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아버지와 아들 (149/155)


149화. 아버지와 아들
2023.07.07.



 
이자벨은 아델을 야외 테라스의 의자로 안내했다.

사나운 빗줄기에 테라스 밖의 풍경은 온통 뽀얗게 젖었다.


“앉아요, 그릴스 여백작.”

“잊으셨나 본데, 여긴 제집이랍니다. 당신은 무단 침입을 한 거고요.”

아델은 자리에 선 채로 냉랭하게 말했다.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자벨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드레스 자락의 물기를 털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나는 몸이 아픈 국왕을 대신해 칼라임의 치안을 책임져야 하니까.”

“사유지에 함부로 침입하는 것이 어떻게 치안을 책임지는 일이죠?”

“그 사유지에 범죄자나 반역자가 숨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그게 무슨?”

이자벨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늑대 일족의 폭주 사건 말이에요. 마크 캐슬러가 반란 사제들과 함께 계획한 거라는 제보가 있었어요.”

아델은 기가 막혔다.


“설마 당신의 죄를 마크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건가요?”

대답 대신 이자벨은 옆에 서 있는 근위대장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됐지?”

“지시하신 대로 캐슬러 백작과 가족들을 모두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아론 캐슬러는…….”

아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아델이 달려들었다.


“미친! 당신 지금 그 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챙!

근위병들이 양쪽에서 칼을 교차해 재빨리 아델을 막았다.

이자벨은 나직이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짓을 하긴요. 어디로 사라져도 찾지 못할 만큼 그 작고 귀여운 아이에게.”

“당신…… 죽여버릴 거야!”

하지만 근위대들에게 막혀서 아델은 이자벨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저 이를 갈며 노려볼 뿐.

이자벨은 탁자 위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아론을 만나고 싶다면 여기에 황제의 사인을 받아오세요.”

“뭐?”

“첫째, 바하마르트 제국의 군대를 칼라임에서 물릴 것. 둘째, 칼라임을 속국이 아닌 자치국으로 인정할 것. 그래야 그 예쁜 아이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랍니다.”

그리고 이자벨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 전에 내가 당신부터 죽일 거야.”

철컥!

아델의 피스톨이 어느새 그녀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지금 무슨……!”

“제이드도 당신 짓이었지? 그걸로 모자라서 감히 또 내 아이를 건드려?”

피스톨 앞에서는 아무리 이자벨이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양손을 들어 올리면서도 뻔뻔하게 말했다.


“나를 죽이면 아론을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웃기지 마!”

하지만 피스톨을 쥔 아델은 섣불리 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아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때였다.


“큰일, 큰일 났습니다!”

근위병사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피 냄새가…… 나는군.”

한편, 저택 밖에서 아델을 기다리던 크리스틴의 얼굴이 굳어졌다.

놀란 짐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장 저택 안으로 진입할까요?”

지금 그들의 병력으로 이자벨의 병사들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안에 인질들이 있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니, 아무래도 혼자 가봐야 할 것 같다.”

“폐하!”

크리스틴은 말에 훌쩍 올라타더니 따라오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이랴 핫!”

그는 저택을 향해 빗속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



“세상에……!”

이자벨과 근위병을 따라 남쪽 놀이방으로 달려오던 아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굳게 닫힌 방문 아래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긴 아론의 놀이방이었으니 분명 그 아이가 저 안에 있을 것이다.


“아론! 아론!”

아델은 비명처럼 소리치며 놀이방의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열지 마!”

다급한 외침과 함께 어느새 크리스틴이 나타났다.

아델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폐하, 우리 아론이, 아론이 저 방 안에…… 있어요!”

그는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여긴 위험하니 물러나 있어.”

“폐하,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놀이방 안쪽에서 기괴하고 음산한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크으으…… 살려…… 살려줘!”

“크아아앙! 크앙!”

아델은 파랗게 질렸다. 이 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이건 바자회에서 늑대 일족이 폭주할 때 지르던 괴성이었다.


“……안에 늑대 일족이……!”

놀라서 중얼거리던 아델은 갑자기 멈칫했다.

설마?

크리스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에 있는 늑대 일족은 바로 우리의 아이야.”

그 순간,


“으아아악!”

문 안쪽에서 외침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그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벌컥!

노란색 벽에 붉은 피가 튀었다.


“도, 도와줘…… 제발……!”

대여섯 명의 남자들은 피를 흘리며 겁에 질려 애원했다.

마법사로 보이는 자도 책상 아래에 들어가 떨고 있었다.


“크아아앙!”

그리고 방 한가운데 검은 늑대 한 마리가 잔뜩 털을 곤두세운 채 울부짖었다.

늑대 일족치곤 작은 체구였지만 뾰족한 하관과 하얀 송곳니가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닮은 청회색 눈과 마주치는 순간 크리스틴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어린 늑대가 잔뜩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가엽게도 몸통 여기저기 칼에 찔려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아론, 진정해. 나다.”

“크아아앙! 크아아!”

크리스틴이 침착하게 다가갔지만 검은 늑대는 더 크게 몸부림치며 울었다.

그 소리가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것만 같아서 그는 애가 탔다.

일단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널 도와주려고 온 거야. 자, 봐. 아무것도 없지.”

“크아아앙!”

아론은 갑작스러운 변이만으로도 충분히 놀라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어른들로 인해 얼마나 두렵고 겁이 났을까?

이토록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아직은 여섯 살의 아이일 뿐이었다.


“알아, 무서운 거. 나도 너처럼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아론 이리 와. 엄마도 걱정하고 있어.”

