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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황제도 할 수 없는 일 (138/155)


138화. 황제도 할 수 없는 일
2023.05.29.


평온한 아침이었다.

크리스틴은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든 아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줄곧 느껴왔던 허기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채워지지 않던 공허함.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충만한 기분이었다.

아침 햇살이 벽과 침대를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나른한 아침.

품 안에서 규칙적으로 새근거리는 아델의 숨소리를 들으며, 침실 안을 떠도는 달큼한 체향에 흠뻑 취해 보았다.

이 순간의 평온함과 이 순간의 나른함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행복’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그대로 책갈피에 꽂아두고 싶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두고두고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른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폐하, 크라이튼 경입니다. 아직 주무십니까?”

젠장! 저 자식!

아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나와 로브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짐머와 마법사 케니, 그리고 여러 명의 기사와 시종들이 서 있었다.


“조용히 따라오도록.”

그는 호위 기사들만 남겨두고 다들 침실에서 떨어진 집무실로 데려갔다.

아델을 계속 곤하게 재우고 싶었으니까.
 


“그래, 급한 보고라도 있는 건가?”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그가 물었다. 급한 보고가 아니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인 것이다.

짐머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단잠을 깨운 거라면 송구합니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도 항상 새벽에 기상하시기에 당연히 일어나셨을 줄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체력이 예전만 못하신가 봅니다.”

스릉…… 우웅!

어느새 크리스틴은 벽에 걸린 레이피어를 뽑아 짐머의 목을 향해 가차 없이 휘둘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물러났다. 그러나 당사자인 짐머는 여유롭게 고개를 숙여 피하더니,


“그럼 어젯밤의 전투가 치열했던 걸로.”

다시 고개를 들며 빙긋 웃었다.

크리스틴은 레이피어를 내던지며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보고나 해.”

“조금전 레아나 양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어디에 있다던가? 별일은 없고?”

그러자 케니가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을 가지고 앞으로 나왔다. 구슬 안에는 레아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시나요, 폐하?]

그녀는 크리스틴이 어젯밤에 한 일을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됐고. 네가 있는 곳의 상황은 어때?”

[저희는 지금 반란 사제들의 본거지를 습격했어요. 이미 정보가 샜는지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이제 그만 돌아와. 모리스가 유인책을 쓰는 걸지 모르니 우리가 놈들을 불러낼 방법을 생각해보자.”

[아니요. 조금만 더요. 모리스는 이제 제 상대가 안 되는걸요.]

“내가 부탁하는 거로 들리나?”

크리스틴이 강한 어조로 말하자 레아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리스가 늑대 일족들을 데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을 꾸미는지 좀 더 조사해볼게요.]

“모리스의 함정일 가능성이 더 크다.”

[폐하!]

“당장 돌아와, 레아나. 주군으로서 명령이야.”

 

***

침실로 들어오던 크리스틴은 멈칫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폐하.”

창가에 서 있던 아델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하얀 피부가 아침 햇살에 투명하게 빛났고, 길게 풀어내린 머리카락은 꽃잎이 날아드는 바람과 함께 나풀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는 숨이 막혔다.


“잠시 그대로 있어.”

아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온 크리스틴은 두 팔로 꼬옥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아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느낌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믿어지지 않아. 당신과 함께 다시 아침을 맞이한다는 게.”

“나도요. 눈을 떴는데 당신이 옆에 없어서 어젯밤은 꿈이었나 싶더군요. 왈칵 울음이 나올 뻔했어요.”

“미안. 깰 때까지 옆에 있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다시 돌아왔으니까 상관없어요.”

그에게 안긴 아델은 사랑스럽게 올려다보며 눈웃음 지어 보였다.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거야?”

“그게 무슨?”

아델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그가 짙은 욕망을 드러냈다.


“어젯밤 못다 한 일을 마저 끝내야 하지 않을까?”

아델은 그의 음흉한 속내를 알아차렸지만 새침하게 모른 척했다.


“못다 한 일이라니요? 어제 충분히 다 한 것 같은데.”

“아니.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남았는걸. 6년 만인데 하룻밤으론 턱도 없지.”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을걸요?”

아델은 부드럽게 거절했지만,


“상관없어. 일정이야 미루면 되니까.”

닿을 듯 그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델은 얼른 그의 팔을 풀며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미안하지만 당신이 일정을 미룬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크리스틴은 안달 난 얼굴로 그녀를 다시 쫓아갔다.


“잊었어? 당신 앞의 남자는 황제고, 황제는 모든 걸 할 수 있지.”

“글쎄요. 잠시 후엔 황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될걸요?”

“그런 건 없어!”

“꺅!”

아델을 번쩍 안아 든 크리스틴은 그대로 침대에 데려가 눕혔다.


“자, 잠깐…… 크리…… 읍!”

아델이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정신없이 입 맞추며 부드러운 살결을 탐닉해갔다.

처음엔 밀어내던 아델도 어느새 달뜬 숨을 내쉬며 짙은 입맞춤을 나눴다.

서로의 옷이 하나둘 침대 아래로 떨어지고, 두 사람이 순식간에 뜨거워질 무렵이었다.

젠장…… 깜빡했군!

크리스틴은 낭패스러운 표정과 함께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췄다. 발달된 감각은 불길한 그 소리를 감지한 것이다.

