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아버지와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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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아버지와 아빠
2023.06.02.
이자벨은 뒤에 있는 시녀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들이 얼른 커다란 주머니에서 약병들을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이게 다 뭡니까?”
“최근 황제의 방으로 들어간 약들이죠. 이 약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요새 황제가 지내는 마블궁으로 많은 약이 들어간다더군요. 어의도 없이 약만 원하는 걸 보면 황제에게 알려져선 곤란한 병이라도 있는 모양이에요.”
세이라의 말대로였다.
황제가 정말 병이라도 걸린 걸까?
그러고 보니 일전에 오페라 극장에서 마주쳤을 때도 매우 아파 보였다. 그뿐 아니라 드문드문 안색이 나쁘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하지만 약병에 쓰인 이름들을 대충 눈으로 훑어보던 마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약 중에는 치료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병에 걸린 거라면 고칠 수 없는 병이란 뜻이기도 했다.
대마법사까지 거느린 그가 대체 무슨 병에 걸렸기에…….
“대부분 진통과 진정의 효능이 있는 것들입니다. 감기에 걸렸을 때도 쓰이죠.”
그러나 마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물론 크리스틴이 감기에 걸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자벨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늑대 일족인 황제가 감기라…… 재미있는 얘기네요.”
“그만큼 크게 받아들이실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이자벨은 시녀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목소리를 죽였다.
“그 약이 마블궁으로 들어가던 날, 밤새도록 황제의 침실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더군요.”
“늑대 일족이니 늑대 소리가 나는 게 당연하겠죠.”
“그대는 속을 잘 감추는 건가요? 아니면 모자라는 건가요?”
“알아듣게 말씀하시지요.”
“황제의 편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황제의 편인지를 묻는 겁니다. 후자라면 모자라는 게 분명하고요.”
“전자라면요?”
“우리의 얘기가 좀 더 쉬워질 수 있겠죠.”
마크는 정색했다.
“누군가를 해치는 일에는 동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이자벨은 나직하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럼 이거 하나만 기억해요. 황제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 그대와 그대 아이들은 계속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협박입니까?”
“좀 더 실리적으로 굴라는 뜻이죠.”
마크의 얼굴이 굳어지자, 이자벨은 장난스럽게 소리 내 웃었다.
“표정 풀어요. 누가 들으면 황제를 독살이라도 하라는 줄 알겠어요. 반역자란 누명을 쓴 후로 진료소에 환자가 없다기에 좋은 마음으로 하는 제의랍니다. 모든 결정은 백작의 몫이고.”
***
이자벨에게서 물러난 마크는 한동안 넋 나간 얼굴로 황궁 안을 거닐었다.
그녀는 정말 황제를 죽일 생각인 걸까?
자신의 손으로 황제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특별히 막고 싶지도 않은 게 그의 진심이었다.
황제가 사라지면 아델과 아론도 다시 돌아올 테고, 예전처럼 행복하게…….
‘젠장! 무슨 생각을!’
그때였다.
“아빠! 아빠!”
고개를 돌리자 나지막한 관목 울타리 사이로 달려오는 아론이 보였다.
“아론!”
반갑게 달려가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런데 아이는 마크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론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으흐흑! 진짜예요? 아빠가 우리 아빠가 아니라는 게?”
“……!”
“폐하가 진짜 아론의 아빠래요. 흐흑! 그러면 아빠는 가짜예요? 싫어요! 아론은 엄마랑 아빠랑 형들이랑 살 거예요!”
아론이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조만간 황제가 아델과 아론을 데리고 떠나려나 보다. 그래서 아이에게 사실을 모두 얘기한 게 분명했다.
“아론, 일단 울음부터 좀 그치자. 콧물이 전부 입으로 들어가겠다.”
“으흑! 콧물이 엄청 짜요!”
순간 아론의 코에서 콧물 방울이 부풀어 올랐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마크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풉!”
아론의 울음소리가 더 커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으아앙! 아빠 미워! 미워! 흐아아!”
“미안하다, 아론. 이제 그만 뚝.”
아이를 번쩍 안아서 달래던 그는 언제부터인지 바닥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틴이 아론의 뒤에서 손수건이 쥐고 서 있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표정은 어울리지 않게 안타깝기만 했다.
그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은 마크는 눈물 콧물로 범벅된 아론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근데 손수건에서 폐하 냄새가 나요.”
울던 아론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폐하 냄새?”
“가슴이 막 두근거리는 냄새요. 말도 타고 싶고, 칼싸움도 하고 싶어지는 냄새요.”
“아론은 그 냄새가 좋으니?”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요. 음…… 조금 무서운데…… 어…… 자꾸자꾸 맡고 싶어져요.”
그러다 모기만 한 소리로 덧붙였다.
“조금…… 좋은 것도 같고.”
아마도 마크의 눈치가 보였나 보다.
그래서 마크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런데 폐하가 아론의 아빠인 게 왜 싫어?”
“그럼 아빠, 엄마, 형들이랑 다 같이 못 살잖아요. 아론은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면서 아이가 다시 울먹이자,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도 된다, 아론.”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아론이 고개를 홱 돌려서 보았다.
코끝과 눈가가 빨개진 아이의 얼굴을 보자 크리스틴은 안쓰러움과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
“미안하다.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 네 생각은 물어보지도 않고 결정을 내렸어. 원하면 아빠와 함께 집에 돌아가도 돼. 그리고 나는 네 마음대로 불러라. 폐하도 좋고, 폐하 아저씨도 좋고.”
