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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드리워지는 먹구름 (144/155)


144화. 드리워지는 먹구름
2023.06.19.



 


“황제가 왔네요.”

세이라는 크고 화려한 마차에서 내리는 크리스틴을 응시했다.

이자벨과 성당 주교가 나와 그를 직접 맞이했다.

칼라임의 영웅일 때도 존재감이 남다른 남자였다. 그런데 황제의 하얀 정복을 입고 수많은 기사를 거느린 모습에선 형용할 수 없는 근엄함과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런 남자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닌 아델에게 빼앗긴 것이 세이라는 새삼 분했다.

물론 오늘 계획이 성공한다면 아델과 단숨에 지위가 역전되겠지만.

그래서 이 계획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오늘 자신 있나요, 모리스?”

그의 입매에 엷게 미소가 번졌다.


“이날만 기다렸습니다.”

“너무 자만하지 말아요. 황제는 결코 쉬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걸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지난 6년 동안 크리스틴은 교황청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신성 능력으로 대항하는 사제들은 자비 없이 처형했다.

그로 인해 지금 교황청과 성당에 남은 사제들 능력을 쓸 줄 모르는 자들뿐이었다.

모리스를 비롯해 신성 능력을 쓸 줄 아는 사제들은 반란 사제가 되었다.

그들은 황제를 공격할 비장의 무기를 준비하며 지금껏 숨죽여 온 것이다.


“그럼 이제 움직여 볼까요?”

모리스는 조금 들뜬 얼굴이었다. 마치 소풍 가기 전날의 아이처럼.

***

규모가 커지고 경비가 강화되었다는 것 외에 예년과 다름없는 행사였다.

늘 그렇듯 아델의 디저트는 꼬마 손님들에게 인기였다.

덕분에 레아나는 팔자에도 없는 디저트 판매원이 되었는데, 썩 잘 어울렸다.

손님들이 정신없이 밀려들자 뒤에 멀뚱멀뚱 서 있던 바울로까지 돕기 위해 나섰다.

그는 기사단의 제복 대신 평범한 정장에 실크 해트를 깊이 눌러쓰고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얼마 전의 사건으로 사람들이 늑대 일족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바울로처럼 한눈에 드러나는 늑대 일족은 특히 기피의 대상이었으니까.

그가 바닥에 있던 쿠키 상자를 들어 올릴 때였다.


“어, 늑대 일족이다!”

아까부터 빤히 그를 바라보던 아이가 외쳤다.

놀란 사람들은 너도나도 아이들을 안고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아델의 판매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늑대 일족은 입장을 금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또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황제가 늑대 일족인데 가능하겠어요?”

“징그러워. 저 짐승들은 대체 언제 돌아간대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아델에게까지 들려왔다. 청각이 뛰어난 바울로의 귀에는 더 잘 들렸으리라.

아델은 당황한 바울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떠드는 말은 그냥 흘려버려요. 난 그런 거에 아주 익숙한데, 바울로 경은 어때요?”

“예, 저도 신경 안 씁니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잔뜩 의기소침했지만.

그러자 레아나가 사람들을 비웃었다.


“웃겨. 늑대 일족보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살인 사건 비율이 훨씬 더 높은 걸 모르나? 그럼 사람들도 입장을 금지시켰어야지. 잠재적 살인자들인데.”

“레아나 그만.”

아델이 말렸다.

한때는 그녀도 엄마를 죽인 늑대 일족이라는 이유로 크리스틴을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살인자가 아닌 것처럼, 늑대 일족이 모두 사람을 공격하는 건 아니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아델이었다. 그럼에도 판매대를 멀리 돌아가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부모의 손에 끌려가며 아이들은 계속 아델의 디저트와 쿠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은 여기 있어요.”

하는 수 없이 아델은 쿠키 상자를 들고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레아나가 말렸지만 아델은 단호했다.


“이대로라면 사람들과 늑대 일족 사이가 더 벌어질 거예요. 그건 폐하의 통치에도 좋지 않은 일이죠. 오늘 수익금은 전부 바울로의 이름으로 기증할 거예요.”

