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사랑은 치명적인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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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사랑은 치명적인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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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사랑은 치명적인 약점
2023.06.23.
팔랑팔랑~.
분홍 꽃잎 하나가 세이라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입술로 후우, 불어 날리며 꽃잎이 날아가는 곳의 풍경을 응시했다.
“생각보다 큰 녀석이네.”
행사장의 무대 위에 거대한 늑대가 서 있었다.
“크아아앙!”
끔찍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대기를 가르자,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달아나는 사람들 속에서 황제는 우뚝 선 채로 자신의 일족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세이라는 재미있다는 듯 창밖으로 몸을 더 내밀었다.
“황제가 생각보다 덜 당황한 것 같아요. 역시 오늘 일을 예상했나 봐.”
“상관없습니다. 그에게 약점이 있는 한 우리의 승리니까.”
“하긴. 그는 저주에 걸려 아델을 떠올릴 때마다 고통받는다죠. 마블궁에 그 많은 약이 들어갔던 게 그 이유였다니.”
마크가 이자벨에게 전해준 얘기가 그들에게까지 흘러간 것이다. 하지만 마크는 크리스틴의 저주가 풀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랑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니까요.”
세이라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나요, 모리스?”
모리스는 못들은 사람처럼 날카롭게 황제를 주시할 뿐이었다.
세이라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와 함께 같은 곳을 응시했다.
모리스의 정부.
반란 사제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로 자신과 그의 사이는 특별했다. 아니, 특별해 보였다.
하지만 실상 모리스와 한 침대에 있어도 특별한 사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동업자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뭐, 상관없었다. 사제들은 자신을 모리스의 여자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황제를 없애고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다면 최고의 레이디가 될 것이다.
그러면 몰락한 오스월드 가문도 되살릴 수 있으리라.
이자벨은 공개 처형하고, 아델은…….
‘납골당이 있던 그 지하실에 평생 가둬놔야지.’
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참, 크라이튼 공작과 부하들은 어떻게 됐나요?”
모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나른한 어투로 대답했다.
“지금쯤 결계 안을 맴돌고 있겠지요. 빠져나왔을 때는 모든 상황이 끝났을 거고요.”
모리스를 잡겠다고 달려나갔던 짐머는 사제들의 결계 마법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계속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으리라.
“황제 옆의 개를 떼어냈으니 이제 황제 차례로군요?”
“그에게 근사한 선물을 줄 시간이죠.”
“궁금하네요. 황제가 자기 일족을 죽일지, 아니면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일족을 지킬지.”
“어느 쪽이든 궁지에 몰리겠죠.”
모리스는 몸을 돌려 예배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곳의 성가대석은 이미 삼십여 명의 흰옷을 입은 사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기다란 교황의 홀이 쥐어져 있었다.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사제들이 그토록 그를 따르는 이유였다.
“시작하세요.”
지시가 떨어지자, 예배실 가득 성가곡이 울려 퍼졌다.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저 청아하고 신비로운 노래였다.
키이이이…….
그 순간 모리스의 손에 들린 교황의 홀이 빛나기 시작했다.
홀에서 나온 빛이 사제들 몇 명을 감싸자 그들은 갑자기 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키이이이…….
점점 높고 가늘어지는 소리는 일반인이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역대를 넘어섰다.
청각이 발달한 늑대 일족에게만 들릴 터였다.
그리고 이 소리는 모리스가 실험체로 썼던 늑대 일족을 조종하는 주문이 될 것이다.
***
“공연 도중 실랑이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변이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폐하?”
W.G 기사가 얼른 달려와 크리스틴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크리스틴은 아무리 자신의 일족이라도 늑대로 변해서 무고한 사람을 해치면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리스가 계획한 상황일지도 몰랐으니 신중해야 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고 지켜본다. 근처에 수도 경비대의 숫자도 충분하니.”
그는 이미 주변에 있는 수도 경비대의 위치와 숫자를 파악해 놓았다.
늑대화가 진행된 놈이 폭주하면 대응이 가능한 거리에 오십여 명 남짓이 있었다. 모두 무장한 상태. 행사장 주위에도 이백여 명의 칼라임 병력이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 행사의 안전 책임은 칼라임의 소관이었다. 그들의 손에서 사건이 마무리되는 게 가장 최선이었다.
크리스틴이 끼어들면 어디서 어떤 얘기가 흘러나올지 몰랐다.
늑대 일족들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딱 비난받기 좋은 상황.
다행히 놈은 아직 폭주하기 직전이었으니 이대로 얌전히 물러나 주기만 하면…….
하지만 상황이 아무래도 최악으로 번질 모양이다.
스스스…….
무대 위의 놈 외에도 곳곳에 늑대로 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수도 경비대의 옷을 입은 자들이었다.
모리스가 수도 경비대로 위장시켜서 들여보냈을 것까진 예상 못 한 상황.
“제길, 한 방 먹었군.”
“어떻게 할까요, 폐하?”
어느새 오십여 명 남짓의 수도 경비대들이 늑대화가 되었고, 행사장에 있던 사람 중에서도 늑대로 변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더 절망적인 건 주변에 경계를 서던 칼라임의 병력이 모두 빠지고 없다는 것.
놈들과 이자벨이 손을 잡았으니 당연한 거였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병력은 이제 크리스틴과 W.G 기사단뿐이었다. 일부는 짐머가 데려가는 바람에 그마저도 절반뿐이었다.
“일족을 부활시켰으니 그 책임도 내가 져야겠지.”
스릉!
크리스틴이 레이피어를 뽑자,
스릉! 스릉!
그의 기사들도 모두 무기를 빼 들었다.
***
“아델, 돌아보지 말고 잘 들어요.”
