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그들과 함께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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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그들과 함께인 나
2023.05.19.
“엄마, 아빠!”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나무 그늘 사이에서 작은 아이가 나타났다. 두 사람을 본 아이는 얼굴 가득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와다다 달려왔다.
“아론!”
마크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론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까르르 웃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놀라서 묻는 마크에게 아이가 씩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폐하랑 같이요.”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친 마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아론을 바닥에 내려놓고 정중하지만 사무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여기까진 무슨 일로…….”
크리스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좋은 낚시터가 있다고 하기에.”
그러자 아론이 민망한 얼굴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론이 엄마랑 아빠 보고 싶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폐하가 데려다주신 거예요.”
“어디 보고 싶다고만 했을까? 마블궁이 떠나가도록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지.”
“아이, 참……!”
자신의 치부를 일러바치는 크리스틴을 아론이 울상이 되어 쳐다보자,
“아차차! 그 얘긴 하지 않기로 했던가. 크 흠!”
능청스럽게 헛기침을 하는 크리스틴에게 아론이 입을 삐죽거렸다.
“에이, 몰라요! 폐하가 다 망쳤어요!”
“아론, 폐하께 예의를 갖춰서 말하렴.”
옆에서 마크가 나무라자 아론은 조금 풀이 죽었다.
“죄송해요, 아빠.”
하지만 크리스틴은 버릇없는 아론보다 마크의 말에 풀죽은 아론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맘때 아이들이야 다 그렇지. 그보다 고기는 많이 잡았나?”
폴린이 얼른 대답했다.
“엄청나게 잡았는데 조금 전 모두 방생했습니다!”
물론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크리스틴이 아니었다.
“하필, 내가 오기 바로 전에?”
“진짜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게 티가 날 정도로 폴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질 때였다.
아까부터 낚시에 몰입하느라 크리스틴이 온 것도 모르던 제이드가 갑자기 소리쳤다.
“어, 물었다! 아버지 뜰채! 뜰채!”
마크와 폴린이 뜰채를 찾아 허둥거리는 사이, 먼저 뜰채를 발견한 아델이 달려갔다.
“여기 뜰채! 엄마가 도와줄게!”
하지만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의 몸부림이 얼마나 힘차고 빠른지 뜰채로 건져 올리기도 쉽지 않았다. 이러다 낚싯줄만 끊고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제이드, 살짝 힘을 풀었다 챔질을 해라.”
어느새 제이드의 뒤에 온 마크가 낚싯대를 같이 잡아주었고,
“제가 퇴로를 막을게요!”
폴린은 물속에 첨벙첨벙 들어가 손으로 고기를 잡을 기세였다.
“와, 크다 커! 제발 잡혀!”
아론도 그들의 옆에 바싹 붙어서 기원을 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다섯 식구가 다 같이 매달렸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각자 할 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강가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반짝이고 아름다워서 크리스틴은 기분이 묘해졌다. 너무나 견고한 그들만의 세상.
늑대 일족의 세상이 되면 더는 이방인의 비애를 느끼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는 다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그였는데도 고작 저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는 걸로 초라한 기분이 든다는 게 우스웠다.
그러는 동안 커다란 메기는 결국 뭍으로 끌려 나왔다.
“와아! 진짜 크다!”
펄떡이는 물고기를 보며 다들 함성을 지르며 손바닥을 부딪치고 즐거워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모두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그만 가지.”
그 흥겨운 소란을 깨뜨린 것은 크리스틴의 목소리였다.
“에에에? 안 돼요! 이건 꼭 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아론이 놀라서 소리쳤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의 표정이 꽤 위엄있고 단호했기 때문이다.
“아델 당신 생각도 같은가?”
마크와 크리스틴의 눈치를 살핀 아델은 공손히 말했다.
“폐하의 명이라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하지만 한 번쯤은 폐하가 아닌 크리스틴 바이스라는 사람으로서 함께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린힐에서의 마지막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린힐에서의 마지막 추억.
