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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죽이는 타이밍 (146/155)


146화. 죽이는 타이밍
2023.06.26.



“ਉ੮ਪਆ !”

모리스가 짧은 고대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레아나의 하얀 살결 위로 붉은 고대어가 스멀스멀 퍼져가기 시작했다.


“꺅! 무슨 짓이야!”

놀란 레아나는 살갗을 잡아 뜯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모리스가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아직 그녀의 얼굴에는 고대어가 새겨지기 전이었다. 붉은 글자들 속에서 레아나의 은빛 머리와 하얀 얼굴이 유난히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말했을 텐데. 이건 널 위해 주는 선물이라고. 앞으로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 널 살리려는 내 배려지.”

레아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건 널 위해 주는 선물. 네 힘을 통제해 널 살리려는 배려지. 하지만 거스르면…….”

 
꿈속에서 모리스가 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황제를 버리고 내게 복종해, 레아나.”

“미친 X끼, 닥쳐!”

“네가 날 거스르고 마법을 쓰면 이 고대어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네 살을 먹어치우고 널 갈가리 찢어놓겠지.”

꿈속에서 기억나지 않던 뒷말이 이거였나?

레아나는 겁에 질린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죽음이 난무하는 숱한 전쟁터를 다니면서도 늘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틴과 동료들이 있어서였다. 그들이 구해줄 것을 믿었기에.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오롯이 혼자 겪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강력한 마법 앞에 한없이 무력해진 자신에게 절망했다.


“으윽, 죽여버릴 거야! 개자식…….”

“레아나, 정말 다 잊었구나. 넌 사흘 동안 내 포로였고, 우린 같이 아주 많은 일을 했는데.”

순간 레아나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사흘 동안…… 네 포로……?”

그의 손이 관능적으로 그녀의 턱을 쓸어올리고 뺨과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래, 넌 아주 말을 잘 듣는 포로였지. 늑대 일족을 고대어로 부릴 수 있게 도움을 준 것도 너였어. 나 혼자였으면 오늘처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을 거야. 이건 우리 둘의 작품인데, 꽤 멋지지 않아?”

“닥쳐!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레아나는 울부짖었다.

모리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상황을 만드는 데 자신도 일조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놈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은 사흘 동안의 기억이 없었다.

자신을 따라왔던 기사들도 갑자기 사라진 그녀를 찾느라 애를 먹었단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생생하던 그 소름 돋던 꿈…….


“아마 너 스스로 그때의 기억을 지웠을 거야. 용납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네 몸에 있는 이 고대어가 그 증거야. 우리가 함께한 추억이랄까?”

모리스는 키스할 듯 입술 위에 속삭였다.


“말 잘 듣는 레아나는 참 예뻤는데. 키스도 아주 달콤했고.”

“아아악! 죽어, 모리스!”

레아나는 폭주하듯 마나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감싼 고대어가 살갗 속으로 파고들었다.


“푸학!”

레아나는 울컥, 시커먼 핏덩이를 토하며 쓰러졌다.

살갗은 칼에 베인 것처럼 여기저기 피가 흘러내렸다.

모리스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지, 레아나.”

서슬 퍼런 목소리와 함께 그는 마나를 끌어 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타앙!

순간,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총알이 날아왔다.

그가 재빨리 몸을 날려 피하자,

두두두……!

마차 한 대가 레아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레아나! 잡아!”

레아나가 흐릿한 시선을 들자 아델이 마차의 문에 매달려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 차림의 사람들이 스르르 나타나 모리스를 에워쌌다. 케니와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이 나직하게 주문을 외자,

화르르!

모리스의 주위로 시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이에 질세라 어느새 흰옷의 사제들도 유령처럼 나타나 모리스를 호위했다.

양쪽의 마법사들이 서로 마나를 끌어 올리자, 불꽃과 바람이 회오리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델……!’

한편, 레아나는 자신을 구하러 달려오는 아델을 보자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

‘알면 이토록 필사적으로 나를 구하려고 할까?’

하지만 아델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 손만 잡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델이라면, 폐하라면, 어쩌면…… 나를 용서해줄지도.


“레아나 어서!”

마차가 점점 가까워졌다.

늑대화가 된 자들도 사방에서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슈칵! 슈칵!

아델을 호위하는 기사들은 놈들을 계속 베어내며 마차를 따라붙었다.


‘……살고 싶어! 살려줘!’

레아나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아델의 손을 잡았다.


“다시 돌아와서 미안. 세계 최강 마법사가 걱정돼서.”

그 따뜻한 품에, 걱정하는 목소리에 레아나는 저도 모르게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아델, 아델! 으으흑! 아아앙!”

레아나는 안쓰럽도록 몸을 떨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래, 괜찮아…… 괜찮아.”

그때였다.

덜컹!

마차가 심한 충격을 받고 튀어 오를 듯 멈춰 섰다.


“무슨 일이죠?”

놀란 아델이 소리치자 밖에 있던 호위 기사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위된 것 같습니다!”

마차의 창으로 밖을 살피던 아델은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의 마차는 어느새 시커먼 늑대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리고 늑대들의 한가운데 거대한 갈색 늑대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늑대로 변한 바울로였다.

철컥!

아델은 피스톨을 겨누며 긴장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

크아아앙!

한편, 다른 한쪽에선 늑대화가 된 자들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놈들은 날렵하게 날아 날카로운 이빨로 사람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어느새 푸릇푸릇하던 잔디는 살점과 피로 얼룩졌고, 분수대의 물도 붉게 변했다.


“폐하, 어찌 된 일인지 늑대들의 수가 줄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면 수적으로 불리합니다!”