크리스틴이 손을 내미는데,


“크아아앙!”

검은 늑대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푸욱!

발톱이 그대로 어깨에 파고들었지만 크리스틴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검은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괜찮아,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하게 할게. 자, 착하지, 아론.”

하지만 검은 늑대는 그대로 몸을 틀어 창문을 깨트리고 뛰쳐나갔다.


“아론!”

크리스틴도 그 뒤를 쫓았다.

***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지고, 밤이 찾아왔다.

아론은 늑대의 계곡까지 도망쳐 동굴 안에 깊이 숨어 버렸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렸다.

아이를 쫓아온 크리스틴은 젖지 않은 나뭇가지를 찾아 동굴 입구에 불을 피웠다.

봄이었지만 비가 오는 밤은 여전히 추웠으니까.

그는 사냥해 온 토끼와 꿩을 잘 손질해서 불에 구웠다.

폭주하고 난 아이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플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아론이 동굴 입구까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채였다.

아이가 다시 도망칠까 봐 크리스틴은 일부러 쳐다보지 않고 혼잣말을 했다.


“토끼가 아주 잘 익었군. 꿩도 맛있겠는데. 낚시는 못 하지만 내가 사냥은 제법 잘하거든.”

그는 먹기 좋게 자른 고기를 꼬치에 꿰어 둘 위에 쪼르륵 올려놓았다.


“마실 물을 좀 떠 와야겠군.”

그리고 능청스럽게 동굴을 나갔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아론은 살금살금 불 앞으로 다가와 허겁지겁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지 후우후우 입바람으로 식혀가면서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멈칫했다.


“……!”

동굴 앞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은 것이다.

늑대화가 진행된 이후 아론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감각이 예민해졌다.

사사 삭, 재빨리 동굴 안으로 들어가 숨는데 크리스틴이 다시 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 먹을 만하지, 아론?”

그는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리는 수통을 흔들어 보였다.


“물도 있는데, 목이 마르면 나오렴.”

“…….”

“뭐, 마음의 준비가 덜 됐으면 천천히 나와도 되고.”

그는 아이의 앞으로 수통을 밀어주며 계속 고기를 구웠다.


“아까 많이 놀랐지? 다친 곳은 괜찮니?”

잠시 후 동굴 안쪽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며 들려왔다.


“그 사람들 죽었어요?”

“누구? 네가 공격한 사람들?”

“……먼저 날 아프게 했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다.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걱정 마라.”

“나 이제 괴물이 된 건가요? 상처도 금방 나았어요.”

“아니, 너는 그저 늑대 일족일 뿐이야.”

“흑, 그래도 무서워요…….”

크리스틴은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무서워할 거 없다, 아론. 엄마와 아빠…… 형들은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을 거야. 그만큼 널 사랑하니까.”

“내가 다치게 하면요? 아까 폐하도 다치게 했는데…….”

“하지만 결국 멈췄잖니. 앞으로는 더 잘 멈출 수 있을 거다.”

“진짜요?”

“그럼. 나도 그랬거든.”

“폐하도요?”

“음, 나도 처음 늑대로 변했을 때 너처럼 놀랐단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날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무서웠고, 그들을 다치게 할까 봐 더 무서웠지. 그래서 며칠씩 숲속에서 나오지 못했단다.”

“흑, 으으흑! 으아아앙!”

잠시 후 동굴 안쪽에서 아론이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크리스틴은 가슴에 큰 돌이 얹혀진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미안하다. 네게 이런 혼란을 주게 되어서.”

“아뇨. 폐하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깐 진짜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크리스틴은 조금 울컥해졌다.

그가 처음 늑대로 변했을 때 이런 도움을 간절히 원했었다.

그런데 아론에게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럼 이제 나와서 고기를 마저 먹겠니?”

아이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근데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요.”

“뭘?”

“사람으로 돌아오면 옷은 어떻게 해요?”

크리스틴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콧등을 긁적였다.


“그게 제일 큰 문제긴 해.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늑대로 안 변하지.”

“맙소사! 안 돼! 그럼 난 이제 어떻게 나가요?”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아론을 보자 크리스틴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녀석. 남자끼리 뭐가 부끄럽다고.”

“아악! 싫어요. 그럼 폐하도 벗어요.”

“뭐?”

황당해하던 크리스틴은 좋은 타협안을 생각해냈다.


“대신 내 겉옷과 사탕을 주는 건 어떻겠니? 네가 선물해준 노란 사탕을 아직 갖고 있거든.”

“정말요?”

“그래, 소중한 거라 아껴먹었거든.”

잠시 생각하던 아론은 호쾌하게 수락했다.


“콜!”

 

크리스틴이 아론을 업고 늑대의 계곡을 나오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본 아델은 얼른 우산을 펼쳐 들고 뛰어왔다.


“아론…….”

“잠들었어.”

아이가 깰까 봐 그는 입 모양으로 작게 말했다.

그제야 아델은 겨우 마음이 놓여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 부자를 번갈아 보다가 웃었다.


“왜?”

“나는 애가 탔는데 두 분은 아주 맛있는 만찬을 즐기고 온 모양이네요.”

아델은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크리스틴의 입가와 아론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두 남자의 입가에 거뭇거뭇 검댕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엄마…….”

아론은 잠결인 듯 씩 웃어 보였다.


“그래, 엄마 여기 있어. 이제 집에 가자 아론.”

함께 마차에 올라타는 세 사람을 보며 짐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완벽해 보여서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었으니까.

꽃피는 계절이건만 왠지 좀 외롭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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