 뒤척이며 웅얼거리자 크리스틴은 얼른 어깨를 토닥였다. 다시 곤하게 잠든 아이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제가 늑대 일족이라는 사실을 아론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크리스틴은 불안하면서도 궁금했다. 그의 경우엔 너무 끔찍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스스로 죽으려고도 했었다. 알 수 없는 분노로 누구든 물어뜯어 죽여버리고 싶기도 했었고.

그때만 해도 늑대 일족이라는 건 듣도 보도 못했던 괴물이었으니까.

언젠가는 아론도 그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늑대 일족에 대한 인식이 나아졌다고 해도 지금껏 사람으로 알고 자라온 아이에겐 작지 않은 충격이리라. 그때는 곁에서 도울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데려가는 게 맞겠지.’

칼라임 왕실과 전후(戰後) 협상도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으니 되도록 빨리 떠나는 게 좋겠다. 그리고 아델과 아론은 바하마르트의 황실 일가가 되는 절차를 밟을 것이다.

모든 결정을 내린 크리스틴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



“아버지!”

낚시 장비를 챙기던 마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를 든 폴린과 제이드가 보였다. 그 아이들 뒤로 아델의 모습이 보이자 그는 어리둥절했다.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았으니까.


“아델!”

마크에게 다가온 아델은 그의 초췌해진 얼굴을 보더니 울먹이며 꼭 끌어안았다. 그 역시 아무 말 없이 아델을 힘껏 안았다.

눈치 빠른 두 아이는 푸릇푸릇 잔디가 올라오는 바닥에 매트를 깔고 피크닉 바구니를 놓아두었다. 그리고 살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가려는데,


“아야!”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힌 제이드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놀란 아델이 얼른 돌아보았다.


“왜, 다쳤니, 제이드?”

“아뇨,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모처럼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한 게 미안해진 제이드가 손을 내저었지만 아델은 믿지 않았다.


“괜찮긴. 뺨에서 피가 나는데. 눈을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어머니, 이걸 피가 난다고 하기엔…….”

옆에 있던 폴린이 객관적으로 말했다. 나뭇가지에 긁힌 제이드의 뺨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생채기가 난 것뿐이었으니까.


“의사의 전문적인 소견으로 보건데, 그냥 침 바르면 될 상처예요.”

마크까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아델이 발끈했다.


“그게 의사란 사람이 할 소리예요!”

“자, 그럼 처방전 가겠습니다!”

제이드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르려고 하자, 마크는 작은 연고 통을 던져주었다.


“이걸 바르렴. 그러다 덧나면 엄마가 날 얼마나 원망하겠니.”

아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세 남자를 노려보았다.


“지금 다들 날 잔소리꾼 취급하는 건 기분 탓이겠죠?”

“에이, 어머니의 잔소리는 저희의 일용한 양식이죠.”

“맞아요. 어머니의 빵만큼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요.”

폴린과 제이드가 넉살 좋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 이제 다 컸다고 나를 놀린다 이거지?”

아델은 발끈하면서도 웃고 말았다. 아델의 손길이 필요하던 아이들은 이제 능청스럽게 그녀의 비위를 맞출 수 있었다. 어느새 몸만 큰 게 아니라 조금씩 소년에서 사내로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론은……?”

무심결에 묻던 마크는 난처해하는 아델을 보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조금 전 물고기들을 모두 방생해서 손님들을 대접할 게 없는데.”

“그게 아니라 한 마리도 못 잡으신 거 같은데요?”

폴린의 말에 정곡을 찔린 마크가 발끈했다.


“요 녀석! 아버지를 뭐로 보고!”

이번엔 제이드까지 합세했다.


“화내시는 걸 보니까 맞네.”

그러자 아델은 웃으며 피크닉 바구니를 열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럴 줄 알고 도시락을 싸 왔으니까.”

“그럴 줄 알고…… 라고? 아델, 당신이 제일 나빠요!”

곧 네 사람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이었다. 아론이 없다는 걸 다들 애써 모른 척한다는 것만 빼면.

***

아델이 싸 온 간식을 먹고 난 식구들은 각자 따로의 시간을 보냈다.

폴린은 풀밭에 누워 책을 읽었고, 제이드는 낚시를 했다.

그리고 아델과 마크는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천변 가를 거닐었다.

며칠 사이 나무에는 초록 나뭇잎이 돋아났고, 물길을 따라 줄지어 선 벚나무에서도 화사한 꽃이 만발해 있었다. 바람은 서늘했지만, 햇살이 나른한 늦은 오후였다.

아델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몸은 좀 괜찮은가요? 미아의 말로는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던데…….”

다행히 마크는 외관상으론 딱지가 앉은 입술 외에 크게 상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일.


“고문은 과장된 거고 별일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아델은 못 믿겠다는 듯 그를 세심하게 살피다가 아직 피멍이 남아 있는 팔목을 보았다.


“그건 설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마크는 소매로 팔목을 가렸다.

하지만 아델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당신이 이런 고초를 겪는 게 다 나 때문인 거 같아…….”

“당신을 탓하지 말아요, 아델. 누명을 씌운 자를 탓 해야지.”

“그러게요. 절대 용서 못 해요. 하지만 황제가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건 아니었어요. 반란 사제들이 일부러 접근한 걸 거예요. 당신과 나, 그리고 황제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서. 레아나가 그들을 잡아 오면 다 밝혀질 거예요.”

순간 다정하던 마크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이제 보니 황제를 두둔하기 위해 찾아온 거군요.”

아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난 진실을 말하고 싶었던 거뿐이에요.”

“진실은 상관없어요. 내게 중요한 건 당신이 결국 황제에게 가버린다는 사실이니까.”

“마크…….”

마크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는데. 바보같이…….”

“당신에겐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외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네요. 늘 신세만 지고…….”

아델이 먹먹한 얼굴로 응시하자, 마크는 애써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거 알아요? 당신 요즘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거. 내가 말했죠? 미안함 때문에 내 곁에 머무는 건 비참하다고. 그러니 난 상관 말고 황제에게 가요. 그동안 당신과 함께했던 그 시간들…… 그 행복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됐으니까. 나머진 내가 이겨내야 할 몫이겠죠.”

그리고 마크는 돌아섰다.

그래 이걸로 충분했다. 지난 6년 동안은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으니까. 마음은 아니었지만 머리로는 충분하다고 스스로 납득시켰다.

그때였다.


“엄마, 아빠!”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나무 그늘 사이에서 작은 아이가 나타났다. 두 사람을 본 아이는 얼굴 가득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와다다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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