“내조 한번 기가 막히네요.”

투덜거리며 레아나도 쿠키 상자를 들고 따라나섰다.

***

바울로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나무 그늘에 서 있었다.

무시무시한 겉모습과 달리 그는 감수성이 여린 남자였다.

아델이 사람들 틈에서 쿠키 파는 걸 보고만 있을 뿐 함부로 끼어들 수 없었다.

괜히 또 사고만 칠 것 같았으니까.

무엇보다 그녀의 옆에는 최고의 마법사인 레아나가 있지 않은가?


“쳇! 빨리 바하마르트로 돌아갔으면 좋겠군. 이 옷도 영 불편하고, 구두도.”

몸에 맞지 않는 옷과 신발을 신고 투덜거릴 때였다.


“심심해 보이시네요.”

간드러진 목소리에 돌아보니 금발에 푸른 눈의 미녀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세이렌!”

바울로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녀는 하얀 레이스 양산을 팽그르르 돌리며 물었다.


“근무 중이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런데 정말 근무 중인 거 맞아요?”

처음 입어본 정장과 실크 해트가 어색해서 바울로는 멋쩍게 웃었다.


“차림이 좀 이상하죠?”

“아주 근사해요. 그런데 그런 옷을 입고 근무를 서나요?”

“일종의 잠복근무 중이죠. 사람들이 날 보면 놀랄지도 모르니까.”

“어머 왜요? 난 바울로 님의 원래 모습도 멋있는데. 사내답고, 강인해 보이잖아요. 그걸 몰라보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거죠.”

바울로의 얼굴이 불그레 달아올랐다.


“세이렌만 좋아해주면 됐어요. 그래서 말인데, 저……, 난 곧 있으면 바하마르트로 떠나요. 우리 같이…….”

바울로의 말을 막으려는 듯 여자는 그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것만으로도 바울로는 가슴이 마구 두근거려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보다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어요? 늑대 일족과 교제한다니까 오라버니가 걱정해서요. 시기가 좀 그렇잖아요.”

바울로의 표정이 흔들렸다.


“세이렌의 오라버니 말인가요?”

“네, 잠시 인사만 하면 돼요. 바로 뒤에 와 있거든요.”

바울로는 다시금 아델과 레아나를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럼 아주 잠시만.”

 

***

아델과 레아나가 한창 쿠키를 팔고 있을 때였다.

그녀들을 향해 크리스틴이 다가왔다. 그는 바이스 가문을 상징하는 새하얀 황제의 정복에, 눈부신 은빛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왔다.

덕분에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황제 폐하신가봐…….”

누군가 중얼거렸다.


“저분이 폐하시라고?”

사람들이 생각했던 황제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으니까.

교황청을 무너뜨리고 세계를 정복한 피의 황제.

거친 늑대 일족을 다스리는 짐승의 왕.

소문 속의 황제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야수일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신성하고 초월적인 존재 같았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그가 아델을 향해 활짝 웃는 순간 다들 넋을 잃었다.

그가 그 무시무시한 늑대 일족이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었다.


“귀찮게 하는 손님은 없었나?”

“물론이죠. 그리고 진상 손님 상대는 이골이 났거든요.”

레아나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리고 원래 진상은 자기가 진상인 줄 모른다죠.”

“그 얘기를 왜 날 보면서 하지?”

인상을 쓰는 크리스틴에게 레아나가 귀엽게 혀를 쏙 내밀었다.


“찔리시면 이거 다 사주시던가요. 아니, 이것까지.”

그녀는 자기가 들고 있던 쿠키 상자와 아델이 들고 있던 상자까지 그의 앞에 내밀었다.

어이없어하던 크리스틴이었지만 곧 호탕하게 수락했다.


“좋아. 다 사지.”

“많이 비쌀 텐데.”

장난스럽게 떠보는 아델을 향해 그는 플래티넘 금화가 든 주머니를 건넸다.


“부족한가?”

“뭐, 조금 부족하지만 대량 구매니까 할인해드리죠.”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서던 아델은 주변의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쿠키를 나눠주었다. 황제가 사줬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들도 크리스틴에게 멋쩍게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면 진짜 내조의 여왕이시네요.”

