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사랑하는 내 아내, 아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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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사랑하는 내 아내, 아델
2023.05.26.
초옥.
그의 입술이 아델의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초옥.
그의 입술이 아델의 콧등으로, 두 뺨으로, 입술로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아델은 몸 안의 열기가 나른하게 퍼져가는 걸 느꼈다.
“미안해. 이제 다시 헤어지는 일 없을 거야.”
맹세하듯 그가 비장한 얼굴로 속삭였다.
“당연하죠. 내가 이젠 당신 안 놔 줄 거니까.”
순간 아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홱!
그녀는 재빨리 그를 침대에 눕히며 위치를 바꿔 올라탔다.
“정말이에요. 당신이 날 떠나려고 하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일 거야.”
검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초록 눈동자를 빛내며 위협하는 그녀. 그 모습이 어찌나 고혹적인지 크리스틴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붉은 입술은 또 얼마나 요염한지 다시 키스하고 싶어졌다.
여색에 빠져서 나라를 망치고 목숨까지 잃은 수많은 왕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아델이 심장에 칼을 꽂는다면 그것마저 달콤할 것 같았으니까.
그는 아델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웃었다.
“그래, 당신이 원한다면 내 목도, 심장도, 영혼까지 기꺼이 다 내놓을…… 읏!”
갑자기 그의 몸이 움찔했다.
빌어먹을 또…… 심장이……!
“왜요? 어디 아파요?”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며 고통스러워하자 아델도 깜짝 놀랐다. 얼른 그에게서 내려와 일으켜 앉혔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의 말에 아델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괜찮을 리 없잖아! 고통스러워서 말도 잘 못 하면서! 나…… 때문인 거죠……?”
“그래, 당신이 생각보다 무거워서.”
아델은 눈을 흘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당신이 쓰러졌을 때 짐머가 그랬어요. 봉인 의식의 대가로 나를 지워버렸는데, 내 기억이 되살아나는 바람에 당신이 아픈 거라고. 그래서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당신을 살리려면 날 다시 지워야 할지 모른다고 했어요.”
“아니, 이제 다 기억났으니까 더는…… 아플 일…… 없어.”
말을 하는 동안에도 크리스틴은 가슴을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아니, 내가 괜찮지 않아. 당신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거 못 보겠어. 레아나에게 부탁해서 그냥 나를 지워요.”
“내가 용납 못 해! 다시 헤어지지 않기로 했잖아.”
“헤어질 일 없어요. 내가 우리를 다 기억하니까. 아무리 날 지워도 끈질기게 쫓아가서 기어이 당신이 날 사랑하게 만들 테니까. 말했잖아. 다신 당신 안 놓아줄 거라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그녀는 담담히 웃어 보였다.
“그때는 우리, 처음 만난 사람처럼 새롭게 시작해요. 서로 이름도 소개하고. 응? 난 그래도 괜찮아.”
그녀의 간절한 애원. 자신을 위해서 다시 버려지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비장한 각오에 크리스틴은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차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아델.”
격정을 못 이기고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아론을 안을 때도 느꼈지만 뜨겁게 벅차오르는 이 감정이 심장의 고통을 밀어내는 기분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 감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통증은 점차 흐릿해졌다.
마치 수많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진정한 사랑을 깨달으면 저주가 풀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걸로 내 저주도 풀리는 걸까?
그렇게 느낄 정도로 크리스틴의 통증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아델과의 포옹을 풀며 그가 웃었다.
“당신을 잊는 건 불가능해. 아무리 강한 마법으로 기억을 지워도 난 결국 기억해 낼 거니까. 왜인 줄 알아?”
의아해하는 아델을 바라보며 그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앞자락이 점점 벌어지며 그의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고, 마침내 셔츠를 벗어 던지는 순간 아델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굳어졌다.
“악! 이게…… 무슨?”
크리스틴의 왼쪽 가슴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 그녀의 이름 철자였다. 마치 지금 막 칼로 새긴 것 같은 선연한 상처.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여기에 왜 내 이름이……!”
“저번에 말했잖아. 봉인 의식 직전에 나도 당신의 일부를 가졌다고.”