“정말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은 마크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아비로서 해준 게 없는데 이거라도 해주고 싶군. 당분간 다시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그는 마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패잔병처럼 쓸쓸해 보였다.
작은 승리의 기쁨에 취해서였을까?
“이자벨 부인이 황궁 어의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마크의 말에 크리스틴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 얘기를 하는 까닭은?”
“폐하의 병명을 알아내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정말 지병이라도 있는 거라면 조심하십시오.”
“이제는 다 나았네.”
***
점심 식사 후, 아론은 마블궁을 나올 채비를 마쳤다.
“짐은 다 챙겼니?”
마차 안에 실리는 짐을 바라보며 크리스틴이 물었다.
“네, 다 챙겼어요!”
아론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이는 처음 여기 올 때처럼 잔뜩 힘이 들어간 푸른색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말도 안 되게 밝았다.
그리고 짐은 올 때와 비교도 안 되게 많아져서, 아론이 타고 갈 마차 뒤로 짐 마차 한 대가 더 있었다.
크리스틴이 아델과 아이를 위해 사들이라고 지시한 것들과, 제이드와 폴린의 선물이었다.
“집에 돌아가니 기분이 좋은가 보다.”
“네, 좋아요! 선물도 많고요.”
얼른 대답하던 아이는 크리스틴의 표정을 빤히 보더니 덧붙였다.
“폐하랑 못 노는 것만 빼고요.”
“대신 형들이랑 놀 수 있잖니.”
“그래도 폐하랑 노는 게 조금 더 재밌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 위로는 안 해도 된다.”
그는 엷게 웃으며 아이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진짠데. 그리고 이거…….”
아론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침에 마크가 콧물을 닦아준 크리스틴의 손수건이었다.
“아빠가 폐하 손수건이라고 했어요.”
“거기서 아직도 내 냄새가 나니? 말도 타고 싶고, 칼싸움도 하고 싶어지는 냄새.”
아론은 얼른 코를 묻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조금 나는 것도 같아요.”
“그럼 가져가라.”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한 것처럼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바지 주머니에 넣다가,
“아 참!”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손 줘보세요.”
크리스틴이 손을 내밀자 그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알록달록한 사탕을 유산지로 꼬깃꼬깃 포장해 놓은 것이었다.
“선물이요.”
그러더니 뒤에 있는 아델의 눈치를 힐끔 보고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크리스틴이 허리를 숙이자 아이는 까치발을 하고 속삭였다.
“시장에서 파는 건데 엄마가 못 먹게 해서 몰래 숨겨놓은 거예요. 진짜 맛있어요!”
“엄마가 만든 것보다 더?”
“음…… 조금 더요. 노란색 레몬 맛이 젤 맛있어요. 그거 다 먹으면 다시 놀러 올게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죠?”
“오늘 다 먹으면?”
“이빨 썩어요! 하루에 세 개 이상 금지.”
“그래, 세 개 이상 금지.”
아론은 모종의 비밀이라도 나눈 것처럼 씩 웃더니, 짧은 다리로 깡충 뛰어 마차에 올라탔다.
“폐하…….”
뒤에서 두 사람이 헤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이 다가왔다.
“참 나쁜 녀석이군. 사람을 버리고 가면서 저렇게 예쁘게 웃으면 어쩌라는 건지.”
정말로 버림받은 사람처럼 크리스틴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아델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힘든 결정을 내려줘서 고마워요. 자주 데리고 올게요.”
“음. 이젠 내가 기다릴 차례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럼.”
아델이 사뿐하게 마차에 올라타자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곧 단조로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졌다.
그들의 뒤를 호위하듯 W.G 기사단이 따랐다.
“아론도 곧 이 상황을 받아들일 겁니다.”
짐머가 다가와 위로하듯 말했다.
“시간이 걸려도 할 수 없지. 이 정도의 대가는 감수해야지.”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멀어지는 걸 보며 그는 사탕 봉지를 펼쳐 노란색 사탕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과일 향과 함께 아이의 달큼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벌써부터 그리워질 것 같은 내음이었다.
그리고 돌아설 때였다.
“폐하!”
늑대 일족의 바울로가 거구의 몸을 뒤덮은 털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시내에서 큰 사고가 있었답니다. 늑대 일족들이 사람들을 습격했답니다.”
“뭐……?”
***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 다들 퇴근해요.”
오후가 되자 마크는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키기로 했다.
아론이 오후에 집에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자들도 없었고.
그가 반란 사제들과 한패라는 소문이 돌면서 그 많던 환자들이 발길을 끊었다.
이제 반란 혐의에 대한 오해가 풀렸을 법도 한데 아직도 환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직원들도 절반은 그만둬서 진료소 안이 휑했다.
아델이 황제의 여자가 되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황제와 연적이 되는 셈이었으니까. 황제의 연적과 가깝게 지낼 만큼 간 큰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굶지 않으려면 정말 황궁 어의 자리라도 받아들여야 할 모양이군.”
텅 빈 진료소 건물을 둘러보며 중얼거릴 때였다.
“의사……, 의사 선생님! 살려주십시오!”
다급한 소리에 돌아보자, 한쪽 팔이 없는 남자가 비틀거리며 진료소의 로비로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가 움직인 동선마다 피가 흘러 길을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쩌다 이렇게……!”
놀란 마크가 얼른 뛰어가는데,
“비켜요! 비켜! 선생님 우리 아이를 봐주십시오! 다 죽어갑니다!”
또 다른 여자가 피투성이 아이를 안고 뛰어 들어왔다.
그 뒤로도 다친 사람들이 순식간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마크는 믿을 수 없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늑대 일족의 짓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