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D-Day
(143/155)
143화. D-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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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D-Day
2023.06.16.
볕이 잘 드는 2층 테라스는 형형색색의 봄꽃이 가득했고, 원형 테이블 위에 디저트와 애플파이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짐머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꽃을 감상 중이었지만, 크리스틴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이었다.
“놈들의 귀에 있던 상처가 계속 마음에 걸려.”
“혹시 모리스가 귀에 벌레라도 집어넣은 걸까요? 그래서 가려워 긁었을지도.”
“벌레가 자결하게 만들었다고?”
크리스틴이 어이없어하자 짐머는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뭐 벌레가 귀에 들어가서 속삭였나 보죠. 죽어라, 그렇게.”
“네놈이 죽고 싶으냐?”
“아니면 말고요.”
그때 아델과 아론이 테라스로 들어왔다.
심각하던 크리스틴의 표정이 금방 밝아졌다.
“레아나는 뭐래?”
“자기 마법으로도 제이드를 살리기 힘들대요.”
“그러게 내가 얘기한다고 했잖아.”
“아뇨, 레아나가 정말 할 수 있었다면 했을 거예요. 괜히 또 말 꺼내지 말아요.”
“음…….”
아델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크리스틴은 뭔가 이상했다. 레아나의 치유술이라면 죽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든 살릴 수 있었다.
자신처럼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레아나가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어?”
“있었어요!”
크리스틴의 물음에 아론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 뭐지 아론?”
“누나가 자면서 울었어요.”
“자면서 울어?”
다들 놀랐다. 레아나는 그런 성격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네, 그리고 아주 작게 모리스…… 라고 했어요. 모리스는 누나 친구예요?”
“정말이니, 아론?”
아델이 묻자 아론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꽁!
“요 꼬맹이!”
마침 테라스로 들어온 레아나가 아론을 쥐어박았다.
“아야! 아파요!”
레아나는 아론의 머리를 문질러주며 사람들에게 해명했다.
“모리스를 못 잡은 게 분해서 꿈까지 꾸며 울었나 봐요. 그 개 후레자식, 잡히면 정말 뼈와 살을 발라 가루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흠흠, 레아나 양, 아론이 듣고 있답니다.”
짐머가 당황한 아론의 부모를 대신해 조심스럽게 주의를 주었다.
“와, 애플파이 맛있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아나는 어느새 파이 한 조각 입안 가득 쑤셔 넣었다.
하지만 그런 레아나를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눈빛은 예전보다 더 날카로워졌다.
***
며칠 후.
“내일 정말 괜찮겠어?”
마블궁에 있는 호숫가를 산책하며 크리스틴이 물었다.
봄이 절정에 달해 주위는 온갖 꽃들로 눈이 부시게 화사했다.
그러는 동안 성당 바자회가 내일로 다가왔고, 아직 모리스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평화로운 봄날이었다.
아델은 씩씩하게 웃었다.
“모리스와 이자벨을 속이려면 내가 있어야 해요. 그들이 내일 움직이지 않으면,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를 불상사를 막을 수 없잖아요.”
크리스틴은 더는 아델을 설득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한번 마음먹은 일은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럼 내일 바울로를 당신 곁에 붙여둘게. 모리스가 행동을 개시하면 재빨리 몸을 피해.”
“바울로 경을요?”
“왜, 무서운가?”
바울로는 늑대 일족이었다. 일족 중엔 크리스틴처럼 완벽한 인간의 모습도 있었지만, 바울로는 늑대와 인간을 섞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걸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두려워하며 멀리했다. 지금처럼 늑대 일족에 대한 경계가 심한 시기에는 더욱.
“아뇨. 바울로 경 같은 엄청난 전력으로 고작 나를 지키는 건 낭비가 아닌가 싶어서. 듣자니 당신과 견줄만한 전사라던데.”
크리스틴이 발끈했다.
“나를 이길 수 있는 전사는 없어!”
“당신, 그러니까 레아나랑 똑같은 거 알아요? 세계 최강 마법사와 세계 최강 전사.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봐.”
