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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선물 같은 사람들 (150/155)


150화. 선물 같은 사람들
2023.07.10.



 


“세이라 오스월드가 맞답니다.”

기사 단장의 보고에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오스월드 가문의 폭발 사고를 수습하던 중 잔해더미에서 금발 머리 여자의 시신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 전 세이라 오스월드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소식이었다.


‘꼴사납구나. 그렇게 아등바등 많은 것을 욕심내더니…….’

이자벨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건 세이라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쳐 갔다.

그녀가 지금 있는 이곳은 로드웰 공작가의 집무실이었다.

높은 천장까지 꽂혀있는 서책들은 엄숙하면서도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에서 그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고위 귀족으로서 어떤 권위와 의무를 지녀야 하는지도 배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권위만 쫓다가 의무와 책임은 잊은 것이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드넓은 정원과 담장 안팎으로 황제의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녀를 유폐시키는 동시에 지키기 위한 황제의 배려였을지도 몰랐다.

담장 너머에는 성난 군중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으니까.

바자회 사건이 반란 사제와 이자벨이 꾸민 일이었다는 게 모두 밝혀진 것이다.

관련된 문서와 관계자들이 줄줄이 나타났고, 아들인 러스티스마저 그녀의 죄를 인정했다.

어머니를 버려야만 살 수 있었을 테니까.

이자벨은 이해했다.

그로 인해 성난 시민들이 로드웰 공작가로 몰려온 것이다.

당장 이자벨을 끌어내 돌로 쳐죽일 기세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자벨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마크였다.

그는 아름다운 찻잔이 놓인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예상 밖의 손님이군요.”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선물을 갖고 왔습니다.”

마크는 집무실 가운데 위치한 테이블에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은 하나뿐이었다.

이자벨은 그 의미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누군가를 해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동참이 아닙니다. 제 아이를 해친 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뿐입니다.”

이자벨은 씁쓸하게 웃으며 테이블 앞의 소파에 앉았다.


“재밌군요. 황제에게 보내려던 선물이 내게 돌아오다니.”

마크는 냉정하게 말했다.


“30분이 지나도 부인께서 살아계신다면 저는 국왕에게 똑같은 차를 가져갈 것입니다.”

파르르 이자벨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 애는, 러스티스는…… 그냥 두세요.”

살아남기 위해 제 어미를 버린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자벨은 그 아들이 죽는 건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대단하신 모정이군요. 그러면 한 아이의 아비로서 제 마음도 이해하실 거라 믿겠습니다. 그럼.”

마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후 집무실을 나갔다.

이자벨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보았다.

제일 아끼던 홍찻잔이었다. 화려한 장미 무늬가 빼곡하게 그려지고 테두리와 손잡이에는 황금 칠이 되어있었다.

18세 생일에 그녀의 어머니가 선물해주신 것.


“뭐, 나쁘지는 않네.”

이자벨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저 성난 군중들에게 끌려가 갈가리 찢겨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로드웰 가문의 가주로서 마지막 품위는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선물은 선물이네.”

조용히 읊조리며 그녀는 찻잔을 우아하게 비웠다.


 

***

날이 어둑해질 무렵 마크는 캐슬러 가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크! 마크!”

그가 마차에서 내리는데 아델과 폴린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델이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제이드가…… 우리 제이드가…….”

순간 마크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 애가 언젠가는 멀리 떠날 거라는 걸 각오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는!

굳은 얼굴로 달려가는 마크를 아델이 얼른 쫓아오며 뒷말을 이었다.


“제이드가 깨어났다고요! 아빠를 찾고 있어요!”

“뭐요?”

그는 다시 한번 숨이 턱 멎는 것 같아서 멈춰 섰다.


“제이드가 눈을 떴다는 겁니까?”

믿어지지 않아서 재차 확인하자, 폴린이 얼른 보충했다.


“네, 한 십 분쯤 됐어요. 일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찾았……!”

마크는 폴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이드의 방으로 달려갔다.

벌컥!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며칠 사이 수척해지고 눈 밑이 퀭했지만 반짝이는 푸른 눈은 그대로였다.


“아버…….”

그는 와락 달려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아! 아아! 제이드! 제이드! 제이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불렀다.

이제 그 이름에 대답해 줄 아이가 다시 돌아왔으니까.

이 부름에 제이드가 단 한 번이라도 대답해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노라고 얼마나 기도했던가?

따뜻한 아이를 가슴 깊이 끌어안고 커다란 남자는 목놓아서 크게 울었다.

부끄럽지도 창피하지도 않았다. 제이드가 이렇게 다시 돌아왔으니 다른 건 상관없었다.

폴린과 아론도 덩달아 얼싸안고 울기 시작했다.


“참, 남자들이란…….”

아델과 타냐는 뒤에서 웃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눈도 퉁퉁 부어 있었다.

***

마블궁.

밤이 되자 크리스틴은 호숫가를 산책했다.

이제 당분간 이곳에 올 일은 없으리라.

그의 뒤로 짐머가 다가왔다.


“조금 전 이자벨 부인이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우린 내일 아침 출발할 테니 차질 없도록 진행하라.”

그는 내일 바하마르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반란 사제들도 정리가 되었고, 이자벨은 자결을 했다.

그리고 러스티스 국왕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모든 권한을 황제에게 일임했다.


