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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레아나와 모리스 (148/155)


148화. 레아나와 모리스
2023.07.03.



 
콰앙!


“반갑군, 모리스 에터마티!”

문을 박살 내며 크리스틴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검은 살아있는 짐승처럼 피를 흘리고 있었다.


“뵙게 되어 저도 영광입니다, 폐하.”

모리스는 한 발을 살며시 뒤로 빼며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모리스와 사제들을 감싼 푸른 빛이 투명하고 거대한 장벽으로 변해갔다.


“사제들의 방어 쉴드입니다!”

케니가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듣던 대로 대단하군!’

케니는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무엇보다 모리스는 오늘 엄청난 마나를 소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막강한 방어 쉴드를 칠 수 있다니.

케니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깨트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검을 휘두르며 방어 쉴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폐하!”

쐐애액!

비호처럼 빠르게 날아간 검에 엄청난 힘이 더해지자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쉴드가 닫히기 직전, 작은 틈 사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콰지지직!

쉴드의 기운이 검기와 부딪치자 불꽃이 생겨나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리스와 사제들의 마력에 맞서느라 검을 쥔 크리스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발도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폐하를 도와라!”

잠시 넋을 놓았던 케니가 마법사들을 독려하며 쉴드의 틈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기도에 집중하라!”

모리스도 사제들에게 있는 힘껏 소리쳤고,


“마나를 더 끌어 올려!”

케니도 질세라 고함을 질러댔다.

그 사이 크리스틴은 이를 악물고 더 깊이 검을 쑤셔 넣었다.

사제들의 마법에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끼리리릭! 끼익! 끼이익!

그러다 아지랑이 같던 장벽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파아앗!

결국 산산조각이 나며 깨졌다.

이제 크리스틴의 검은 거침이 없었다.

단숨에 달려들어 사제들을 베어내고, 모리스를 향해 무섭게 검을 휘둘렀다.

슈카악!

퍼엉!

모리스도 그에게 공격 마법을 쏘며 몸을 피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빠르고 거친 공세에 주문을 외우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여전히 터프하시군요, 폐하.”

가까스로 창턱에 올라서며 모리스가 웃었다. 그러나 숨이 차서 어깨가 헐떡이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검에 묻은 피를 한번 털어내며 광기 어린 웃음을 흘렸다.


“네놈을 보니 살의가 끓어올라서 말이지!”

슈카악!

그가 검을 내려치자, 모리스는 재빨리 청록색 지붕 위로 날았다.

크리스틴도 창턱을 밟고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

두 사람은 이제 저택의 지붕 꼭대기에 나란히 마주 섰다.

그들의 머리 위로 먹구름의 그림자가 낮게 드리워졌다.

화창했던 하늘에선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듣자니 아델이라는 여자를 떠올릴 때마다 고통을 받으신다고요? 만일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이겠군요.”

크리스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설마 아델을?

그 틈을 놓칠세라 모리스가 교활한 혀를 놀렸다.


“이자벨 부인을 까맣게 잊고 계셨나 봅니다. 그녀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시는 게…….”

그랬다. 이자벨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영악한 여자가 이 기회를 그냥 보고만 있진 않을 텐데.

제길!

순간, 모리스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치더니,


“ਆন੭ !”

나직한 주문과 함께 그는 하얀 새가 되어 허공을 날아올랐다.

동시에 크리스틴도 지붕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슈카악!

푸른 기운에 휩싸인 검이 그대로 새의 날개를 베어버렸다.


“……!”

놀란 모리스가 서둘러 방어 마법을 펼쳤지만,

퍼억!

무시무시한 검기에 날개가 잘려나가며 하얀 깃털이 사방에 흩날렸다.

쿠웅!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모리스는 그대로 지붕 위로 떨어졌고, 경사면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겨우 지붕 끝에 있던 굴뚝에 막혀 멈췄다.


“쿨럭!”

그는 피를 토하며 간신히 굴뚝에 몸을 기대앉았다.

저벅저벅.

어느새 앞에 다가온 크리스틴이 그대로 모리스의 목덜미에 검을 겨눴다.

무자비한 검기에 휩싸인 검이 금방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모리스, 네놈이 무릎 꿇었다면 살려주었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을 죽이기 전의 일이지만.”

모리스는 흐릿한 눈으로 크리스틴을 응시했다.

하얀 사제복은 피로 붉게 물들었고, 그가 흘린 피가 지붕을 타고 흘러내렸다.


“신의 사제는 함부로 무릎 꿇지 않는답니다, 폐하.”

“네놈들의 신이 정말 존재한다고 믿는가?”

지금껏 늑대 일족을 핍박하고 처형했던 것도 그들은 모두 신의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죄와 욕심을 신의 탓으로 돌렸을 뿐이다.


“신은 원래 믿음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혹은 강한 염원이 신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그래, 그 신에게 보내주지!”

크리스틴이 검을 높이 들어 올릴 때였다.


“놈은 제게 맡겨주세요, 폐하!”

스스스……!

목소리와 함께 레아나가 지붕 위로 연기처럼 나타났다.

레아나를 본 크리스틴은 놀라서 미간을 모았다.

그녀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얼굴을 제외한 온몸에 붉은 고대어가 새겨져 있었다.


“레아나는?”


“그게…… 여백작님과 함께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있습니다. 마법은 이제……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케니가 레아나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괜찮은 건가?”

레아나는 명랑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아델도 아래에 와 있답니다. 그리고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주세요.”