크리스틴과 함께 싸우던 W.G 기사들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피를 계속 손으로 훑어냈다.

그들이 벤 숫자만 해도 백 마리는 족히 넘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크리스틴의 묵직한 목소리에 다들 겁에 질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조금 전 칼을 맞고 쓰러졌던 늑대들이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는 걸 목격했다.

늑대 일족은 재생 능력이 뛰어났다. 그렇다고 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리스가 내 일족을 언데드로 만들었다.”

크리스틴의 말에 기사들은 절망적인 신음을 흘렸다.

다들 숱한 전쟁을 겪었지만, 언데드를 상대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일.

이대로라면 아군은 점점 지쳐가고, 희생자들만 늘어갈 것이다.

크리스틴은 신속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가능한 많은 목숨을 구할 방법.

잠시 올려다본 하늘은 시리도록 맑고 푸르렀다.

그리고 태양이 머리 위에 일직선으로 걸려 있었다.


‘놈이 제때 와주어야 할 텐데.’

그는 결심을 굳히며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는 지금부터 시민들을 대피시켜 여길 나간다. 놈들은 내가 맡지.”

“안 됩니다, 폐하!”

“끝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놀란 기사들이 결연하게 소리쳤지만, 그는 간단히 무시했다.


“희생 따위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어서 가라!”

단호한 외침과 함께 크리스틴은 늑대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날렵해지고, 온몸에 점차 은빛 털이 돋아났다.

잠시 후 거대하고 아름다운 은빛 늑대가 하늘을 향해 크게 울부짖었다.


“우오오오! 우오오오!”

눈부신 정오의 햇살을 가르며 달리는 그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수(神獸) 같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늑대들이 홀린 것처럼 일제히 달려들었다.

크아아앙!

은빛 늑대가 움직이는 길마다 피보라가 피어나며 늑대들의 사체가 길을 만들었다.

그동안 W.G 기사들은 얼른 시민들을 대피시켰다.


 

***

성당 건물은 전체적으로 네모 형태의 구조를 띠었다.

그 한가운데 드넓은 중정이 있었다.

은빛 늑대는 그곳으로 놈들을 유인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느새 중정 안으로 수백 마리의 늑대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놈들의 한가운데 거대한 은빛 늑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아름다운 은빛 털은 붉게 물들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일족을 응시하는 청회색 눈은 어느 때보다 위협적이고 날카로웠다.

그 기세에 겁을 먹었는지 늑대들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작은 약점이라도 보이면 언제든 달려들어 물어뜯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제일 강한 자가 다스리는 것이 짐승들의 법칙이었으므로.

낮게 깔린 구름이 늑대들의 머리 위에 어둑한 그림자를 만들며 흘러갔다.

툭. 툭. 툭…….

그동안에도 은빛 늑대의 목덜미에서 계속 피가 떨어져 바닥에 고였다.

목덜미를 심하게 물린 것이다.

크아아앙!

약점을 눈치챈 한 놈이 입을 쩍 벌리며 높이 날아올랐다.

크아아앙!

그러자 다른 늑대들도 일제히 입을 벌리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타앙!

그 순간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은빛 늑대를 향해 달려들던 놈의 머리통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탕! 탕! 타당!

연이어 들려온 총소리는 대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매캐한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내 성당 회랑 기둥과 지붕 위에서 머스킷을 든 백여 명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핫! 타이밍 죽이지 않습니까?”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한 남자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금발의 제니퍼였다.

은빛 늑대의 미간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자신을 꼴을 보고도 저렇게 즐거워 하는 게 못마땅했으니까.

하지만 제때 와주었으니 용서할 수밖에.

어느새 제니퍼와 머스킷 부대가 중정으로 내려와 은빛 늑대를 에워쌌다.

그들의 총구는 언제든 불을 뿜을 것처럼 매서웠다.

중정 안은 이제 제니퍼의 머스킷 부대와 늑대들이 대치한 상황이 되었다.


“여긴 제게 맡기십시오.”

“안 늦었구나.”

“시간 맞추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만둔 단원들 찾는 게 진짜 힘들었다고요!”

제니퍼는 과거 W.G 제1 기사단의 단장이었고, 크리스틴은 그들을 머스킷 부대로 훈련 시켰었다.

하지만 제니퍼가 단장직을 그만두면서 일부는 다른 부대로 옮겼고, 일부는 뿔뿔이 흩어졌던 것이다.


“아, 그리고 케니의 전언입니다. 놈들은 귀가 약점이랍니다. 거기에 모리스의 고대어 마법이 걸려 있어서 조종당하는 거랍니다.”

“역시 그랬군.”

“어라, 그런데 상처 입으셨습니까?”

제니퍼는 그제야 은빛 늑대의 목덜미 아래 작은 피 웅덩이가 고인 걸 보았다.


“별거 아니다.”

“별것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상처를 다 입으시다니.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건가?”

“뭐라?”

“더 늙기 전에 아론의 동생이나 만드십시오. 아델이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이 미친……!”

이 상황에서 그게 할 소리인가?

하지만 제니퍼는 씩 웃으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예, 제가 좀 미쳤나 봅니다. 오랜만에 머스킷을 만지니 심장이 마구 날뛰는 중입니다. 하하핫!”

타앙!

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보지도 않고 머스킷을 쏘았다.

총알은 막 달려들던 늑대의 머리통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이내 은빛 늑대는 머스킷 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무사히 중정을 빠져나왔다.

철컹! 철컹!

그들이 나오고 난 뒤 중정으로 통하는 모든 입구에는 철문이 내려졌다.

모리스의 조종을 받던 늑대 일족은 모두 거기에 갇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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