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장미가 피는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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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장미가 피는 계절에
2023.07.14.
“폐하께서 보이시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바하마르트의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오늘은 황제와 각국 사절단의 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늘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이던 황제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크라이튼 공작님은요?”
“공작님께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황제를 찾느라 어수선한 사람들 사이로 단정한 예복 차림의 핸리가 나타났다.
아델의 집사였던 그는 이제 바하마르트 황궁의 시종장이 되어있었다.
“황제 폐하께선 아마 결혼식을 올리러 가셨을 겁니다.”
너무나 뜻밖의 말에 다들 얼음이 되어버렸다.
“결혼…… 이라면, 우리가 아는 그 결혼 말입니까?”
“물론이죠. 그러니 우리는 새 안주인을 맞을 준비나 철저히 합시다.”
그제야 황궁 사람들은 황제가 요 며칠 계속 기분이 좋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혼자서 히죽거리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 무서웠다는 증언도 있었다.
황후도 없으면서 황후궁을 꾸미라느니, 황후궁 옆에 아이의 방도 만들라느니, 이상한 소리를 했던 이유도 그거였다.
그리고 회의를 하겠다며 각국의 사절단을 죄다 불러들인 이유도 설마?
핸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황궁의 경사였다.
하지만 황궁 사람들도 모르게 대체 무슨 결혼을, 어디로, 어떻게 하러 갔다는 말인가?
“듣던 대로 장미가 정말 아름답군요.”
크리스틴과 함께 말을 몰던 짐머는 감탄한 듯 둘러보았다.
워낙 꽃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이렇게 탐스럽고 붉은 장미는 처음이었다.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는 길가에는 눈부시도록 붉은 장미가 울타리를 만들며 피어 있었다.
“다 왔다. 저기가 바로 가르덴 호수야.”
언덕 꼭대기에 오른 크리스틴은 그 아래 펼쳐진 완만한 구릉지를 가리켰다.
짐머는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여름 초입의 짙푸른 녹음 한가운데 새파란 호수가 있었다.
이곳에서 이어진 장미 울타리는 그 호수까지 죽 이어졌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오래된 성당이 있었다.
작고 낡은 성당은 담장과 벽을 장미 넝쿨이 빈틈없이 휘감았는데, 마치 거대한 장미 부케처럼 보였다.
이곳이 바로 루스울프의 가르덴 호수였다.
그들이 자라고 첫 키스를 했던 바로 그곳.
크리스틴은 지금 아델의 편지를 받고 성당으로 온 것이다.
며칠 전 그녀는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자는 편지를 보냈다.
모든 준비는 자신이 다 할 테니 그에겐 가볍게 몸만 오라고 했다.
무려 제국의 황제에게 말이다.
“크리스틴, 정말 네가 크리스틴이니?”
누군가의 목소리에 돌아보자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가왔다.
“아유, 맞네, 맞아!”
“어쩜 어렸을 때 얼굴이 그대로네. 어느새 이렇게 멋진 청년이 되었어!”
그녀들은 아직도 광부의 아들 크리스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성당으로 삼삼오오 몰려들던 사람들도 그를 보며 아는 척했다.
“축하한다, 크리스틴! 결국 아델이랑 결혼하는구나.”
“잘됐네. 옛날부터 둘이 참 잘 어울렸어.”
그는 지금 마을 청년들 입을 법한 평범한 예복 차림이었다.
작은 광산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가 바하마르트의 황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단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빵 가게의 딸 아델과 광부의 아들 크리스틴의 결혼을 축하해주러 모인 것이다.
잠시 후 장미로 뒤덮인 성당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활짝 웃는 신부의 모습이 장미보다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신부의 옆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남자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서 있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크리스틴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응시했다.
“보고 싶었다, 아들.”
“저도요, 아버지.”
그가 늑대 일족의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거둬서 키워준 남자.
애틋한 부자간의 정은 없었지만, 가끔씩 그립고는 했던 남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보니 무뚝뚝하던 이 남자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델이 너와 결혼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이제 보니 둘이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래, 어서 들어가자.”