크리스틴은 민망해하며 헛기침을 했다.
“사실이니까.”
“맞아요. 그리고 난, 그렇게 자신만만한 당신을 보는 게 좋아요. 꼭 치기 어린 소년을 보는 것 같거든.”
그러자 그의 표정이 금방 야릇해졌다.
“키스만 해봐도 금방 느낄걸? 그 소년이 얼마나 어른이 됐는지.”
그는 아델의 머리를 감싸며 키스할 듯 얼굴이 가까워졌다.
“어머, 저건 뭐죠?”
“어?”
크리스틴이 뒤를 돌아보자, 아델은 재빨리 나무숲 사이로 도망쳤다.
“누가 늑대 아니랄까 봐,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든다니까.”
“그러면서 으슥한 곳으로 도망치는 저의가 뭐지?”
“본능이죠.”
“아, 으슥한 곳에서 더 어른스러운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본능?”
“아뇨, 늑대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본능이요.”
옥신각신하면서 두 사람은 장난치듯 나무숲을 맴돌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이 마블궁이라는 점이었다.
수많은 시종과 하인들이 있고, 곳곳에 기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아델과 크리스틴의 몹쓸 술래잡기를 보며 혀를 찼다.
“진짜 폐하 맞습니까? 폐하의 탈을 쓴 버터 덩어리 같습니다.”
“내장이 오글거리다 못해 울렁거리지 말입니다.”
짐머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나도 아직까지 적응이 안 되거든.”
기사들은 다시 혀를 찼다.
“지금 공작님의 모습도 적응 안 되긴 마찬가지입니다.”
꽃 성애자인 짐머는 어느새 한 아름 꽃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귀 뒤에 꽃을 꽂고 있기까지…….
“흠흠, 그런데 아까부터 바울로가 안 보인다.”
얼른 귀에 꽂은 꽃을 빼내며 짐머가 화제를 돌리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바울로 대장님도 열애 중이십니다.”
“바울로가?”
“예, 며칠 전엔 외박까지 했지 말입니다.”
짐머는 제품에 한 아름 안겨 있는 꽃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허무해졌다. 봄은 바야흐로 꽃의 계절……이 아니라 사랑의 계절이 아닌가!
그걸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것이다.
‘젠장…… 바울로도 하는 연애를!’
“꺅!”
크리스틴과 장난치며 숲을 내달리던 아델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앗, 죄송합니다! 그릴스 여백작님! 괜찮으십니까?”
그녀가 누군지 깨달은 그림자는 얼른 아델을 놓고 사과했다.
그가 바울로라는 걸 알게 된 아델도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을 뿐이에요.”
그사이 크리스틴이 다가왔다.
“자넨 비번일 텐데 왜 여기에 있지?”
“그게…… 잠시 누굴 좀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요즘 만난다던 그 여자 말인가?”
“아, 예.”
“이 숲에서 만난 걸 보면 궁 안의 사람인가?”
“아직은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울로를 응시하던 크리스틴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가보도록.”
바울로가 얼른 인사를 하고 숲을 벗어나는 동안에도 크리스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왜?”
아델이 의아해하며 묻자 그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바울로가 만나는 여자, 왠지 내가 아는 사람일 것 같군.”
“당신이 아는 여자? 누구?”
***
바자회 당일 아침, 아델의 저택.
아델은 새벽부터 바빴다.
며칠 전부터 준비한 디저트와 쿠키를 포장하고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가게의 점원들은 모두 그만둔 터라 타냐와 미아가 대신 도와주었다.
미아와는 마크의 일로 잠시 서먹했지만, 제이드를 간병하고 바자회 준비를 하면서 다시 화해했다.
“짐은 다 실은 거야?”
마차에 잔뜩 실린 상자들을 보며 미아가 물었다.
“응, 이제 끝.”
봄날에 어울리는 민트색 드레스를 입은 아델은 하얀 상자를 들고 마차 앞으로 나왔다.
그 뒤를 아론이 졸졸 따라왔다.
“아론도 가면 안 돼요?”
“미안하지만, 안 돼.”
아델은 딱 잘라 거절했다.
