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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외전. 망각의 숲에서(3) (154/155)


154. 외전. 망각의 숲에서(3)
2023.07.24.



 
2일 차.


“모리스, 모리스?”

아침이 밝자마자 레아나는 모리스와 약속한 장소로 왔다.

오래된 수도원의 장서관이라는데 매우 협소하고 서책이랄 것도 얼마 없었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서책이 레아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낡은 양장본 서책에는 붉은 글씨로 제목이 쓰여 있었다.


“이건 고대어……?”

레아나가 손을 내밀어 책장을 넘기려는데,


“손대지 마!”

모리스의 차가운 목소리에 레아나는 움찔하며 손을 걷었다.

레아나에게 다가온 모리스의 뒤로 하얀 사제복을 입는 세 명의 사제들이 보였다.


“모리스, 나 이 책을 왠지 알 것 같아.”

그 한 마디에 모리스와 그를 따라온 사제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 책을 안다고?”

“응.”

“그럴 리 없어. 이건 교황청에서도 비밀 서고 안에 감춰져 있었던 거야. 교황과 허락받은 몇 사람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서고였지.”

“그런 책을 왜 당신이 갖고 있어?”

“교황 성하는 돌아가셨고, 내가 차기 교황이니까.”

레아나는 못 믿겠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도 안 돼…… 교황청이 이렇게 허름하다고?”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이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됐으니까.


“황제가 교황을 죽이고 교황청에 있던 사제들도 모두 학살했지. 우리는 황제의 칼날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 숨어 있는 중이고.”

“황제……는 아주 잔인한 사람이구나.”

레아나의 말에 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늑대 일족이라 인간들을 싫어해. 이 세계를 짐승들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그러니 인간들을 수호하는 교황청부터 없애려고 했던 거야. 우리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맞서 싸울 준비를 하는 중이고.”

“모리스 당신 엄청난 일을 하고 있구나!”

레아나는 감탄하며 존경스럽다는 듯 모리스를 응시했다.

모리스는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지금의 레아나는 마치 막 알에서 나온 오리 같았다.

처음 만난 자신을 어미로 알고 졸졸 따라다니는 귀여운 새끼 오리처럼 그가 하는 말을 모두 다 믿었다.

‘사제들의 살육자’라 불리며 공포의 존재였던 그 무시무시하던 대마법사 레아나가 말이다.

모리스는 문득 레아나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

사람들을 믿지 못하던 교황은 어느 날 시동이라며 10살 남짓의 농아 소녀를 데려왔다.

그때 모리스는 소녀의 겁에 질린 표정 뒤로 언뜻언뜻 드러나던 비밀스럽던 눈빛을 보았다.

그게 묘하게 인상적이라서 자꾸 시선을 끌게 만들던 소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그 어린아이가 오랫동안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살아왔다는 건 시간이 꽤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교황청과 사제들은 결국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그 대단하던 레아나가 지금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다.

자신의 말이라면 모두 믿고 따를 것처럼 절대적 신뢰감을 담은 표정을 짓고서.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농아 소녀 행세를 하고 수년 동안 교황청을 속여왔던 아이였으니까.


“정말 이 책에 대해 아는 거야, 레아나?”

모리스는 다시 책상 위의 서책을 가리켰다.


“왠지 모르지만 언젠가 본 것 같아. 이 책은 고대어로 쓰여 있잖아. 나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거 같아.”

하기야 레아나는 오랫동안 교황의 시동으로 있었다. 그러니 교황을 따라 비밀 서고에 들어갔던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 맞아.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사제들은 흔하지 않지. 그러니 네가 큰 도움이 될 거야.”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에 레아나는 환하게 웃었다.


“돕고 싶어, 모리스. 어떻게 도와주면 돼?”

순간 모리스와 사제들이 비밀스럽게 눈빛을 마주쳤다.


“그러면 여기 이 내용을 해석할 수 있겠어?”

모리스는 책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몇 달 동안 문장이 지닌 의미가 해석되지 않아서 애를 먹던 페이지였다.

고대어로 쓰인 마법서들은 대부분 은유적이거나 암호 같은 내용들로 되어있었다.

그걸 완전히 이해하고 자신 것으로 만들어야만 마법의 주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레아나는 엄청난 마나를 움직이는 능력도 탁월했지만, 고대어를 해석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이건…… 거울의 책 같은데.”

진지한 표정 되어 한동안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거울의 책?”

“그래, 아마 이 책과 짝이 되는 다른 한 권이 더 있을 거야. 거기에 이 부분의 내용과 완전히 상반되는 단락이 있을 거고. 그 책과 함께 읽어야만 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거지. 내가 왜 이런 내용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그랬군!”

모리스를 비롯해 다른 사제들도 환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레아나의 표정은 오히려 굳어졌다.


“그런데 이 마법서로 뭘 하려는 건데? 여기엔 파멸과 저주의 문구가 가득 하다고.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위험한 책인 거 같아.”

잔뜩 걱정스러운 레아나와 달리 모리스는 상기된 얼굴이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전사들을 만들어 황제와 싸우게 할 거야.”

“설마 언데드 전사를 만든다는 거야?”

“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들을 만드는 거지.”

순간 레아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윽!”

 


“난 네 아버지를 언데드로 만들고 싶었거든. 그러면 교황청 최고의 병기가 됐을 텐데.”

 
모리스와 똑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윙윙 울린 것이다.

언젠가 그에게 들었던 것 같던 말.


“괜찮아, 레아나?”

“나 기분이 안 좋아. 잠시 나갔다 올게.”

모리스는 비틀대며 나가는 레아나를 얼른 쫓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사제들이 모두 그의 앞을 막아섰다.


“뭔가 기억이 나는 모양입니다. 더는 살려두면 위험합니다.”