그는 아델과 크리스틴의 손을 한쪽씩 잡고 성당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깔깔거렸다.
“아니, 신랑 신부 둘이 손을 잡게 해줘야지.”
“그러게. 왜 눈치 없이 자기가 손을 잡고 난리래?”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 애들이 수줍어할까 봐 그랬지!”
“대니, 애들한테 미움받기 전에 얼른 나와요.”
그제야 남자가 물러나고 크리스틴과 아델은 겨우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오늘 최고로 눈부시다, 아델.”
크리스틴이 속삭이자,
“다행이네. 미아가 화장을 해 준 거라 조마조마했는데.”
“화장을 안 했다면 더 아름다웠을지도.”
“그건 아니다.”
“그럼 준비됐지?”
“당연하지. 이날만 기다렸는걸.”
서로 눈을 맞춘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망설임 없이 성당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아론, 제이드, 폴린, 타냐와 미아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잠시 후 혼배 미사가 끝나고 사제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됐음을 선언했다.
뎅……! 뎅……!
부드러운 종소리가 초여름 공기를 타고 온 마을로 퍼져나갔다.
조금 전까지 왁자하던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기원의 시간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마음속으로 기원 해주는 것이다.
이들이 늘 행복하고 사랑하기를.
이 많은 사람의 염원은 어딘가에 있는 신에게 닿을지도 몰랐다.
“기억나? 가르덴 호숫가 근처에 있던 작은 성당. 엄마와 아저씨는 그곳에서 식을 올릴 예정이었지.”
“기억나.”
“봄엔 벚꽃이 새하얗게 날렸고, 여름이면 길가에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지.”
“음, 동화처럼 아름다운 곳이었어.”
”무엇보다 난 결혼식이 끝나고 온 마을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간이 참 좋았어. 그러면 다들 진심으로 그 부부가 영원히 행복해지길 기도해주곤 했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축복받는 결혼식이란 이런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그래, 루스울프로 돌아가는 대로 꼭 가르덴 호숫가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자. 아델.”
***
결혼식이 끝나자 마을은 온통 흥겹게 술렁거렸다.
이 작고 오래된 광산 마을에선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가장 큰 행사였다.
다들 취하도록 먹고 마시고, 미친 듯 웃어댔다.
더구나 크리스틴의 아버지 대니는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그동안 모아온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덕분에 하루종일 술과 음식이 넘쳐났다.
아델과 크리스틴이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한사코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동안 못다 한 아비 노릇을 원 없이 해보고 싶구나. 더이상 말리면 화를 낼 거다.”
그러면서 대니는 무척 뿌듯해했다.
그럴수록 크리스틴은 작은 고민에 빠졌다.
대니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건 아버지의 모든 노력을 한순간에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
“크리스틴, 그동안 외지에 나가서 어떻게 지냈냐? 그래도 꽤 형편이 좋아 보이던데.”
목재소 아들이 물었다. 어려서 앙숙으로 자주 싸우던 친구였다.
“뭐 전쟁에도 참가하고, 장사도 좀 했어. 이 친구는 동업자고. 저기 보니타 부부는 회계 업무를 맡고 있지.”
“안녕하십니까, 짐머 크라이튼이라고 합니다. 이 친구와는 오랫동안 같이 사업을 해왔죠.”
그러면서 짐머가 크리스틴의 어깨에 떡하니 손을 올려놓았다.
살기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황제의 어깨에 손을 올려보겠는가?
“와, 너 정말 성공했구나!”
마을 사람들이 다들 감탄하는 눈빛을 보내자,
“뭐 별로.”
크리스틴은 잘난 체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이곳에선 황제라는 걸 끝까지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 정도가 딱 좋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델을 찾았다.
그녀에게도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일러둘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할 때부터 아델도 알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어느새 다들 자러 갔고, 그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는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아델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 향기를 쫓아서 간 곳은…….
[제일 맛있는 빵 가게]
대니가 손수 만들고 아델이 글씨를 써넣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그린힐에 있던 아델의 빵 가게도 이곳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지금은 낡아서 글씨조차 희미했지만, 문을 열면 잔뜩 쌓인 빵과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가 반길 것만 같았다.
