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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레아나의 악몽 (142/155)


142화. 레아나의 악몽
2023.06.12.



 


“아니, 놈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지.”

“언제 나타날 줄 알고요!”

답답해서 중얼거리던 마크는 그의 시선이 진료실 책상 위에 머문 걸 보았다.


“설마 그날?”

“자네가 모리스라면 그날이 제격일 것 같지 않나?”

책상 위에는 성당 바자회의 홍보 전단이 놓여 있었다.


“이제 알겠군요. 선황후가 바자회를 강행하려던 진짜 이유.”

아델도 모든 것을 짐작한 듯 중얼거렸다.

시내에서 끔찍한 참상이 있었는데도 이자벨은 바자회를 취소하지 않았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일상을 다시 이어가야 한다는 취지였다.

바자회의 판매수익으로는 이번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돕자고 했다.

크리스틴에게도 행사에 참석해 시민들을 안심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이자벨은 반란 사제와 손을 잡은 것이다.

모리스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도록 행사를 강행하려는 것.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게임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싸울 일만 남은 건가?”

크리스틴은 기대가 된다는 듯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왜 연락도 없었지?”

진료소의 뒷문으로 조용히 빠져나오며 크리스틴이 레아나를 나무랐다.

마나의 흔적도 함께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수색대까지 파견했던 것이다. 그래도 찾지 못해서 얼마나 애가 탔던가.

그랬던 레아나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죄송합니다, 폐하. 모리스가 제 마나를 눈치채고 도망갈까 봐 일부러 마법을 안 썼어요. 그랬는데도 결국 놓쳐버렸네요. 면목이 없습니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다.”

“그동안 폐하가 많이 걱정했어. 다친 데는 없는 거지?”

걱정하는 아델을 향해 레아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물론이죠. 전 세계 최강 마법사인걸요. 반란 사제들 따위는 상대도 안 되죠.”

그러자 아델이 조심스럽게 용건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제이드를 치유해주면 안 될까? 벌써 사흘째 의식이 없어.”

순간 명랑하던 레아나의 표정이 몰라보게 서늘해졌다.


“들었어요. 케니가 이미 치유 마법을 썼다고. 그래도 깨어나지 못했다면 누가 해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넌 최고의 마법사잖아. 부탁이야, 레아나.”

아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사흘째 죽은 듯 잠만 자는 제이드가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아쉽지만 전, 신이 아니라서요. 그럼 이만.”

딱 잘라 거절한 레아나는 진료소 밖에 세워둔 말을 타고 가버렸다.


“그동안 모리스를 추격하느라 많이 지쳤을 거야. 내가 다시 말해 볼게.”

의기소침해진 아델을 크리스틴이 달래주었다. 하지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레아나를 보는 그의 눈은 날카로웠다.

어쩐지 레아나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가 숨기는 게 분명했다.


“미안해요. 제이드만 걱정하느라 레아나 상황은 생각 못 했네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아델을 그가 얼른 붙잡았다.


“늦었는데 집까지 데려다주지.”

“집까지요?”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이라고 해봐야 진료소에서 길하나 건너였으니까.


“그래. 안 될 거 있나?”

제이드를 간병 하느라 아델은 요 며칠 계속 저택에서 지냈다. 그로 인해 며칠 만에 겨우 만났는데 벌써 가겠다니 크리스틴으로선 섭섭할 수밖에.

그 마음을 깨달은 아델이 애교스럽게 팔짱을 꼈다.


“그보단 함께 산책할까요? 달빛도 좋은데.”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당신이 함께 있는데 뭐가?”

“늑대는 달빛에 쉽게 흥분하거든.”

아델은 곧 사르르 눈웃음쳤다.


“괜찮아요. 난 유능한 조련사니까.”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달빛 어둠 속을 나란히 걸었다.

***

깊은 밤이었고, 흉흉한 사건이 벌어진 뒤라 거리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온 세상을 밝히는 환한 달빛이 온전히 두 사람의 것 같았다.

바람이 불자 달빛 사이로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벚꽃잎은 요염하면서도 신비로웠다.


“기억나요? 예전에 저 강가에서 초상화를 그렸던 일.”

아델은 일렁이는 달빛을 가둔 강가를 가리켰다.

시민들의 주된 산책로였지만 그곳도 인적 하나 없었다.


“음, 이제 다 기억나.”

“가끔 우울한 날이면 그 초상화를 보면서 웃었어요. 당신이 날 버리고 루스울프로 진군했다는 소식을 듣던 날에도. 눈물은 나는데 어이없게도 웃음이 터지지 뭐예요.”

크리스틴은 걸음을 멈추며 아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달빛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 안에서 가장 신비롭게 빛났다.

빨려들 것 같은 그 눈을 응시하며 그의 목울대가 흔들렸다.


“그렇게라도 웃어주었다니 고마워.”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짓지 말아요. 당신이 없다고 매일 울고만 지낸 건 아니었으니까.”

“마크와 아이들 덕분이었겠지?”

“그래요. 내겐 더없이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어서 제이드가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어.”

“나도 최선을 다해서 그 아이를 살릴 방법을 찾아볼게.”

“고마워요.”

“대신 당신도 하나 해주었으면 하는 게 있어.”

“뭐죠?”

코를 쓱 문지르며 머쓱한 표정을 짓던 그는 아치형의 다리를 가리켰다.


“저 다리 끝까지 함께 걷는 거. 팔짱을 끼고.”

눈이 동그래지던 아델이 곧 나직하게 웃었다.


“뭐야. 다 미신이라더니.”

초상화를 그리던 날 두 사람은 그 다리를 건넜다.