크리스틴의 표정이 금방 부드러워졌다. 그건 아델이 그를 따라 바하마르트로 가겠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래요, 폐하. 제가 잡은 메기를 대접할 기회를 주세요.”
제이드도 아론의 손을 꼭 잡고 간청했다.
그들을 둘러보던 크리스틴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는 오래전 이 아이들과 놀아주던 기억도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마크에게 매달려 웃던 제이드를 보며 그런 생각도 했었다.
나도 저렇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을 데려갈까 봐 울먹이는 아론을 보고 있으려니 더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좋아, 그럼 물고기가 구워질 때까지만.”
“와하! 폐하, 고맙습니다!”
금방 활짝 웃는 아론의 얼굴에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아델보다 더 강적이 될 것 같았다.
***
여섯 토막이 난 메기는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모닥불 위에 먹기 좋게 구워졌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가 퍼져나갈 무렵 다들 약속한 것처럼 불 주위에 모여들었다.
마크는 나무 꼬치에 꿰어진 생선 조각을 한 사람씩 나눠주었다.
이미 냄새로 식욕을 한껏 자극당한 터라, 다들 김이 나는 생선을 정신없이 뜯어 먹기 시작했다.
크리스틴도 예외는 아니었다. 통증으로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 못했던 그는 허기가 절정에 달한 상태였다.
“왜 그렇게 빤히 보지?”
메기의 마지막 살점을 발라먹던 그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힐끔거리며 이상야릇한 눈짓을 주고받는 시선들을 느꼈으니까.
“폐하…… 입가가…….”
아델이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제야 크리스틴은 깨달았다. 자신이 잠시 정신 줄을 놓은 사람처럼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음을!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닦아주오.”
허리를 굽히며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델은 난처한 표정으로 마크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그를 더 심술 나게 만들었다.
“짐의 명령이오.”
그때였다.
“아론도 혼자 하는데.”
“뭐?”
아델의 치마폭에 반쯤 몸을 숨긴 채 아론이 용기 있게 말했다.
“엄마가 자기 일은 스스로 하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아론도 혼자 세수하고 혼자 옷 입는데. 근데…… 폐하는 어른이고 또…… 엄청엄청 잘 싸우는 사람이잖아요.”
“풉!”
결국 제이드와 폴린은 터져 나온 웃음을 참지 못했고, 아델과 마크도 괜히 흘러가는 물살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젠장!
황제의 품위와 체면이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보이지 않아서 그런다.”
그는 감정을 추스르며 침착하게 대답했고,
“아항~!”
아론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얼른 아델의 손수건을 들고 다가왔다.
“폐하는 안 보이니까 아론이 닦아주려고요.”
그러더니 그에게 당당하고 당돌하게 요청했다.
“너무 높으니까 잠깐만 숙여주세요.”
“하! 됐다니까…….”
그러나 아론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마주친 크리스틴은 이번에도 뜻을 꺾고 말았다.
“정말 귀찮은 꼬맹이.”
그는 아론을 안아 올렸다. 그러자 아이는 매우 진지한 얼굴로 그의 입가에 묻은 검댕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마치 고목 나무에 붙은 매미를 형상화한 것 같은 장면이었다.
결국 제이드와 폴린은 배를 움켜쥐며 데굴데굴 굴렀고, 아델과 마크의 어깨도 흐느끼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아론은 매우 진지하게 작업에 임했다. 그러더니 곧 해맑게 웃었다.
“봐요, 이뻐졌잖아요.”
그의 품에 안긴 채 웃는 아이의 미소가 눈부시게 예뻐서 크리스틴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이에게서 풍기는 달짝지근한 냄새는 왜 이리 사람을 벅차게 만드는 건지.
이런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심장의 통증을 밀어내는 기분이었다.
“고맙구나, 아론.”
“죄송했어요. 아까 엄마 보고 싶다고 떼쓰고 운 거…….”
“천만에. 그건 꼬맹이들만 할 수 있는 특권이지.”
