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모리스의 계략을 간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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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모리스의 계략을 간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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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모리스의 계략을 간파하다
2023.06.09.
사흘 후.
마크가 운영하던 진료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자들이 왔다가 ‘운영 종료’라는 안내문을 보고 실망하며 돌아갔다.
진료소뿐 아니었다. 아델이 운영하는 ‘제일 맛있는 빵 가게’도 영업을 종료한다며 문을 닫았다.
몇몇 사람들은 제멋대로 문을 닫은 그들을 욕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비로소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굶주린 사람들에겐 저렴한 빵을, 돈 없고 아픈 사람에겐 저렴한 진료로.
하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행운이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줘서 고마워요, 캐슬러 백작.”
황후궁에서 이자벨은 반갑게 마크를 맞이했다.
진료소를 폐쇄한 그는 결국 황궁 어의 자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들었어요. 아들이 늑대 일족에게 당했다고. 지금은 괜찮나요?”
“자고 있을 겁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잠을.
“다행이군요. 하지만 이건 시작일지 모르죠. 황제가 있는 한 늑대 일족은 언제든 같은 짓을 또 저지를 거예요. 앞으로 인간들의 입지는 점점 더 약해지겠죠.”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뭘…… 하다니요?”
“부르신 이유가 황제를 독살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이런. 뭔가 오해했군요. 난 그저 황제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 병에 알맞은 약을 처방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겠죠.”
“황제를 독살할 기회를 주신다는 말 같군요.”
“아들의 복수를 할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겠죠.”
마크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고 보면 이자벨은 한번도 황제를 독살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위협하고 회유하며 조종하려 했다.
칼라임의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귀족회를 장악한 정치 고수다운 노련함이었다.
설마 제이드를 그렇게 만든 것도 저들의 짓일까?
자신을 황제와 대척점에 세우기 위해.
“제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 관여하지 말 것. 아들의 복수에 성공하면 공작의 작위와 로드웰 공작가의 재산 반을 지급한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로드웰 공작가의 막대한 재산은 현재 이자벨의 소유였다. 칼라임의 귀족 중 제일 재산이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재산의 반이라니…….
“보기보다 욕심이 지나치군요.”
“선황후께서 얻는 이득에 비할 바가 아닐 텐데요.”
고민하던 이자벨은 이내 시원스럽게 수락했다.
“앞으로 잘 해봐요, 우리.”
화사하게 웃으며 그녀가 악수를 청했지만, 마크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
이자벨과 헤어진 마크는 황궁 진료소로 갔다.
그곳엔 이미 그의 이름이 붙은 진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커다란 창이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천정까지 이어진 칸막이 진열장에 놓인 수백 가지의 약재들은 더욱 마음에 들었고.
“기분이 좀 나아 보이는군.”
약재들을 훑어보던 마크는 뜻밖의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볕이 닿지 않는 구석에 언제부터인지 크리스틴이 서 있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새 출발을 축하해주려고.”
그는 정말 축하해주러 온 친구처럼 웃으며 다가왔다.
“농담 마십시오.”
물론 마크는 정색했지만.
“뭐, 축하하러 온 김에 자네와 이자벨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염탐도 하고.”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은 크리스틴은 볕이 잘 드는 창턱에 훌쩍 올라앉았다.
햇살 아래 유난히 희고 투명한 피부와 눈부신 머리카락이 확실히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짐승의 일족보다는 정령이나 엘프 쪽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황궁 어의는 진료할 뿐이죠. 병을 살피고, 치료하고.”
“치료 중에 독을 쓰는 실수도 하고?”
그가 이자벨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마크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직은 안 해 봤지만, 앞으로는 또 모르지요.”
마크는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꼼꼼한 성격에 맞지 않게 물건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왼쪽에 놓아둔 청진기를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옮기기도 하면서.
창가에서 사뿐히 내려온 크리스틴이 그의 손에 들린 청진기 상자를 붙잡았다.
“제이드의 일은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네.”
“폐하께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나?”
“기억하시지요? 이 검을 주며 하신 말씀.”
마크는 바이스 가문의 하얀 늑대 문장이 새겨진 단검을 내밀었다. 크리스틴이 일전에 낚시터에서 건네준 것이었다.
후우, 크리스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재킷을 벗고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짓입니까?”
“자네에게 내 몸을 좀 보여주고 싶어서.”
마크가 펄쩍 뛰었다.
“제 정신이십니까?”
“내 몸을 보면 아마 놀라서 눈을 떼지 못할 걸세. 장담해.”
“폐하!”
당황한 마크를 보며 크리스틴은 장난스럽게 단추를 계속 풀어 내려갔다.
단추가 풀리며 드러나는 그의 상체는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할 만큼 완벽한 조각이었다.
그러다 마크는 숨을 멈췄다.
“이건 대체 무슨……?”
훤히 드러난 그의 왼쪽 가슴에 아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난 이미 한번 죽었어. 아델을 기억에서 지우는 대가로 레아나가 다시 살려냈지. 그래서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끔찍한 고통을 받는 저주에 걸려 있었네. 그녀를 다시 지우는 것 외에 어떤 마법도 쓸 수가 없었지.”
“마블궁으로 그토록 많은 약이 들어갔던 이유였군요.”
다시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크리스틴이 말했다.
“하지만 이젠 그 저주가 풀린 것 같네. 약도 필요 없고.”
“이 얘기를 왜 제게 하시는 겁니까?”
“자네도 이자벨에게 쓸모 있어야 할 테니까.”
“사실대로 다 얘기하라는 말입니까?”
