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외전. 망각의 숲에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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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외전. 망각의 숲에서(1)
2023.07.17.
똑똑.
늦은 밤,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케니는 의아했다.
평소 사람들과 친분을 만들지 않았기에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으니까.
대답을 망설이는데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나요, 케니?”
놀랍게도 레아나였다.
같은 마법사였지만 케니가 ‘어둠의 은둔자’라면, 레아나는 ‘빛의 여신’ 같은 존재였다.
그는 얼른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아름다운 레아나 앞에선 화상을 입은 얼굴이 더 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레아나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수척했다.
“이 늦은 시간에 안 자고 무슨 일입니까?”
그녀는 창턱에 폴짝 올라앉으며 대답했다.
“꿈자리가 사나워서 잠이 안 와요.”
케니는 그녀의 말뜻을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사나운 꿈자리를 해결해 달라고 온 건지, 잠이 안 오니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건지.
전자라면 자신보다 그녀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고, 후자라면…… 대체 왜?
레아나가 쿡쿡, 웃었다.
“그렇게 놀라지 말아요. 누가 보면 잡아먹으러 온 줄 알겠어요.”
케니는 얼른 헛기침했다.
“흠흠, 그 반대겠지요.”
누가 봐도 미녀와 야수였으니까.
“혹시 인큐버스에 대해 알고 있나요?”
레아나가 물었다.
“몽마 말입니까?”
“자주 악몽을 꿔요.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몽마가 만들어낸 환영인지 모르겠어요.”
“혹시 그 3일 동안과 관련된 일입니까?”
“폐하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케니는 레아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리스를 쫓다가 길을 잃었다던 그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레아나는 아무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정말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그것도 모리스와 연관된.
“몽마는 사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든다고 합니다. 어떤 악몽인지 몰라도 레아나 양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었겠지요.”
“역시 그런 거겠죠?”
레아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최면 마법이라는 게 있는데 혹시 필요하십니까? 정말 있었던 일인지, 몽마의 수작인지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잠시 망설이던 레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늦은 밤 미안했어요, 케니.”
돌아서는 레아나의 등 뒤에서 케니가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악몽에 잡아먹히기 전에 찾아오십시오. 인큐버스는 서서히 레아나 양의 마음을 갉아먹고 정신을 지배하게 될 겁니다.”
“충고 고마워요.”
***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라…….’
케니와 헤어져 방으로 돌아온 레아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레아나, 넌 지금까지 너무 많은 힘을 썼어. 네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지?”
“당신 알고 있었어?”
“물론.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니까.”
“모리스…….”
“이건 널 위해 주는 선물. 네 힘을 통제해 널 살리려는 배려지. 하지만 거스르면…….”
그녀의 악몽은 항상 거기서 끝났다.
아니, 그 꿈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에서 깨고 나면 도무지 더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아련한 슬픔만 남았을 뿐.
레아나는 천재적인 마법사였다. 평범한 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의 마나를 움직여 마법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인간이었기에 많은 힘을 쓰면 쓸수록 몸이 망가져 갔다.
아무리 크고 튼튼한 자루라도 많은 물건을 담고 운반하다 보면 언젠가는 찢어지고 망가지게 되는 것처럼.
지난 몇 년간 그녀는 몸이 버텨낼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능력을 써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마법사로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아델이 제이드를 위해 치유 마법을 써달라고 했을 때도 외면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마법사가 아닌 자신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꿈속의 그는 이렇게 망가져 가는 그녀를 이해하고 안쓰러워 해주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동안 레아나는 마법사가 아닌 그저 여자일 뿐이었다.
상대가 모리스만 아니었다면 그건 결코 악몽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눈빛과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이대로 그와 영원히 함께…….
“미친! 정신 차려, 레아나!”
레아나는 짝,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양 뺨을 때렸다.
내일은 모리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이토록 한심한 생각이라니!
그래서 케니에게 최면 마법을 써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 꿈속의 일이 몽마가 만들어낸 수작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모리스를 마주했을 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건 크리스틴과 그가 지키려는 모든 사람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그래, 꿈속의 일은 몽마가 만들어낸 환영이 분명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고 해도 그래야만 했다.
모리스, 네 놈은 기필코 내가 죽여버릴 거니까!
레아나는 큰 컵 가득 채운 럼주를 비우고 다시 잠을 재촉했다.
***
1일 차.
‘여긴 어디지?’
레아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주변은 빼곡하게 자란 나뭇잎이 하늘을 가렸고, 발밑은 길게 자란 양치식물로 가득해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숲은 온통 뽀얀 안개로 가득해서 눅눅하고 눈앞이 흐릿했다.
아니, 눈앞만 흐릿한 게 아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머릿속도 흐릿해서 도저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됐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덜컥 겁이 났다. 이제 곧 날이 어두워지면 짐승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레아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스락!
작은 소리를 듣고 재빨리 돌아보았다.