그가 바닥에 내려주자 아론은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얼굴로 엄마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제이드와 폴린도 장난스럽게 얼굴을 들이댔다.
“아론, 형들도.”
“싫어! 서로 닦아주면 되잖아!”
“안 닦아주면 간지럽힐 거다, 아론!”
아이들이 아론을 끌어안고 장난을 치자 곧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결에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던 크리스틴은 그 순간 깨달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세상 안으로 들어와 있었음을.
자연스럽게 함께가 되었다는 것도.
“이제 정말 가야겠군.”
“잠시만요, 짐 좀 챙기고.”
아델이 얼른 매트와 피크닉 바구니를 챙기려 하자, 마크가 만류했다.
“됐으니 놔둬요. 내가 챙길게.”
“피크닉 바구니는 제 담당인걸요.”
그녀가 물건 챙기는 걸 바라보며 크리스틴은 마크에게 말했다.
“반란 혐의는 곧 벗게 될 거네. 그리고 그건 내가 만든 함정이 아니었어.”
“…….”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마크도 믿었다. 하지만 그를 믿는다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아델과 아론을 데려가면서 홀가분한 마음까지 갖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고문은 내 수하들의 잘못이 분명하니 사과하지.”
마크는 이걸로도 성에 차지 않았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기는 순간이었으니까.
아델에겐 괜찮다고 의연하게 말해놓고 마음까진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 기분을 짐작했는지 크리스틴이 덧붙였다.
“그거 아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닮고 싶었던 사람이 자네라는 거.”
“저를요?”
“자네가 아이들과 있는 걸 보면 나도 저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하게 돼. 가족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칼만 잘 쓰시는 줄 알았더니 아부하는 재주도 탁월하시군요, 폐하.”
마크의 빈정거림에도 크리스틴은 정중히 머리를 조아렸다.
“지난 6년 아델과 아론을 돌봐준 걸 진심으로 감사하네. 그 빚은 무얼로도 갚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게.”
“됐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캐슬러 자네는 앞으로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한 번은 면죄부를 주지.”
“면죄부라니요?”
“이건 내 약속의 증표네.”
크리스틴은 자신의 칼을 풀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
“창밖의 풍경이 장관이군.”
궁으로 돌아오는 길. 마차의 창밖을 응시하던 아델은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그는 매우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사실 아델은 아까부터 이 시선이 불편해서 마차 밖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그런데 어두운 숲길을 지나느라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럼 계속 생각해. 난 유리창에 비친 그대를 감상하고 있으면 되니까.”
이제 보니 그는 유리에 비친 아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결국 아델은 그를 향해 돌아앉으며 사르르 눈웃음쳤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요염한지…….
“훔쳐보지 말고 제대로 보세요, 폐하.”
아델이 피하지 않고 부담스럽게 쳐다보자 오히려 크리스틴이 민망한 듯 시선을 돌렸다.
“누가 훔쳐봤다고. 보이기에 본 것뿐이야.”
“어머 부끄러워하시는 건가요? 얼굴이 살짝 붉어지신 것도 같고.”
“뭐라?”
발끈하는 그를 보며 아델이 씩 웃었다.
“아시죠? 화내면 진 거.”
“하!”
어이없어하던 크리스틴은 곧 웃고 말았다.
아론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아델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기에 마차 안에는 둘 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왠지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크리스틴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이라면 서로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저…… 그……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거라는 거 알아.”
“그래요. 쉽지는 않았어요.”
“내가 너무 몰아붙였다는 것도 인정해.”
“맞아요. 너무 몰아붙이셨죠. 폭군처럼 이상한 제의도 하셨고요.”
아델의 매몰찬 대답에 크리스틴은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그래서 이 결정을 후회해?”
“후회하죠.”
크리스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얼마나 못된 놈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자 아델이 덧붙였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했을 거예요. 기왕이면 덜 후회하는 쪽을 택하는 게 맞는 거겠죠.”
크리스틴의 표정이 불을 밝힌 것처럼 환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