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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외전. 망각의 숲에서(2) (153/155)


153. 외전. 망각의 숲에서(2)
2023.07.21.



 


“맞춰봐요. 누가 걸려들었는지.”

세이라의 목소리가 잔뜩 상기되어 있었기에 모리스는 의혹 어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맞아요. 당신 예상대로 레아나가 걸려들었죠. ‘사제들의 살육자’라고 불리던 마법사는 당신이 뿌려놓은 ‘망각의 안개’에 갇혀서 꼼짝없이 기억을 잃었죠. 그래서 내 하녀라고 해뒀어요. 순진한 얼굴로 믿는데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지 뭐예요.”

망각의 안개 속에 갇히게 되면 모든 기억을 잃고 자신의 존재조차 잊게 된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 경계를 드나들 때면 반드시 신성 마법이 걸린 특별한 로브를 걸쳤다. 그 로브로 온몸을 감싸지 않으면 그들 역시 레아나처럼 모든 기억을 잃게 될 테니까.

물론 그 안개를 만들어낸 모리스만은 예외였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세이라는 야비하게 눈웃음치며 대답했다.


“퍼거슨과 함…….”

탁!

책을 덮는 모리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지금 퍼거슨이라고 했습니까?”

퍼거슨은 이 마을 사냥꾼 출신이었다. 난폭하고 잔인한 성격이라서 수없이 사람을 죽이고, 여자들을 겁탈한 죄로 마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런 자를 모리스가 꺼내 준 것이다. 포로로 잡아 온 늑대 일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자였으니까. 살아 있는 짐승을 연구하려면 많은 피를 손에 묻혀야 했던 것이다.

물론 필요로만 할 뿐 모리스는 그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자가 기억을 잃은 레아나를 어떻게 다룰지는 뻔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퍼거슨이 레아나를 원하는 눈치라서 남편이라고 해뒀으니까. 특별한 선물을 주었으니 놈이 당분간 당신의 말을 잘 들을…….”

“쓸데없는 짓을 했군요!”

세이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리스는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모리스!”

“레아나는 특별합니다. 그런 취급을 하려고 불러들인 게 아니에요!”

밖으로 나가려는 그의 앞을 세이라가 가로막았다.


“레아나가 당신과 교황청에 무슨 짓을 했는지 잊었어요? 그 계집애만 아니었다면 지금 세상의 주인은 황제가 아닌 당신이었다고요! 그 계집애는 더한 짓을 당해도 분이 안 풀린다고요.”

“비키십시오!”

“아뇨, 싫어요!”

세이라는 양팔을 벌리고 서서 고개를 저었다.

모리스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스스스…… 공간이동 마법으로 사라져 버렸다.

***

벌컥!

낡은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남자가 나왔다.

퍼거슨과 레아나가 들어간 오두막을 다 같이 주시하던 사람들이 야비하게 웃었다.


“여, 퍼거슨 벌써 끝난 건가?”

“이거 새신부가 실망한 거 아닌지 몰라?”

키득대며 놀리던 사람들을 향해 퍼거슨은 한 걸음, 두 걸음 휘청대며 걷더니…….


“컥! 커흑!”

자신의 목을 움켜쥐며 숨이 막혀서 헐떡이다가, 그대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쓰러졌다.


“이봐, 퍼거슨!”

놀란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또 일부는 살벌한 표정으로 레아나가 있는 오두막을 향해 뛰어들었다.

스스스…….

그들의 앞에 모리스가 연기처럼 나타났다.


“모리스 사제님!”

모리스는 싸늘한 눈으로 발가벗은 채 숨진 퍼거슨을 응시했다.


“갖다 버리세요. 레아나는 내가 알아서 조치합니다.”

“예, 사제님!”

이곳에서 그는 교황과 다름없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복종하며 퍼거슨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걸 지켜보던 모리스는 차가운 표정으로 오두막 안으로 몸을 돌렸다.

이불이 흐트러진 침대 위에 레아나가 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찢겨진 옷, 입술과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모리스는 저도 모르게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나 침착하게 레아나를 향해 손수건을 내밀었다.


“닦아라.”

하지만 그녀는 소맷자락으로 얼굴에 흐르는 피를 스윽 닦아냈다.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마. 놈에게 맞아서 피가 나는 게 아니니까.”

“그럼?”

“몰라.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니까 놈이 갑자기 뛰쳐나가던걸. 그리고 내 몸에서 피가 흘렀어. 여기가 너무 아파. 그래서 그런가 봐.”

레아나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 터트리려는 것 같은 끔찍하고 기분 나쁜 통증이었다.

그런 레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리스가 말했다.


“갑자기 마법을 써서 그런 거야.”

그렇다고는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레아나였다. ‘사제들의 살육자’라는 악명이 자자한 대마법사.

그런데 고작 이 정도의 마법을 쓰고 이런 상태가 됐다는 건, 그녀의 몸이 많이 망가져 있다는 뜻이었다.

하기야 저 작은 몸으로 지금까지 그토록 엄청난 마나를 다뤄왔으니 몸이 멀쩡한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마법? 설마 나…… 마법사인 거야?”

하지만 레아나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이 꽤 신나는 얼굴이었다.


“그래.”

“……역시! 내가 하녀나부랭이었을 리가 없…….”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리는가 싶더니, 레아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고꾸라졌다.

***

눈을 뜬 레아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정신을 잃기 전에 마주친 그 남자였다.

남자 치고 꽤 곱상한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와 투명한 갈색 눈동자 때문인지 얼굴은 희다 못해 창백해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매우 차가워 보여서 말 붙이기조차 힘들 것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레아나는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자신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쪽이 내 취향인 건가?


“정신이 드나, 레아나?”