“네, 이걸로도 충분한 도움이 됐으니 죽이셔야 합니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어서 결단을 내리십시오!”

사제들의 재촉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모리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사제님들의 우려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처리할 것입니다.”

 

***

밖으로 나온 모리스는 수도원의 정원을 서성이던 레아나를 보았다.

깊은 산속의 정원에도 봄은 찾아왔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레아나는 그 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소녀였던 레아나를 기억하던 모리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긴 머리를 풀어내린 모습으로 꽃을 바라보는 그녀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있었으니까.

대마법사, 사제들의 살육자,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 뒤에 감춰져 있던 눈부시게 사랑스러운 여인.


“몸은 좀 괜찮아?”

“…….”

대답 대신 레아나가 슬픈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모리스는 가슴이 조금 철렁했다. 사제들의 말대로 조금전의 일로 그녀가 다시 기억을 되찾았을지 몰랐으니까.

망각의 숲에 걸어놓은 마법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그녀 역시 마법사였다. 스스로 그 마법을 이겨낼 방법을 찾은 걸지도 몰랐다.


“모리스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돌아왔다.


“그건 왜 묻지?”

“모든 게 혼란스러워서. 난 기억을 잃었으니까. 지금 내가 믿을 건 당신뿐인데 당신이 나쁜 사람이면 큰일이잖아.”

“그렇겠군.”

“뭐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혼란스럽잖아.”

“그럼 좋은 사람이라고 할까?”

“응, 그렇게 말해줘. 당신은 차기 교황이니까 좋은 사람이 맞을 거잖아. 당신의 적은 나쁜 사람이 틀림없겠지?”

모리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분명한 건 나와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거지. 나를 따르는 대가로 안락한 삶과 행복을 안겨주면 더 좋겠고. 그러니까 나의 적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래야 죄책감 없이 싸울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날 죽이려는 거야?”

다시 또 생각지도 못한 질문.


“그게 무슨……?”

레아나의 투명한 청회색 눈동자가 그의 속을 꿰뚫을 것처럼 응시했다.


“조금 전 들었어. 당신과 사제들이 하는 얘기. 엿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야. 내 귀가 좀 밝은가 봐. 소곤거리는 소리가 다 들리더라고.”

모리스는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이다.

그녀는 늑대 일족이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감각이 예민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미안. 아까 그자들은 노파심이 심해서 그래. 너같이 뛰어난 마법사가 온전하지 않은 기억으로 뭔가 실수를 할까 봐.”

“무슨 실수?”

“…….”

모리스가 섣불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데 레아나가 대답을 재촉했다.


“말해줘 모리스. 나는 누구지? 당신들의 편이야, 아니면 적이야?”

“잠시 걸을까 레아나?”

“날 데려가서 죽이려고?”

모리스는 대답 없이 그저 앞장서서 걸었다.

그가 재촉하지 않았음에도 레아나는 당연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모리스도 그럴 거라는 걸 왠지 아는 것 같았다.

조금전 들은 대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그는 자신을 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아나는 겁이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모리스의 손끝을 붙잡자, 그는 뿌리치지 않았다.

그래서 레아나는 용기를 내어 그와 손을 맞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이던 남자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을을 벗어나고, 망각의 숲으로 향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던 사이였던 게 분명해. 그렇지?”

망각의 숲 앞에서 레아나가 물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 기억도 없는데, 그가 자신을 언제 죽일지 모르는데, 이토록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 우리는 서로 좋아하던 사이가 아니야.”

“그럼 나 혼자 당신을 좋아했던 건가?”

그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널 좋아했지.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생각해보니 그랬던 거 같아.”

망각의 숲에 뿌려진 짙은 안개가 그들을 스멀스멀 감싸기 시작했다.

레아나는 지금 이곳에서 들은 말을 곧 잊게 될 것이다.

설령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모두 꺼내 놓는다고 해도 다 잊게 되리라.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모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더없이 깊은 눈으로 레아나를 바라보았다.


“소녀였던 널 봤을 때부터였던 거 같아. 언데드가 된 스톤이 널 죽이려고 달려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널 살렸지. 그래, 사실 내겐 수없이 널 죽일 기회가 있었어.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그러지 못했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어. 그래서 이런 비참한 상황까지 몰린 건지도.”

그의 말을 듣는데 레아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진심이 가슴 깊은 곳에 와 닿았기 때문이리라.

기억하지 못해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서로의 마음이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나도 당신을 좋아했을 거야. 하지만 표현할 수 없었겠지. 우린 아무래도 적이었던 것 같으니까.”

“그래, 네 말대로 너와 나는 적이었어. 너는 나와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수없이 죽였지.”

“당신도 그랬겠지?”

“그랬을 거야.”

“우린 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연인이네.”

레아나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거 같군.”

“뭔가 꽤 로맨틱한걸. 시시한 연인이 아니라서 아주 좋아.”

“여전하군. 가시밭길을 자처해서 걷는 버릇은.”

“내가 그런 이상한 성격이었어?”

“그런 이상한 성격이었지. 넌 무슨 일이든 항상 목숨을 걸어. 마법을 쓰는 것도 그렇지. 자신이 망가지고 죽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아.”

“내가 망가지고 죽어 간다고?”

모리스는 레아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레아나, 넌 지금까지 너무 많은 힘을 썼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쓰면서 몸은 점점 망가져 가고 있지. 하지만 네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그래서였나보다. 마법을 쓰자마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고통스럽더니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던 것도.


“당신은 알고 있었어?”

“물론. 우린 적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그래서 그가 그토록 애달프게 느껴졌던 것이리라.

그 순간 레아나는 충동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가 적이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을 정말 죽인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이 뜨거운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모리스…….”

천천히 그의 입술과 제 입술을 맞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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