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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나에 대한 평가는 이 밤이 지나고 (136/155)


136화. 나에 대한 평가는 이 밤이 지나고
2023.05.22.



“그래서 이 결정을 후회해?”

“후회하죠.”

크리스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얼마나 못된 놈이었는지 잘 알았으니까.

그러자 아델이 덧붙였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했을 거예요. 기왕이면 덜 후회하는 쪽을 택하는 게 맞는 거겠죠.”

그의 표정이 불을 밝힌 것처럼 환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신이 후회하지 않게 잘할게.”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행동으로? 아!”

그가 깨달았다는 듯 입술을 들이대자, 아델은 몸을 뒤로 물리며 정색했다.


“아론을 좀 받아달라고요. 다리가 저려서…….”

“아! 그러려고 했어.”

그는 멋쩍은 얼굴로 다시 입술을 원위치시키며 아론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깨지 않게 살살이요.”

“물론이지. 살살.”

그는 온 힘을 다해 아론의 등과 무릎 아래를 받치며 살며시 안아 들었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얼마나 초집중을 했는지 이마에 땀까지 맺힐 정도였다.

다행히 그의 무릎으로 옮겨오는 동안 아이는 깨지 않고 잘도 잤…….


“으응…… 엄마…….”

아론이 뒤척이자 당황한 그는 재빨리 등을 토닥여주었다.

다시 깊이 잠든 아론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소리죽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우…….”

“풋!”

나직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자 아델이 입을 막은 채 웃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보기 좋게 휘어져 있었다.


“뭐가 웃겨?”

그는 아이가 깰까 봐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당신이 정말 아론의 아빠 같아서요.”

“……!”

순간 무언가 쿵 하고 그의 심장을 때린 기분이었다.

마크처럼 완벽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아델과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부러움과 함께 질투를 느꼈던 것 같다.

완벽한 가정의 가장처럼 보이는 그를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아버지가 되는 것은 크리스틴에겐 세계를 제패하는 일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던 것이다.


“더 노력할 거야. 물론 당신에게도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고.”

“믿을게요.”

“고마워. 이런 나를 믿고, 선택해 준 거.”

아델은 그의 눈빛이 며칠 전과 확연히 달라진 걸 느꼈다. 불안정하고 위험한 야수의 느낌이 사라지고 부드럽게 정제된 눈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뭐랄까…… 주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대형견의 느낌이랄까?

이건 그녀가 알던 예전의 크리스였다.


“당신 혹시…… 기억이 다 돌아온 건가요?”

“음, 벚꽃이 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자던 약속도, 장미가 필 때 돌아오겠다던 맹세도. 아델 당신을 내 심장과 맞바꿀 만큼 좋아했다는 것도. 이제 모두…… 기억나.”

아델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을 차올랐다.


“다행이네요.”

“강렬한 애정표현을 해주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크리스틴은 제 무릎을 베고 잠든 아론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러더니 상체를 숙여 아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신 오늘 밤, 기대해도 좋아.”

당황한 아델이 쳐다보자 그가 눈을 찡긋했다. 예전의 능청스럽던 그녀의 크리스, 그대로였다.

***



“폐하, 아론은 저를 주십시오.”

크리스틴이 마차에서 아론을 안고 내리자 짐머가 얼른 따라왔다.

그가 아론과 단둘이 외출하겠다고 해서 최소한의 호위 기사들만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 후회했다. 눈에 띄더라도 자신이 따라갈 것을.

그는 지난밤 끔찍한 고통으로 죽다가 살아난 사람이 아니던가? 아침에도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움직였는데.

아론에게 무리하게 맞춰주다가 쓰러지는 게 아닌지 걱정했던 것이다.


“내가 안고 가지.”

하지만 짐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의 표정은 가볍고 편안해 보였다.

짐머는 그 이유를 곧 깨달았다. 크리스틴의 뒤로 아델이 따라 내렸으니까.


“다녀왔어요, 크라이튼 공작님.”

“아, 예. 두 분이 같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부턴 계속 함께 다닐 거예요.”

아델은 동의를 구하듯 크리스틴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가 환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인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편히 쉬십시오.”

짐머는 그제야 안심하며 물러섰다.

아론을 안고 아델과 함께 걸어가는 크리스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토록 걱정한 게 야속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림처럼 행복해 보이는 그들 모습에 안도가 되었다.

오늘 밤 크리스틴은 덜 걱정해도 될 것 같았다.

아니, 아델을 걱정해야 하는 건가?

***

아델은 화장대의 거울 앞에 앉아 틀어 올린 머리를 풀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차르르 등 위로 떨어지며 희고 갸름한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거울 속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그녀만 나이를 먹은 기분이었으니까.

좀 더 생기있고 예뻐 보이고 싶었다.

마침 화장대에 놓인 립스틱이 눈에 띄었다.

티 나지 않게 조금 발라볼까?

새끼손가락에 살며시 묻혀 입술에 펴 발랐다. 하지만 바른 티가 너무 났다. 오밤중에 입술만 동동 뜬 것 같았다.


“아니, 이건 아니야…….”

손수건으로 닦아내려 할 때였다.

달칵, 침실 문이 열리며 크리스틴이 들어왔다.

그는 낮에 입었던 근엄한 황제의 정복 대신 검은색 셔츠에 팬츠 차림이었다. 몸을 씻었는지 젖은 머리도 이마 위로 흐트러져 내려와 있었다. 이럴 때의 그는 소년의 모습에서 멈춘 것만 같았다.


“오, 오셨어요, 폐하.”

아델은 얼른 화장대 앞에서 일어서며 눈치채지 못하게 립스틱을 닦아냈다.

그러나 어느새 성큼 다가온 그는 아델을 바라보며 엷게 웃었다.