크리스틴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들었다. 너 혼자 놈을 상대하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레아나도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방금 마법을 쓴 걸 보셨잖아요. 10분 안에 모두 데리고 오스월드가를 떠나세요.”

“무슨 소리지?”

대답 대신 레아나는 눈을 감고 나직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ঊਈਈպনঢ়…… .”

공기가 점점 휘돌며 허공에 붉은 고대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모리스와 레아나를 휘감아갔다.

레아나가 살며시 눈을 뜨며 웃었다.


“아델의 애플파이는 언제나 최고였다고 전해주세요. 행복하세요, 두 분.”

서늘한 예감에 크리스틴이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레아나! 그만둬!”

하지만 어느새 붉은 고대어가 빽빽하게 레아나와 모리스를 감싸고, 점점 회오리 같은 바람이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회오오오…….

그것은 지붕 위에 떨어진 새의 깃털을 휘감고, 사방의 나뭇잎을 빨아들이고, 하늘을 날던 새들까지 휘말려 들어갔다.

이내 먹구름과 모든 공기마저 빨아들일 것처럼 거대해져 갔다.


“레아나! 살아나와라, 명령이다!”

크리스틴이 소리쳤지만 그 소리까지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

탁!

크리스틴은 재빨리 정원 아래로 뛰어내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익숙한 목소리에 그가 돌아보았다.

아델이었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피곤해 보였지만 그녀는 무사했다.

달려가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익숙한 체향과 익숙한 감촉을 느끼는 순간 그제야 긴장이 와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레아나는요?”

그는 오스월드가 저택의 높은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레아나와 모리스가 있던 곳은 붉은 고대어와 수많은 나뭇잎이 잔뜩 뒤엉킨 채 회오리가 불고 있었다.

그 회오리는 점점 더 강하고 거대해지며 곧 저택마저 삼켜버릴 것 같았다.


“모리스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다더군.”

“아아, 레아나…….”

아델은 울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틴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저택을 벗어나라! 당장!”

그러고는 아델을 말에 태우고 훌쩍 뒤에 올라탔다.


“이랴 핫!”

그를 선두로 제니퍼의 부대와 바울로, 그리고 케니와 마법사들이 잇따라 저택을 빠져나갔다.

두두두두!

수백 필의 말들이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숲길을 내달렸다.

그렇게 오스월드가 저택으로 통하는 길을 겨우 벗어날 무렵이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천둥소리에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며 요란하게 투레질을 했다.


“워워!”

크리스틴이 겨우 말을 진정시키며 돌아보자,

오스월드가의 저택은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불길과 먼지에 휩싸였다.


“아아! 레아나……!”

그는 울부짖는 아델을 꼭 끌어안으며 자신도 울음을 삼켰다.

툭. 툭. 투둑.

잔뜩 비구름을 품고 있던 하늘이 비로소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때 케니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폐하, 이자벨 부인이 캐슬러 가의 저택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답니다. 수정 구슬로 보니 대략 오백여 명의 무장한 병력이 저택을 포위한 것 같습니다.”

크리스틴은 무언가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자벨 부인을 까맣게 잊고 계셨나 봅니다.”

 
모리스가 했던 말이 이거였나?

젠장, 이자벨!


“어떡하죠. 폐하! 거기엔 지금 마크와 아이들만 있을 텐데!”

놀라서 울먹이는 아델을 크리스틴이 달랬다.


“근처에 W.G 기사들을 대기시켜 놓았으니 우리가 갈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야.”

사실 그들은 겨우 십여 명뿐이었다.

자신들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주기만을 바랐다.

***



“폐하!”

크리스틴과 아델이 캐슬러 가에 도착하자 짐머가 뛰어왔다.

다행히 소식을 들은 짐머의 부대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


“그래, 어떻게 된 거지?”

말에서 뛰어내리며 크리스틴이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짐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저희가 한발 늦었습니다. 이자벨의 병력이 이미 저택을 에워쌌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입니다.”

크리스틴은 저택을 응시했다.

아델의 빵 가게와 이어진 저택은 번화한 큰 길가에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늑대 일족의 폭주 사건으로 다들 겁을 먹고 집에 숨어 있는 것이다.

쏴아아아!

비가 내리는 거리는 한낮인데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어서 스산했다.

그리고 철문이 굳게 닫힌 저택 주위를 이자벨의 병사들이 삼엄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잠시 후 이자벨이 철제로 된 정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에 검은 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틴을 향해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대화를 원합니다, 폐하. 대화는 여자들끼리가 더 잘 통할 것 같군요.”

 

 
아델하고 얘기하겠다는 뜻이었다.


“좋아요. 저도 이자벨 부인과 해야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네요.”

어느새 아델이 앞으로 나오자, 크리스틴이 손을 끌어당겼다.

아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염려 말아요, 폐하. 그녀가 제정신이라면 절 함부로 하진 못할 거예요.”

“제정신이라면 감히 이런 짓을 못 했겠지.”

아델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이자벨은 이제 잔뜩 궁지에 몰린 사람 같았다. 그럴수록 섣불리 자극해서는 안 될 일.

저 안에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절 믿어줘요. 다들 무사히 데리고 나올게요.”

크리스틴은 굳은 표정으로 아델을 잠시 보았다.


“부디 무사히 돌아와.”

“물론이죠. 다들 데리고 금방 돌아올게요.”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웃는 아델을 보며 크리스틴은 이를 악물었다.

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 빌고 싶었다.

그녀와 아이들을 무사히 살려달라고.

그를 뒤로하고 아델은 정문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쏴아아!

빗줄기가 아델의 모습을 지워버릴 듯 거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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