“기억은 안 돌아왔지만 정신은 들었어.”

“그럼 됐다.”

남자는 레아나가 누워 있던 침대 곁에서 단호하게 일어났다.

그게 레아나는 몹시 아쉬웠다.


“잠깐! 난 아직 안 된 거 같은데……!”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일어나 앉았다.


“뭐가?”

“난 아직 당신 이름도 못 들었어. 나이도, 하는 일도…….”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모리스 에터마티. 나이는 아마 너보다 9살은 많을걸?”

“와, 정말? 나랑 비슷한 또래인 줄 알았어!”

레아나는 깜짝 놀라서 모리스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긴 은빛 머리를 풀어내린 채 말간 청회색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는 그녀.

그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맑아서 모리스는 괜히 얼굴이 홧홧해졌다.


“네 나이를 알고 있기는 한가?”

“그러네. 한 열여덟쯤?”

“고맙군. 나를 십 대로 봐줘서. 물론 너도 철없는 십 대는 아니지.”

“그럼 당신은 설마 삼십 대? 생각보다 많이 늙…….”

모리스의 살벌한 표정에 레아나가 헤,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반말은 삼가도록 해.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것도.”

“왜, 부끄러워?”

“뭐?”

“얼굴이 붉어졌어. 열이 나는 게 아닌데 얼굴이 붉어지는 건 부끄럽다는 뜻이겠지?”

“그럴 리 없다.”

모리스가 완강하게 부인했지만 레아나는 오히려 씩 웃었다.


“지금 당신 눈동자가 흔들렸어. 그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대체 이 여자는 뭐지?

모리스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이 같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선 사람을 꿰뚫어 보았으니까.

마법사일 때의 그녀도 강적이었지만 어쩌면 지금이 더 강적인 것 같았다.


“멋대로 지껄이지 마. 난 감정 같은 거 없는 사람이니까.”

“말도 안 돼. 거짓말을 들켜서 화를 내면서 감정이 없다고?”

“너 같은 어린애를 더 상대했다간 바보가 될 것 같군.”

모리스가 결국 돌아서는데, 레아나가 등 뒤에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당신이랑 나, 어떤 관계였지?”

멈칫하는 그의 뒤에서 다시 레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조금전 마법으로 날 치유해준 거 맞지? 그러니 우리는 특별한 사이였던 게 분명해. 일단 같은 마법사이기도 하고.”

모리스는 다시 몸을 돌려 레아나를 직시했다.


“그래, 특별한 사이가 맞아.”

“역시!”

“너는 마법을 써서 사람을 죽였고, 이 마을에서 살인죄는 중형으로 다스리지. 그리고 나는 너를 처벌해야 하는 위치에 있고. 그러니 살려놓은 것뿐이야. 너를 심문하고 벌을 받게 해야 하니까. 정리하면 죄인과 심판자의 관계지.”

레아나가 발끈했다.


“놈은 죽어 마땅했어! 거짓말로 내 남편이라 속이고 날 겁탈하려고 했다고.”

“놈이 네 남편이 아니라는 증거는?”

“세이라는 그가 내 목숨을 구해줬다고 했어. 그리고 우리는 깊이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했지.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나를 때리고 억지로 안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아.”

“처벌하려면 세이라부터 해! 그 여자는 나더러 자기 하녀라고 했어. 그리고 놈이 내 남편이라고도 했고. 내가 마법사라는 걸 제대로 알려줬더라면 좀 더 주의를 했을 거야. 마력을 조절하지 못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없었을 거고.”

열심히 자신을 변호하던 레아나는 이내 풀죽은 얼굴로 덧붙였다.


“정말이야. 죽을 줄은 몰랐다고.”

“흠, 듣고 보니 그렇군.”

모리스가 수긍하자 레아나는 다시 기세등등해졌다.


“세이라, 만나기만 해봐, 아주 요절을 내버릴 테니!”

“그래서 세이라도 죽일 건가?”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럴지도.”

모리스가 피식 웃었다.


“뭐가 웃겨?”

“기억도 다 잃은 주제에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가 싶어서.”

“그러네.”

레아나는 다시 의기소침해져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곧 방긋 웃었다.

감정이 이리저리 튀는 게 정말 십 대 소녀 같았다.


“그럼 당신이 내 보호자를 해주면 되잖아. 당신은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거 같으니까”

“뭐?”

“게다가 우린 같은 마법사이기도 하고.”

모리스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여자는 뭘 믿고…….

그는 조금 전 사제들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레아나를 저대로 두실 겁니까?”

레아나가 의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제들이 쫓아와서 따졌던 것이다.

그녀는 크리스틴에겐 강력한 아군이었지만, 그만큼 사제들에게 가장 두려운 적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손에 죽은 사제들은 수를 셀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마을에 오자마자 사람을 해치지 않았던가?



“그럼 어찌하기를 바랍니까?”


“당연히 죽여야지요!”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망각의 숲으로 유인해서 다 함께 공격한다면 분명 죽일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얘기에 모리스도 동감했다. 레아나를 죽인다면 황제의 전력에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래요. 죽이는 게 좋겠군요. 하지만 그게 과연 최선의 방법일까요?”


“최선의 방법이 아니면요?”


“레아나가 우리 편이 된다면 어떨까요? 그 엄청난 힘을 황제에게서 빼앗아 우리가 가진다면 황제 따윈 아무것도 아닐 텐데.”


“그러면 더없이 좋겠지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게 만들어야지요.”

 
생각에 잠겨 있던 모리스는 결심한 듯 레아나를 응시하며 웃었다.


“그래, 우린 같은 마법사지. 그러니 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그래 줄 수 있어?”

“물론이야.”

“좋아,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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