짐머가 크리스틴에게 슬쩍 속삭였다.


“그럼. 누가 고른 여잔데.”

그때 아델이 무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공연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고 올게요!”

“당신이 직접?”

“금방 올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하는 크리스틴에게 레아나가 말했다.


“제가 따라갈 테니 염려 놓으세요.”

그런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던 크리스틴이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짐머.”

“예, 폐하!”

“바울로가 계속 안 보인다.”

그는 아델과 있을 때의 달콤하고 상냥하던 표정을 가면처럼 지운 얼굴이었다.


“제가 가서 찾아볼까요?”

짐머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친 구석은 있었지만 누구보다 우직하고 책임감 강한 바울로였다.

그런 그가 근무 중 자리를 이탈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 W.G 기사 한 명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폐하!”

“무슨 일인가?”

“모리스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모리스가?”

“예, 성당 후원에서 놈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짐머와 크리스틴은 눈빛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역시 예상대로입니다. 준비시켜둔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놈은 교활한 자다. 각별히 조심하도록.”

“예, 폐하! 가자!”

짐머는 주위에 있던 기사들을 모아 달려나갔다.

***

짐머가 사라지자, 곧 바울로가 허겁지겁 나타났다.


“폐하! 오셨습니까?”

크리스틴은 말없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울로를 바라보았다.

어제 바울로에게서 맡았던 그 여자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어제 그 여자를 또 만난 건가?”

바울로는 내심 놀란 표정이었다.


“그걸 어떻게?”

그랬다. 크리스틴은 세이라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좋은 향기는 좋은 추억으로 오래 기억에 남았지만, 그렇지 않은 향기 역시 나쁜 기억으로 오래 가긴 마찬가지였다.

정보에 따르면 그녀는 현재 모리스와 함께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바울로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게 분명했다.

크리스틴은 그걸 다시 이용할 생각이었고.


“그래, 내가 지시했던 일은?”

“말씀대로였습니다. 세이렌이 남자를 데려왔는데 오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키신 대로 주머니에 몰래 그 동전을 넣어뒀습니다.”

그는 오늘 세이라가 바울로에게 다시 접근할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그들을 쫓을 수 있는 ‘트래킹 코인’을 넣어두라고 시킨 것이다.


“그래, 수고했다. 그런데 그 귀……, 가려운가?”

“예?”

“계속 긁고 있다.”

바울로는 크리스틴과 대화하는 도중에도 쉬지 않고 귀를 긁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귀는 상처가 날 정도로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폭주하다가 죽은 늑대 일족과 비슷한 상처였다.


“그게…… 뭐에 물렸는지 자꾸만 간지러워서요.”

“그녀의 오빠를 만난 후부터?”

잠시 생각하던 바울로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실은 세이렌의 오빠라는 사람을 만난 건 기억나는데, 이상할 정도로 그 뒤의 일들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심지어 어떤 얼굴이었는지도요.”

“그랬을 거다.”

“폐하께선 그가 누군지 알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제게 그런 일을 시키신 거고. 대체 누구입니까, 그는?”

크리스틴은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바울로는 세이라에게 진심인 것 같았다.

생전 처음 연애를 한다며 들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걸 알면 크게 상처받을 것이다.

하지만 숨긴다고 계속 숨겨질 일도 아니리라.


“놈이 바로 모리스다.”

바울로의 온몸이 꿈틀하며 근육이 솟아올랐다.


“이 자식! 찾아서 죽여버리겠습니다!”

크리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어서 케니에게 가라.”

“케니는 갑자기 왜……?”

“모리스가 널 이용하기 위해 어떤 마법을 걸었을 거다. 그래서 귀가 간지러운 거고.”

그때였다.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행사장의 공기를 갈랐다.

무대의 공연을 관람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바울로, 어서 케니에게 가라!”

크리스틴은 소리치며 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무대 위에는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 있던 남자는 몸집이 서서히 거대해지며 늑대로 변하는 중이었다.


‘젠장, 벌써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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