삐걱.
하지만 거기에 있는 건 먼지 쌓인 가게를 쓸쓸하게 둘러보고 있는 아델뿐이었다.
“뭐 해?”
그는 다가가 아델을 뒤에서 안아주었다.
그녀의 쓸쓸함을 조금이라도 채워주고 싶었으니까.
그의 가슴에 기대며 아델이 중얼거렸다.
“늘 와보고 싶었거든. 그땐 도망치듯 떠났으니까.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들고 올 수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래, 나도 어머니께 조금이나마 면목이 서네.”
아델은 엄마가 항상 일하던 조리대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엄마, 나 크리스랑 결혼했어요. 벌써 예쁜 아이도 낳았고. 그 애 이름은 아론이에요. 그리고 크리스는 황제가 되었어요. 안 믿어지죠? 사실은 나도 그래.”
그녀가 키득거리자 크리스틴도 같이 웃었다.
“마찬가지야.”
이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는 황제로 살아왔던 삶이 마치 꿈같았다.
꿈에서 깨어나니 광부의 아들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뭐, 그래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곳에서 아델, 아론과 함께 다시 빵 가게 주인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삶도.
“부탁이 있어, 크리스. 사람들에겐 당신이 황제라는 걸 얘기 안 했으면 해. 난 가끔 이곳에 찾아오고 싶거든. 평범한 빵 가겟집 딸로.”
크리스틴이 웃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역시 우린 잘 통해. 참, 잠시만.”
아델은 뭔가 생각났는지 조리대의 제일 아래 서랍을 빼냈다. 그러고는 빈 공간 안에 손을 집어넣고 더듬거리다가,
“있다!”
납작한 쿠키 상자 하나를 꺼냈다.
“뭐지 그게?”
“내 보물상자.”
상자의 뚜껑을 열자 동전과 편지들이 들어있었다.
“심부름하고 받은 돈이나 사람들이 준 팁을 여기에 모아놨었거든. 엄마에게 좋은 오븐을 사드리고 싶어서.”
그러다 동전 사이에 있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거 기억나?”
“뭐지?”
눈만 껌뻑이는 크리스틴을 보며 아델이 쿡쿡 웃었다.
“금방 기억나게 해 줄게.”
그녀는 접혀있던 편지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아델 누나에게…….”
“그만.”
크리스틴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아델에겐 어림없는 얘기.
“맛있는 빵을 줘서 고맙습니다. 글씨도 가르쳐줘서 고맙습니다. 얘, 정말 귀엽지 않아?”
“아델!”
그가 편지를 확, 낚아채자 아델은 아예 상자를 들고 가게의 다락방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다른 편지를 꺼내 달빛이 환한 창가로 가서 읽기 시작했다.
“난, 이다음에 커서…….”
“그만하지?”
다락방으로 쫓아 올라온 그가 아무리 섬뜩한 살기를 뿜어내도 소용없었다.
“이다음에 커서 꼭 누나랑 결혼할 거예요. 그땐 아델이라고 불러도 되죠? 아델, 그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막 좋아져요. 아델…… 아델…… 마치 행복해지는 주문 같아요.”
편지를 다 읽고 난 아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지금도 그래? 크리스?”
초록빛 눈동자에 스며든 달빛은 숨 막히도록 요염했다.
“그래, 지금도. 앞으로도.”
그는 홀린 사람처럼 아델의 눈꺼풀 위에 조용히 입술을 내렸다.
아델은 고개를 들어 제 입술을 부드럽게 비볐다.
달큼한 숨결이 얽히고, 조금씩 달아올랐다.
사각이며 옷자락 스치는 소리.
가느다란 신음과 깊은 숨이 뒤섞이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 소리는 점점 은밀함의 밀도를 높여갔다.
부드러운 달빛 아래서 그들은 아델과 크리스틴일 뿐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시 편지를 썼다.
[나는 지금 집으로 간다.
네가 있기에 그곳은 나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