“그런데…… 정말 여백작님과 아론은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짐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론과 약속했다. 캐슬러 가에서 계속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대신 가끔씩 나를 찾아와 주면 그걸로 된 거지. 아델은 아론의 곁에 머무는 게 당연하고. 뭐 서로에게 행복해지는 최선의 길을 선택한 거지.”

“정말 그걸로 된 겁니까? 그분이 캐슬러 백작과 다시 한집에서 지내게 될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크리스틴의 표정이 점점 사나워졌다.


“너 같으면 괜찮겠나?”

겉은 이렇게 평온해 보이지만 지금 크리스틴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아델이고 아론이고 그냥 끌고 가버리고 싶었다.

결국 그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델의 저택 근처에 집을 하나 알아봐라.”

“집을요?”

“비공식적으로 자주 오게 될 거 같아서 말이지. 벌써부터 두 사람이 눈에 아른거리니. 젠장!”

짐머가 황당해했다.


“비공식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이곳에서 바하마르트까지 왕복하려면 공간이동 마법으로도 닷새는 걸립니다.”

먼 거리를 공간 이동하려면 그만큼 많은 마나가 필요했다. 마법사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한계는 정해져 있었고.


“레아나 양 같은 마법사라면 또 모를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짐머는 실수를 깨닫고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다. 모든 일에서 레아나가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날 오스월드가의 폭발로 거대한 저택은 잔해만 남았다.

레아나는 그 잔해더미 속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몸을 뒤덮었던 고대어 문자도 사라지고, 잿더미 안에서 상한 곳 하나 없이 말짱하게 발견된 것이다.

다들 그녀의 마법 쉴드 덕분일 거라고, 역시 대마법사는 다르다며 칭송했다.

그러나 레아나는 의식을 회복한 후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폐하 곁을 떠나 있을 생각입니다.”

 
하루가 지나자 슬픈 얼굴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모리스는 어떻게 됐는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고대어는 어떻게 사라진 건지 아무 말도 없었다.

크리스틴은 그러라고 했다.

그날 모리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으니까.

언제든 돌아오길 기다리겠다는 말과 함께.

다음 날 레아나는 홀연히 사라졌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녀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었다. 가족이었으니까.

레아나의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아델과 아론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짓던 그는 뒤에 있는 마크를 보자 기분이 묘해졌다.

아직도 세 사람이 가족처럼 함께 있는 걸 보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폐하!”

하지만 아론의 명랑한 목소리에 다시 웃음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와다다 달려오는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델에게서 나던 향기를 닮았지만 좀 더 달큼한 아이의 냄새가 났다.


“인사는 내일 아침에 해도 되는데.”

반가웠지만 그는 짐짓 예의를 차려서 말했다.

아델이 밝은 얼굴로 웃었다.


“조금 전 제이드가 깨어났어요. 그 얘기를 빨리 전해드리고 싶어서요.”

“정말 잘 됐군. 그래, 잘 됐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틴의 표정도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린힐을 떠나면서 제일 마음에 걸렸던 건 제이드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마크에게 죄책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잠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폐하.”

가까이 다가온 마크가 독대를 청했다.

크리스틴은 마크와 함께 호숫가 앞의 나무 벤치에 앉았다.


“제이드가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네.”

“폐하께서 마법사들을 보내주신 덕분입니다.”

지난 며칠간 바자회 사건을 수습하고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는 제이드에게 마법사들을 보냈다.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마다 그 마법사들이 계속 원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또 마법사들로 구성된 치료소를 열어 바자회에서 다친 사람들도 치료를 받도록 했다.


“아니네. 그대의 간절함이 기적을 만들어 낸 거야. 누군가 그러더군 강한 염원이 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아마 그 신이 도왔을지도.”

아델을 염원하던 크리스틴의 마음이 저주를 푸는 기적이 된 것처럼 말이다.

마크는 길게 숨을 고르며 달빛이 내려앉은 호수를 응시했다.


“아델과 아론은 제가 잠시 맡아둔 선물 같은 거였습니다. 너무 오래 간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욕심이 났고요. 이 선물을 찾아가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을까. 어느 전쟁터에서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기도 했었죠.”

“…….”

“그래서 다시 나타난 폐하에게 줄곧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이드를 잃을지 모르는 순간이 오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아델과 아론은 당신에게도 그렇게 소중한 사람일 텐데. 내가 이토록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아서 벌을 받은 건가 싶기도 했고.”

크리스틴은 호수를 향해 돌을 던졌다.

포옹.

작은 파문이 일며 달빛이 흔들렸다.


“그런 생각은 말게. 나도 아델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으니.”

잠시 망설이던 마크는 결심을 굳힌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델과 아론은 폐하와 함께 지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 아, 미안.”

진심이 나와버린 크리스틴을 보며 마크가 조용히 웃었다.


“아델에게 얘기했습니다. 제이드가 몸을 추스르고 녀석들이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을 며칠만 주자고. 그러고 나면 두 사람은 바하마르트로 떠나는 게 좋겠다고. 아델도 물론 동의했고요.”

“정말…… 인가?”

크리스틴은 호숫가에 서 있는 아델을 돌아보았다.

마치 그의 물음이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델과 아론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어느새 벚꽃은 다 져버렸지만,

이제 곧 장미가 피는 계절이 돌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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