“어디까지 얘기할지는 자네의 선택이겠지. 물론 난 자네가 배신해도 한 번은 용서할 거고.”
“…….”
“하지만 제이드를 그렇게 만든 게 누구 짓인지 밝히고 싶지 않나?”
마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제이드를 그렇게 만든 건 저들의 짓이었나?
황제를 미워하게 만들고 자신을 조종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는 아직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계획이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하지만 폐하 말고 누가 늑대 일족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겠습니까?”
“그걸 알아내려는 중이네.”
마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좋습니다. 속는 셈 치고 일단 협조해보죠.”
“그럼 오늘 데이트는 자정에 자네의 진료소에서.”
“예에?”
눈을 찡긋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마크는 어이가 없었다.
사실 황궁에 들어올 때만 해도 황제를 독살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늑대 일족이 활개를 치는 게 모두 그의 잘못 같았으니까.
그가 나타나면서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고 가족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제이드를 누가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아내야 했다.
황제를 죽이는 건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
***
자정이 넘은 시각.
마크의 진료소 건물은 굳게 잠긴 채 불빛 한 줄기 없었다.
하지만 어두운 복도 밖으로 나직한 인기척이 흘러나왔다.
진료실 안은 두꺼운 커튼을 쳐서 불빛을 모두 막아놓은 후였다.
침상 한가운데는 시신 한 구가 놓여 있었다. 크리스틴과 짐머, 그리고 검시관과 마크가 둘러서서 살피는 중이었다.
시신은 얼마 전 폭주하다가 체포된 늑대 일족 중 한 명이었다.
자결한 시신을 모두 태우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중 한 구를 검시관이 몰래 빼돌린 것이다. 그는 크리스틴이 근위대장으로 있을 때부터 심복이었던 자였다.
“화장한 세 구의 시신도 모두 똑같았습니다.”
검시관은 시신의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신의 귀 주변은 손톱에 잔뜩 뜯긴 상처들로 가득했다.
상처를 유심히 살피던 마크가 말했다.
“전부 본인이 자해한 것입니다. 게다가 늑대 일족은 치유력이 남다름에도 불구하고 상처가 선명한 걸 보면…….”
“죽기 직전에 생긴 상처겠군. 그래, 사인은?”
크리스틴의 물음에 검시관은 부서져 있는 시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두부 손상. 전부 머리를 돌벽에 들이받아 자결했죠.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상한 점?”
“간수들이 그러는데 죽기 직전 모두 끔찍한 괴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마치 괴로워서 울부짖는 것처럼. 귀의 상처도 그때 생긴 게 아닐지.”
잠시 생각하던 크리스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자결한 게 아닐 가능성이 크군. 짐머, 이들의 신원은?”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칼라임에 나타난 것도 범행 전날이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이 동시에 폭주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뭔가 냄새가 나. 레아나, 네 생각은?”
동시에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문 뒤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레아나가 서 있었다. 그 옆에 아델도 함께였다.
“제대로 보셨어요.”
레아나는 진료실을 가로질러 망설임 없이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며칠 동안 연락이 두절 되어 사람들을 애태웠던 그녀는 조금 야위었지만 멀쩡해 보였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 자는 모리스에게 조종당한 게 분명해요.”
크리스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자세히 말해봐라.”
“며칠 동안 모리스와 반란 사제들을 쫓았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죠. 하지만 그들이 수백 명의 늑대 일족을 가두고 실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폭주한 자도 그 실험체 중 하나였겠죠. 그런데 왜 갑자기 무고한 시민들을 공격하게 했을까요?”
“모리스의 계획을 알 것 같아요.”
문 앞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아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다들 그녀를 돌아보았다.
“예전에 마크가 갖고 있던 고서에서 읽었어요. 최강 전사인 늑대 일족을 멸족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이간질로 서로를 싸우게 만드는 거라고. 일족끼리의 전투에서 다친 상처는 잘 재생되지 않으니까. 오래전 늑대 일족도 그렇게 멸망해갔다고 했죠.”
“그런데 왜 평범한 시민들을 공격했을까요?”
마크의 의문에 아델은 크리스틴을 향해 물었다.
“만일 늑대 일족이 다시 또 사람들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체포한 후 규정대로 처형하겠지.”
그제야 마크는 이해했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본 일족 중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생기겠군요!”
짐머도 소리쳤다.
“맞습니다! 모리스는 그걸 노리는 게 분명합니다! 늑대 일족이 또다시 인간을 공격하고 폐하가 그들을 처형한다면, 폐하가 인간의 편이라며 이간질하겠죠. 그러면 등 돌리는 일족들이 생겨날 거고, 편이 나뉘겠죠.”
크리스틴도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은 인간들대로 늑대 일족을 증오할 거고.”
“그래요. 어쩌면…… 이번 사건은 시초에 불과할지도 몰라요.”
아델의 무시무시한 예언에 다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고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될 것이다.
그리고 늑대 일족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
“제가 모든 W.G 기사들을 동원해 모리스를 다시 추격해보겠습니다!”
짐머의 말에 크리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당분간 놈이 원하는 대로 두자.”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겁니까?”
마크가 화를 냈다. 또다시 제이드 같은 희생자가 나온다는 건 참을 수 없었으니까.
크리스틴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놈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지.”
“언제 나타날 줄 알고요!”
답답해서 중얼거리던 마크는 그의 시선이 진료실 책상 위에 머문 걸 보았다.
“설마 그날?”
“자네가 모리스라면 그날이 제격일 것 같지 않나?”
책상 위에는 성당 바자회의 홍보 전단이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