아델은 기가 막혀서 고개를 저었다.
“레아나가 당신의 진심을 알고 싶으면 벗겨보라더니…… 이걸 말한 거였군요.”
“그땐 절박했거든. 죽는 순간까지 당신과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짐머가 말하길 그는 이미 한번 죽었다고 했다. 그 순간에 크리스틴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새겼을지 생각하니 아델은 다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억지로 울음을 삼키며 피 묻은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아팠겠다, 정말…….”
“생각보다 아프긴 하더군. 레아나 녀석이 인정사정없이 그어 버려서……. 가만 보면 그 녀석이 나보다 더 무자비해.”
“동감이요.”
울먹이던 아델은 조금 웃으며 대꾸했다.
그때였다. 상처 사이로 흘러나오던 피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더니, 반짝이는 붉은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왜……?”
놀란 아델은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고통도 사라졌고, 이제는 저주도 풀리는 모양이었다.
팟!
순간 붉은빛이 작열하듯 눈부시게 빛났다.
잠시 후 그의 단단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아델의 이름을 새긴 흉터뿐.
조금 전까지 피를 흘리던 상처는 거짓말처럼 오래된 상흔으로 변해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어리둥절해 하는 아델을 향해 크리스틴이 초옥, 입을 맞췄다.
“공주님의 사랑으로 왕자의 저주가 풀린 거지. 한마디로 해피엔딩.”
“이제는 안 아파요?”
“거짓말처럼.”
아델이 그를 끌어안았다.
크리스틴은 품 안에 가득 안겨드는 이 작고 따뜻한 육체를 더이상 참아낼 인내심이 없었다. 사실은 마차에 있을 때부터 그녀를 갖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럼 이제 동화 속 뒷얘기를 마무리 지을 시간인가?”
귓불을 살며시 깨물며 위험스럽게 속삭이자,
“동화 속 뒷얘기요?”
아델이 순진하게 물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처럼.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정말 모르는데.”
“뭐?”
곧 아델의 눈이 유혹하듯 사르르 휘어졌다.
“아아, 키스 뒤에 나오는 진짜 어른들의 이야기 말인가요?”
“하, 그 표정, 진짜 속을 뻔했어.”
“가만 보면 진짜 순진한 건 당신이야.”
아델은 슈미즈의 스트링을 제 손으로 풀었다.
그러나 더이상 참지 못한 그가 얇은 옷자락을 재빨리 어깨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날렵한 짐승처럼 그녀를 눕히며 올라탔다.
“꼭 첫날 밤 같군.”
그의 손이 보드라운 살결을 쓰다듬자 아델의 몸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나도…….”
“당신은 그때처럼 여전히 아름답고, 날 미치게 만들어.”
그가 이번엔 살결을 잘근잘근 깨물자,
“……!”
가는 신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때보다 더 예민한 것 같고.”
음흉하게 웃는 그에게 살며시 눈을 흘기는 그녀의 뺨이 발그레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아델의 몸을 잘도 기억하며 익숙하게 희롱했던 것이다.
“당신은 그때보다 더 야하고 음흉해진 것 같네요.”
“이해해. 몇 년을 굶주렸으니.”
그는 정말 굶주린 짐승 같은 표정이었다.
사냥감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어, 집요하게, 남김없이 잡아먹을 것 같은 눈…….
아델이 조금 겁먹은 표정을 지었던 걸까?
“염려 마. 최대한 부드럽게 잡아 먹을 거니까.”
“그런 것 치곤 숨소리가 너무 거친 거 아닌가요?”
“나만 그런 건 아닌데?”
“무, 무슨 소리…….”
저도 모르게 할딱이는 숨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아델이 시치미를 떼는데,
“미안. 조금 거칠지도.”
크리스틴이 그대로 아델의 다리를 움켜쥐며 몸을 밀착시켜왔다.
“꺅!”
아델은 비명을 질렀지만 더는 순진한 여자처럼 굴지 않았다.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쳤다.
그를 향한 갈망을 온전하게 드러냈고, 그가 주는 쾌락에 숨김없이 반응했다.