레아나가 아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우린 지금 여기서 도망칠 거예요.”
스스스…….
수많은 사람이 늑대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그런데도 잔뜩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미친 듯 달아나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폐하가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런데 아델이 모리스에게 잡히면 일이 복잡해지는 거 알죠?”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건 크리스틴뿐이었다.
그러려면 자신이 그의 발목을 잡아선 안 될 것이다.
“무대 뒤에 마차가 있어요. 신호를 보내면 그쪽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음.”
아델은 무대 너머로 보이는 마차를 확인했다.
“지금이에요!”
레아나가 소리치자 두 사람은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짐승들이 사납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크아악!
놈들은 일제히 괴로운 듯 귀를 잡아 뜯고 괴성을 질러댔다.
두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고 입에서 침을 흘리기도 했다.
마치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보였다.
“간수들이 그러는데 죽기 직전 모두 끔찍한 괴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마치 괴로워서 울부짖는 것처럼.”
시체를 부검한 검시관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
어딘가에서 모리스가 저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델, 먼저 가요!”
아델을 마차에 태우며 레아나가 소리쳤다.
“레아나, 너는?”
레아나가 씩 웃었다.
“난 세계 최강 마법사라고요. 출발해!”
레아나의 명령에 아델을 태운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옆으로 서너 명의 기사들이 호위하며 말을 달렸다.
***
혼자 남은 레아나는 성당 건물을 응시했다.
햇살 아래 아치형 창문의 오색 유리가 눈부시게 빛났다.
열린 창틈으로 성가곡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곳의 끔찍한 상황과 상관없이 청아하고 경건한 노랫소리였다.
하지만 레아나는 노랫소리에 고대어 주문이 섞여서 들려오는 걸 알았다.
그것은 끔찍한 저주와 분노의 주문.
모리스가 데려온 늑대 일족은 다들 저 주문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모리스 자식, 기어이……!’
그는 예전부터 뛰어난 전사인 늑대 일족을 교황청의 병기로 만들고 싶어했다.
영원히 죽지도 못한 채 자신들을 위해 살육을 일삼는 기계로.
‘네놈 죽여주마!’
그래야 이 끔찍한 참상도 멈출 수 있으리라.
그때였다.
“크아아아앙!”
땅을 진동시키는 울부짖음에 돌아보니 바울로가 늑대로 변해 다가오고 있었다.
일족 최강의 전사인 그는 덩치도 엄청났고, 뿜어져 나오는 살기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제길! 이 자식도 모리스에게 당한 건가?”
그 순간 레아나는 성당의 열린 창문 사이로 모리스를 보았다.
빛나는 색유리창 사이에서 그는 레아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살육자의 미소치곤 너무 평온했다.
그 미소를 보는데 레아나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뭐지 이 기분은?’
그게 몹시 화가 나서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개자식, 모리스. 넌 이제 끝장이야!”
꿈속에서 모리스가 말한 대로였다.
마법사로서 그녀의 생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6년 동안 감당할 수 없는 마나를 사용하느라 몸이 급격히 망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이대로 모리스를 놓칠 칠순 없었다.
레아나가 마나를 끌어모으자, 온몸이 하얀빛으로 둘러싸였다.
“크아아아앙!”
이를 저지하려는 듯 바울로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레아나는 그대로 모리스를 향해 몸을 날리며 눈부신 빛을 쏘아냈다.
“ੴਈਜ਼ਭਉ !”
퍼어엉!
챙그랑……!
성당 벽 한쪽이 비스킷처럼 부서져 나가고, 오색 유리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하지만 모리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와, 모리스!”
흥분해서 씩씩대는 레아나와 달리 조용한 모리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레아나 경고했을 텐데. 너는 이제 마법을 쓰면 안 된다고.”
그는 어느새 성당 아래의 화단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마치 햇볕을 쬐는 사람처럼 여유 있고 한가로웠다.
“죽여버릴 거야, 개자식!”
모리스를 쫓아 레아나는 다시 화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꺄아악!”
하지만 갑자기 끔찍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거봐, 아무리 타고난 마법사라도 한계는 있는 거라니까.”
모리스는 자신의 발아래 뒹굴고 있는 레아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이 개……!”
그 순간 모리스가 몸을 굽혀 레아나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 예쁜 입으로 한 번만 더 욕하면 혼내줄 거다, 레아나.”
레아나는 그의 손가락을 물어뜯을 것처럼 이빨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납게 소리 질렀다.
“이 후레자식! 갈가리 찢어 죽일 거야! 뼈를 갈아 마시고 내장을 뽑아……&$%&!”
그 후로도 레아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욕설을 쏟아냈다.
하지만 모리스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낭랑하게 울리던지 세이라가 부서진 창가에서 내려다볼 정도였다.
‘모리스, 어쩐지 즐거워 보이네.’
하긴 그토록 애를 먹인 상대를 굴복시켰으니 즐거운 게 당연한 건가?
세이라는 구경하듯 턱을 괴고 모리스와 레아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모리스의 저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안을 때도 그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음 따위라곤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이 욕망으로 뜨거웠다.
그 눈에 담긴 건 승부욕이나 승리감 같은 게 아니었다.
갖고 싶어 열망하는 눈빛.
원하고, 집착하고, 애정하고, 오로지 상대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
‘말도 안 돼!’
그 순간 모리스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조금 전 세이라가 본 게 허상이었던 것처럼.
“말을 안 들었으니 이제 혼이 날 차례인가, 레아나.”
“무슨……!”
“ਉ੮ਪਆ !”
모리스가 짧은 고대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레아나의 하얀 살결 위로 붉은 고대어가 스멀스멀 퍼져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