오늘 바자회는 매우 위험했다.
반란 사제들의 조종을 받는 늑대 일족이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할지도 몰랐으니까.
크리스틴이 초기에 제압하지 못하면 제이드와 같은 희생자들이 수십, 수백 명이 이상 생겨날 것이다.
솔직히 씩씩하게 보였지만 아델도 조금 겁났다.
하지만 아이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왜요? 저번에도, 저번 저번에도, 아론이 더 어릴 때도 갔었는데.”
“그땐 제이드 형이랑 폴린 형도 같이 왔었잖아. 그런데 오늘 아론 혼자만 오면 제이드 형이 섭섭해할 거야.”
다행히 그 말이 먹힌 모양이다.
아론은 시무룩해져서 물었다.
“그럼 제이드 형이 깨어나면 같이 가도 돼요?”
어느새 다가온 마크가 아론을 번쩍 안아 달랬다.
“그래, 제이드가 깨어나면 다 같이 가자.”
그리고 아델을 안아주면서 속삭였다.
“조심해요, 아델.”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역시 오늘 벌어질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염려 말아요. 그리고 아이들을 무사히 지켜줘요.”
“음.”
아델이 마차에 올라타자 레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그녀는 언제나처럼 쾌활해 보였다.
“오늘 아델의 호위는 저와 바울로가 맡을 거예요.”
“레아나 너까지?”
“갑자기 그렇게 됐네요. 폐하께서 아델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겠죠?”
“그래, 엄청 든든하네.”
레아나는 진지하고도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만 명심해요. 난 목숨 걸고 아델을 지킬 거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물론이야, 레아나. 나도 최선을 다해서 지킬 테니 우리 잘해보자.”
“어쩐지 아델이 날 지키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대답 대신 아델은 들고 있던 하얀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무심히 보던 레아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거 설마?”
“응, 폐하에게 선물 받았어. 예쁘지?”
기존에 아델이 갖고 있던 피스톨의 성능을 좀 더 보완해서 크리스틴이 돌려준 것이다.
“쏠 줄은 알아요?”
대답 대신 아델은 손가락으로 피스톨을 휘리릭 돌리더니 가터링에 달린 주머니에 꽂았다. 그 행동이 매우 능숙했다.
“이제부터 날 세계 최강 총잡이라고 불러줘.”
“뭐야, 유치하게…….”
“세계 최강 마법사만큼?”
인상을 쓰던 레아나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자 아델도 같이 웃었다.
다각다각.
그러는 동안 마차는 쉬지 않고 바자회장을 향해갔다.
***
이번 바자회의 규모는 역대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당 광장 잔디밭에는 수십 개의 판매대가 놓였고, 분수대 옆에 마련된 중앙 무대에는 수많은 사람이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벌써부터 들뜬 아이들은 잔디밭을 뛰어다녔고, 화창한 봄날의 이벤트를 기대한 시민들이 하나둘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행사장 입구마다 칼라임 수도 경비대와 황제의 W.G 기사단이 경비를 서는 중이었다.
그들은 입장객들의 신분증과 소지품을 검사했는데 까다로운 절차에도 다들 순순히 응했다.
그 외에도 행사장 중간마다 많은 수의 병력이 대기 중이었다.
누가 봐도 철저하게 준비된 행사였다.
그리고 성당의 높은 종탑 위에는 로브의 후드를 깊이 눌러 쓴 두 남녀가 서 있었다.
그들은 푸른 잔디밭 아래 움직이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살피는 중이었다.
“병력 배치는 입수한 자료대로군요.”
행사장 상황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검은 머리카락 탓인지 갸름한 얼굴이 유독 창백해 보여서 병약한 소년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가 바로 반란 사제 조직을 이끌고, 유일하게 크리스틴과 대적하는 모리스였다.
“당연하죠. 그 괴물 같은 작자를 꾀어내느라 꽤 고생했다고요.”
“수고하셨습니다, 세이라님.”
수많은 소문과 달리 세이라는 반란 사제들을 돕고 있었다.
내부에서는 모리스의 정부로 더 잘 알려져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