“잘 보이고 싶은 기분 이해해.”

“잘 보이고 싶다니요?”

아델은 절대 인정하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크리스틴은 엄지 안쪽으로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문질렀다.


“무, 무슨 짓……!”

그가 불그스름하게 물든 손가락을 내보이자 아델은 하는 수 없이 인정했다.


“그, 그냥 화장대에 있기에 무슨 색인가 궁금해서요.”

그가 고개를 숙여 아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다고 치지. 하지만 앞으로 둘만 있을 땐 그 궁금증은 자제 해줘. 난 당신 그대로의 모습이 더 흥분되니까.”

야릇한 말과 목소리에 아델은 심장이 좀 더 빨리 뛰었다. 긴장해서 그런 것 같았다. 어쩌면 조금 흥분해서인지도 몰랐고.

이런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살며시 몸을 뒤로 물리며 반격했다.


“그러는 폐하야말로 무슨 향수라도 뿌리신 것 같은데요?”

“내가? 뭐 하러?”

그는 부정했지만 아델은 믿지 않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고 치죠. 하지만 앞으로 둘만 있을 땐 향수 금지요.”

“향수 같은 건 안 써.”

“네, 네, 믿어드릴게요. 차라리 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을 하시지.”

크리스틴이 기가 차고 억울한 표정을 짓자, 아델은 복수를 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나빠질 이유도 없죠.”

“나와 함께 밤을 보낸다는 것 때문이겠지?”

“어머, 무슨 말도 안 되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인가?”

“당치도 않은 말씀이네요!”

“그대가 오늘 밤 안기는 남자가 무려 황제인데도?”

아델은 콧등을 찡긋하며 인상을 썼다.


“황제는 매력 없어요. 그보단 옛 연인이 더 매력적이죠.”

크리스틴이 작게 웃었다.

왜요?

그녀가 발끈하자 그는 기침하는 시늉을 하며 주먹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러나 반달로 휘어지는 눈매는 감출 수 없었다.


“뭐가 우습죠?”

“아델, 당신은 항상 그대로야.”

“칭찬일까요? 욕일까요?”

“재잘거리다가 시치미를 떼고, 또 발끈하는 모습이 어린 소녀 때랑 여전히 똑같아.”

“소녀라니…… 거짓말도 적당히 하세요.”

그러면서도 아델은 볼이 달아올랐다.


“내가 뭐하러? 이제 당신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도 없는데.”

“소녀 같다는 말에 웃어야 할지,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에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커다란 손으로 아델의 머리를 쓱 넘겨주며 그가 그윽하게 응시했다.

아델은 투명한 청회색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이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랬다. 그의 곁에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지난 6년, 수많은 나라를 가졌어도 허전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어.”

“뭐였죠?”

“제일 중요한 걸 갖지 못했으니까.”

“오글거리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아델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 오글거리는 대사에 이렇게 울컥한 기분이 들 일인가 싶었다.

시종일관 그의 애틋한 눈빛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마치 주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외면하면 상처받을 것만 같은 연약한 생명체.

세상을 피로 물들이고, 모든 것을 다 가진 피의 황제라 불리는 그가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크리스틴은 얼굴이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아델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그래, 이건 긴장이 아니라 흥분에 더 가까울지도…….


“당신 생각.”

“바람직하군.”

“흡!”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숨이 막히고 아찔한 현기증에 아델은 뒤로 손을 뻗어 화장대를 짚었다.

하지만 두툼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고 바싹 끌어당겼다. 둘 사이에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이리저리 마찰 되는 입술은 뜨거웠고, 넘나드는 숨결이 점점 더 거칠고 은밀해졌다. 맞닿은 가슴에선 서로의 심장이 뜨겁게 뛰는 게 느껴졌다.

아델은 숨이 막혀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녀의 옷가지들이 낙엽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그녀는 얇은 슈미즈 하나만 입은 채였고, 그가 앞을 조인 스트링을 조금만 당기면 바닥으로 흘러내릴 기세였다.


“크리…….”

그가 부드럽게 어루만져왔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열꽃이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아델의 숨이 가빠지며 어깨가 들썩였다.


“정말 보드라워…….”

탄성처럼 내뱉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델은 아득한 열기에 휩싸였다. 온몸에 힘이 빠져서 팔다리가 꺾일 것만 같았다.

순간 그가 아델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번쩍 들어 올렸다.


“핫……!”

놀란 아델은 얼른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고, 두 다리로 허리를 휘감았다.


“6년만인데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비명이라도 지르고 때릴 걸 그랬나요?”

그는 아델과 코끝을 비비며 웃었다.


“그러게. 정말 파렴치한 폭군이 된 기분이었을 텐데.”

“이제보니 폭군이 되고 싶었군요.”

“나에 대한 평가는 아침에 해도 늦지 않아.”

그는 다시 정신없이 아델의 입술을 머금으며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

풀썩!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처럼 아델은 사납게 침대에 눕혀졌다. 하지만 그는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왜……?”

아델이 긴장해서 물었다.


“꿈만 같아서.”

그는 웃었지만 촉촉하고 애잔한 눈빛이었다.

아델은 손을 들어 가만히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단단한 골격을 감싼 매끈한 피부 위로 까끌한 수염 자국이 만져졌다.


“나도. 이런 날……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왈칵 감정이 복받쳐서 아델의 목소리가 잠겼다.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물이 흘러내리자, 민망해서 얼른 닦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아델의 손을 침대에 내리누르고, 부드럽게 눈물을 핥았다.


“크리스…….”

초옥.

그의 입술이 아델의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초옥.

그의 입술이 아델의 콧등으로, 두 뺨으로, 입술로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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