어둑한 숲에 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둘 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드가 달린 로브로 감싸고 있었지만 얼핏 봐도 남자와 여자 같았다.
“레아나?”
잠시 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아나. 그건 자신의 이름일 것이다.
레아나는 반가워서 다가갔다.
“나를 알아요?”
후드를 쓴 두 사람에게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조금 기분 나빴지만 레아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숲은 더 기분이 나빴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그럼. 내 이름은 세이라, 그리고 넌 나의 하녀 레아나란다. 불쌍하게도 얼마 전 크게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기억을 모두 잃었지.”
레아나는 그제야 이해가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 거군요.”
“그래. 어서 가자, 레아나.”
세이라가 앞장서서 걷자 레아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세이라의 옆에 있던 커다란 남자가 그녀의 뒤에 바싹 따라붙었다.
그게 또 왠지 기분 나빠서 레아나는 세이라에게 속삭였다.
“저 남자는 누구죠? 뒤따라오는 게 마치 날 감시하는 것 같아요.”
세이라는 남자를 흘끗 보더니 들으라는 듯 말했다.
“레아나, 그는 너의 남편이야. 네가 또 길을 잃을까 봐 뒤에서 지켜주는 거지.”
“남편? 내 남편이라고요?”
레아나는 믿어지지 않아서 뒤따라오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후드에 반쯤 가려져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보랏빛 입술에, 웃는 입매가…… 무척 마음에 안 들었다.
어딘가 음흉하고 야비한 느낌이랄까.
‘저런 자가 정말 내 남편이라고?’
레아나 일행이 작은 마을의 입구에 도착하자 안개는 말끔히 사라졌다.
초저녁이라 마을에는 서서히 불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오가는 게 보였다.
세이라와 남자는 그제야 후드를 벗었다.
후드를 벗은 세이라는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의 미녀였다. 곱고 하얀 피부가 정말 귀족의 영애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귀족의 영애가 왜 이런 산속 마을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레아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세이라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성지 순례 중이거든. 그래서 주변에 사제들이 아주 많아.”
세이라의 말대로 대부분 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 나쁠 정도로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레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이라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다 함께 걱정했거든. 아마 기뻐서 그런 걸 거야.”
하지만 도저히 기뻐하는 얼굴로 보이지는 않았다.
“남편이라는 저 사람도 사제인가요?”
레아나는 곁눈질로 후드를 벗은 남자를 흘끗거리며 물었다.
얼굴을 전부 드러낸 그는 예상대로 험상궂고, 야비한 인상의 남자였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저런 사람이 사제일 리 없었다.
자신의 남편일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자신의 취향이 전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러자 세이라가 작게 속삭였다.
“저 사람은 네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야. 그 일을 계기로 서로 깊은 사랑에 빠졌고, 그는 너를 위해 사제가 되는 것도 포기했지.”
“말도 안 돼!”
레아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내가 저런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니…….
차라리 생명을 구해주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레아나가 복잡한 기분으로 남자를 쳐다보는 동안 세이라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어딜 가세요?”
얼른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믿을 건 세이라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이라는 레아나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놓으며 속삭였다.
“남편이 너와 둘만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널 찾느라 온 숲을 다 뒤지면서 꽤 고생했거든. 그러니 잘 대해줘, 레아나.”
냉정히 돌아선 세이라는 마을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제 레아나는 낯선 마을에, 낯선 남자와 단둘이 되었다.
자신의 남편이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눈길도 주고 싶지 않은 느낌의 남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레아나를 보며 히죽거리고 지나갔다.
자신이 뭔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된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자러 갈까, 레아나?”
남편이라는 남자의 말에 레아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직 초저녁밖에 안 됐는데?”
남자는 레아나의 어깨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레아나, 우린 지금 한창 신혼이거든. 그러니까 잔말 말고 어서 따라와.”
레아나는 어깨를 틀어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정말 당신이 내 남편 맞아? 내가 이렇게 무례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했다고?”
남자는 금방 험상궂은 표정이 되어 레아나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래, 넌 세이라의 하녀 나부랭이고, 네 목숨은 내가 구해줬으니까. 그래서 넌 그 빚을 갚겠다고 나와 결혼 했어! 그럼 이제 군말 없이 빚 갚을 차례겠지! 아무리 하녀 나부랭이라도 은혜를 모르는 건 짐승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더니 레아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
사락, 사락…….
오래된 수도원의 장서관.
책상 앞에서 책장을 넘기던 모리스는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장미 향기가 코끝을 은은하게 스치는 걸 보니 세이라일 것이다.
“숲의 경계에 누군가 들어온 것 같더군요.”
그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숲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주위에 뿌려져 있는 ‘망각의 안개’는 모리스가 쳐놓은 결계였다. 그러니 그 결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모리스도 느낄 수 있었다.
“맞춰봐요. 누가 걸려들었는지.”
세이라의 목소리가 잔뜩 상기되어 있었기에 모리스는 의혹 어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