다 건널 때까지 계속 팔짱을 끼고 있으면 헤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을 따라서.

그런데 중간에 팔짱이 풀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델은 지난 시간 수백 번도 넘게 생각했었다.

그날 팔짱이 풀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하고서.


“그래. 그러니까 재미 삼아 다시 해보는 거야.”

재미 삼아…….

하지만 아델은 두려웠다. 이번에 또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염려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절대 안 놓을 거니까.”

머뭇거리던 아델은 손을 내밀어 그의 팔짱을 꼈다.

다리를 향해 한 발 내딛는데 그게 뭐라고 긴장이 되고 손에 땀이 났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맞춰 걸었다.

그렇게 거의 다 왔을 때쯤이었다.


“앗!”

꽃잎을 싣고 온 작은 돌풍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 아델의 모자가 저 멀리 날아가고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

엉겁결에 모자를 잡으려고 손을 뻗던 아델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품 안에 빨려들 듯 안긴 후였다. 그는 한 손으론 모자를 잡고, 또 한 손으론 아델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다리의 끝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자, 다 왔어.”

“크리스…….”

그를 바라보는 아델의 머리 위로 분홍 꽃잎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꽃잎을 떼어내던 크리스틴이 중얼거렸다.


“부드럽군. 마치 당신 입술 같아.”

아델은 조용히 웃었다.

발끝을 살며시 들어 올리고 그의 양 뺨을 감싸며 속삭였다.


“달빛이 늑대에게만 마법을 부리는 건 아닌가 봐.”

그는 홀린 사람처럼 요염한 붉은 입술을 집어삼켰다.

가지고, 가지고, 아무리 가져도 부족한 연인들이었다.


 

***



“레아나, 넌 지금까지 너무 많은 힘을 썼어. 네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지?”


“당신 알고 있었어?”


“물론.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니까.”


“모리스…….”


“이건 널 위해 주는 선물. 네 힘을 통제해 널 살리려는 배려지. 하지만 거스르면…….”

 
촤르르륵!

두꺼운 커튼을 열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으윽!”

레아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괜찮니? 웬 식은땀을…….”

아델이 걱정스러워하자 레아나는 얼른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더워서 그래요. 더 잘 거니까 나가줘요.”

“아픈 건 아니지?”

“당연하죠.”

“그럼 일어나. 조금 있으면 해가 지게 생겼어.”

레아나는 아예 베개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중얼거렸다.


“놔둬요. 마법사는 원래 야행성이라고요.”

“너 주려고 애플파이를 구웠는데 정말 안 일어날 거야?”

애플파이라는 말에 레아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걸 간파한 아델이 유혹하듯 속삭였다.


“오늘 파이는 정말 역대급으로 잘 구워졌는데.”

레아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순간, 아론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하세요, 세계 최강 마법사 누나.”

“핫! 깜짝이야!”

까르르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 레아나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니, 눈을 뜨자마자 햇살처럼 밝은 아이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안녕, 아론. 오늘은 더 잘생겨 보인다.”

씩 웃으며 아론의 뺨을 살며시 잡아 흔들어주자, 아론도 똑같이 그녀의 뺨을 흔들었다.


“별말씀을요. 누나도 엄청 예뻐요.”

레아나는 어이없어하며 아델을 돌아보았다.


“아델, 얘는 대체 누굴 닮은 거예요?”

“타고났어. 우리 아론이 좀 많이 똑똑하거든.”

아델은 레아나의 팔을 끌어당겨 일으켜 앉혔다. 잔뜩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길게 굽이치며 햇살을 받아 넘실거렸다.


“와, 아델도 어쩔 수 없는 고슴도치 엄마네.”

“그럼. 그런데 잊은 거 아니지? 돌아오면 다 같이 애플파이 먹기로 한 거.”

“그랬죠…….”

웃는 아델의 얼굴을 보자 레아나도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엄마와 아빠가 살아계시던 행복한 아침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누군가의 미소를 보며 눈을 뜨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던 식탁.

하지만 레아나는 그때의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파이를 먹자고 아론까지 데려온 건 아니겠죠?”

“맞는데.”

그 순간 아론이 물었다.


“근데 누나는 제이드 형을 안 아프게 할 수 있죠? 엄청 센 마법사니까.”

레아나가 서늘해진 표정으로 아델을 노려보았다.


“결국 아론까지 동원해서 제이드를 치유해달라고 압박하러 온 거네요.”

아델이 애교스럽게 웃었다.


“압박은 아니지만 의도가 없다곤 할 수 없겠지.”

레아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이드는 내 힘으로 안 돼요.”

“넌 죽었던 폐하도 살렸다고 들었어.”

“그래서 폐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셨죠. 마법을 쓰면 제이드도 죽음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그래도 네가 한 번만 봐주면…….”

“그러다 골렘이나 언데드로 깨어나도 좋아요?”

“……!”

“미안해요, 아델.”

“아니, 괜찮아. 하지만 애플파이는 널 위해서 구운 게 맞아. 얼른 옷 갈아입고 동쪽 테라스로 와.”

“치, 파이를 먹다가 체할지도 모르겠네요.”

“내 파이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기 때문에 괜찮아. 그럼 빨리 나와.”

아델이 아론과 나고 난 뒤에도 레아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조금 전 꿈이 너무 생생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모리스에게 안겨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다정하게 키스를 했던 것 같은…….


“웩, 기분 나빠!”

레아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생각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모리스의 말에 조금 울컥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레아나는 이제 점점 힘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지금껏 감당할 수 없는 마나를 쓰면서 생명력까지 소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비밀을 그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위로하고 이해해주었다. 그래서…….


“젠장! 모리스, 인큐버스(夢魔) 같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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