타박, 타박…….

복도를 울리는 가벼운 구두 발소리.

그 소리가 이내 와다다다…… 빨라지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아론이에요.”

아이의 기척이 복도를 짜랑짜랑 울리며 들려왔다.


“응, 아론. 잠시만!”

퍽!

아델은 크리스틴을 순식간에 침대 끝으로 밀어 던지더니, 얼른 옷을 챙겨입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어 멍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조금 전 자신을 밀어 던진 힘은 도저히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그는 침대 아래로 나뒹굴 뻔했던 것이다.

게다가 옷차림을 매만지는 손길은 또 어찌나 빠른지…….

힘으로 보건데 속도로 보건데 아델의 움직임은 그를 압도하고도 남을만했다.

게다가 그를 혼내는 이 무시무시한 기세까지.


“뭐 해요? 옷이라도 잘 좀 입어요!”

전쟁터였다면 그는 아마 아델에게 즉사했을지도.


“어? 어…… 그런데 아론이 이렇게 일찍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로브를 얼른 주워입고 조신하게 앞섶을 여미며 물었다.


“오늘은 좀 더 일찍 일어나긴 했네요.”

“젠장……!”

벌컥!

아론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동시였다.


 

***



“잘 잤니, 아론?”

아델은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화한 미소로 아론을 맞이했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엄마…… 어, 폐하?”

“잘 잤니, 아론?”

크리스틴은 멋쩍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치, 아론이 엄마한테 맨날맨날 첫 번째로 아침 인사하는데.”

“미안. 내가 좀 일찍 일어났다.”

“근데 옷은 왜 안 입었어요?”

크리스틴은 조금 당황해서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로브 차림이긴 했지만 가릴 곳은 다 잘 가린 상태였다.


“옷, 입었는데?”

“그건 잠옷 위에 입는 거잖아요. 근데 폐하는 잠옷도 안 입고…… 왜 그러고 우리 엄마 방에 있어요?”

“뭐?”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마치 치한 취급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론의 뒤에 서 있던 짐머는 기분 탓만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론은 아델의 손을 잡아끌며 졸랐다.


“엄마, 우리 이제 집에 가요. 아빠랑 형들이 기다리면 어쩌려고.”

크리스틴과 아델은 난감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이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진실을 이해하기엔 아론이 너무 어렸다.

하지만 더 이상 거짓말을 하는 건 아이에게 더 미안할 것 같았다.

아델은 아론과 눈높이를 맞춰 쪼그려 앉았다.


“아론 기억하니? 엄마가 네 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서 행복해진다고 했던 말.”

아이는 아델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것처럼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사람이 바로 폐하였어. 너도 그랬잖아. 폐하의 눈이 너랑 똑같다고.”

“네…….”

“왜냐면 아론의 진짜 아빠는…… 폐하시거든. 진료소의 아빠는 폐하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와 아론을 지켜주셨던 거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아이의 얼굴이 울 것처럼 그렁그렁해졌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한 것처럼.

크리스틴도 아론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안하다 아론. 모두 다 내 잘못이야. 그동안 아파서 엄마와 아론을 찾지 못했어. 이제부턴 두 사람에게 정말 잘할게.”

하지만 아론은 믿지 않았다.


“거짓말! 폐하는 거짓말쟁이예요!”

“아론…….”

“아론은 아프면 엄마가 제일 먼저 보고 싶어요. 엄마가 제일 좋으니까. 흑! 근데, 그러니까, 아파서 찾아오지 않은 건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폐하는 거짓말쟁이 바보 천치예요!”

아이의 원망이 그대로 느껴졌기에 그 한마디 한마디가 그에게 비수처럼 박혔다.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폐하는 바보 천치다. 너처럼 이렇게 예쁜 아이를 이제야 알아보다니.”

“놔요! 놔! 안 그러면 때릴 거예요! 멧돼지! 발 고린내! 똥싸개!”

아이가 발버둥 치며 울자 크리스틴은 하는 수 없이 놓아주었다.

아론은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아론!”

쫓아나가려는 아델을 그가 붙잡았다.


“당신은 그냥 있어. 이건 내가 풀어야 할 숙제니까.”

 

***



“어서 와요, 캐슬러 백작.”

이자벨은 반갑게 마크를 맞이했다. 그녀는 아침부터 연분홍 꽃이 만개한 벚나무 아래에서 티 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마크는 화사한 아침과 어울리지 않게 굳은 표정이었다.


“무슨 용건으로 부르셨습니까?”

“봄날의 정원을 함께 감상할 사람이 필요해서?”

“……!”

이자벨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잖아요. 일단 차부터 좀 마셔요. 블루게일에서 구해온 홍차 맛이 좋네요.”

시녀들이 이자벨 앞의 의자를 빼주었고, 그녀는 손수 빈 찻잔을 채웠다.

하지만 마크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황궁 어의 자리를 제의하려고 부르신 거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세이라가 황궁의 자리로 추천하겠다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그들은 마크를 종용해 황제를 독살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사양하는 건 내 말을 듣고 난 후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아요. 일단 앉으세요, 캐슬러 백작.”

“서서 들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자벨은 뒤에 있는 시녀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들이 얼른 커다란 주머니에서 약병들을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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