맞닿은 서로의 심장이 미친 듯 펄떡이는 게 느껴졌다. 그게 너무 좋았다.
“알아? 당신 표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당신만큼 뜨거울까요?”
“그래, 뜨거워. 뜨거워 미칠 것 같아.”
그는 이제 거침없이 내달렸다.
아델은 불덩이를 끌어안은 기분이었다. 그 불덩이가 들불처럼 번져 온몸을 맹렬히 태울 것만 같았다.
때론 거대한 파도에 삼켜져 갈가리 찢길 것 같은 압박감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비로소 온전히 함께였으니까.
이제는 지옥 끝까지 그를 놓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그녀의 등에 새겨진 그의 이름과 그의 가슴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이 맞닿는 순간 아델은 흐느껴 울었다.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아델……?”
놀란 크리스틴이 그녀의 뺨을 감싸며 돌아보게 했다.
“키스…… 해줘요.”
다정히 입 맞추면서도 그는 집요하리만큼 아델을 향한 욕망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 같기도 하고 쾌락 같기도 한 감각이 그녀를 휘몰아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른 전율에 머릿속이 점점 아득해졌다.
흐릿한 의식 속으로 흘러드는 황홀한 밀어.
사랑해.
아델.
나의 아내…….
명멸하는 목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하얗게 바래졌다.
***
새벽이 서서히 밝아오는지 창밖이 엷은 푸른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봉인을 열기 위해 목숨을 걸면서 무슨 생각 했어요?”
함께 침대에 누운 아델은 그의 가슴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약혼녀 생각. 벚꽃은 지고, 이제 곧 장미가 필 텐데…… 그 약속을 못 지키겠구나. 많이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들.”
“그럼 봉인이고 뭐고 포기하고 돌아올 생각은 못 했어요?”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되면 그땐 포기할 거야.”
“똑같은 상황이 오면 큰일이죠!”
이번엔 크리스틴이 그녀의 살결을 지분거리며 물었다.
“아론이 태어날 땐 어땠어? 많이 힘들었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만큼 힘들었죠. 처음엔 아론이 거꾸로 있어서 둘 다 죽을 뻔했거든요.”
“저런……!”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 만에 제대로 돌아왔어요.”
“그럼 하루종일 산통을 겪었다는 거야?”
“아뇨. 이틀 내내요.”
“아아!”
이틀 내내 산통을 겪었을 아델을 떠올리며 크리스틴은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보다 그토록 힘들어하는 아내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미안해. 정말…….”
“뭐야. 당신 설마 우는 거?”
아델은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생각만 해도 미칠 거 같아서 그래. 나 없이 당신 혼자 아이를 지켜 온 시간을 떠올리면…….”
“내가 아이를 지킨 게 아니에요. 아론이 날 지켜줬지. 그 애 때문에 힘들었던 건 이제 기억도 안 나. 행복했던 시간만 떠올라. 당신이 밉다가도 가끔 고맙기도 했어. 이렇게 귀한 선물을 남겨주었으니까.”
“아델.”
“우리 아론은 다른 아이들보다 뭐든 좀 늦었어요. 걸음마도 늦고, 말도 늦고.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금방 따라잡았죠. 형들을 보면서 금방 배웠나 봐.”
“크게 아팠던 적은 없었어?”
“잔병치레도 없었어요. 대신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팔이 부러진 적은 있었죠. 그런데 마크가 치료해주면 사나흘 만에 깨끗이 나았죠. 다들 마크의 의술이 뛰어나서라고 했지만 우리는 알았죠. 아론이 늑대 일족의 아이라서 그런걸.”
“또 얘기해 봐. 아론이 잘 먹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놀이 같은 거.”
“아론은…… 하아암…… 조금…… 자고…… 너무…… 졸려…….”
말을 하는 동안에도 아델은 하품을 참지 못하더니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래, 푹 자.”
크리스틴은 아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론을 재웠던 것처럼.
지난 6년 동안 그가 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워 온 것처럼, 그녀 역시 치열하게 엄마 노릇을 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가 해야 할 몫이었다. 그동안 해주지 못했던 것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