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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외전. 망각의 숲에서(4) (155/155)


155. 외전. 망각의 숲에서(4)
2023.07.28.



 
레아나는 충동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가 적이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을 정말 죽인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이 뜨거운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모리스…….”

천천히 그의 입술과 제 입술을 맞대었다.

조금 전 남편 행세를 하던 가짜가 달려들어 입 맞추려고 할 때는 끔찍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모리스의 입술과 맞닿는 순간엔 너무 떨려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나서 어지러웠다.

그래서 다시 입술을 떼는데 모리스의 눈과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 그의 눈이 몹시 뜨겁다는 걸 느꼈다.

조금은 겁이 났고, 조금은 아찔한 설렘…….

동시에 모리스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휘감더니, 두 몸이 맞닿을 만큼 바싹 끌어당기며 입술을 부딪쳐왔다.


“……!”

놀란 레아나가 미처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그는 더 깊이 입을 맞췄다.

아마 첫 키스인 것 같았다.

레아나에게 이 모든 것이 너무 낯설고, 해괴망측하며, 부끄럽고, 야릇한 건, 도저히 기억을 잃어서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데도…….

싫지 않았…… 아니 좋았다.

마치 구름에 올라탄 것처럼 기분이 붕 뜨고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고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뜨거움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열망밖에.

그래서 타오르고 재가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무모한 생각 밖에.

모리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누구의 손길에 의해서인지 모르게 서로의 옷가지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온몸을 받아 안는 푹신한 이끼와 뿌옇게 떠도는 안개.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두 사람은 거침이 없었다.

***

3일 차.


“괜찮아, 레아나?”

“응. 그런데 몸이 좀 이상해.”

“그럴 거야.”

모리스는 이끼 위에 나른히 누워 있는 은빛 늑대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정신을 차린 레아나는 자신이 어느새 아름다운 은빛 늑대로 변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 늑대 일족이었던거야?”

“응, 그중에서도 최고로 아름다운 늑대.”

그는 은빛 늑대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서로의 코끝을 비볐다.


“키스하고 싶어.”

“이미 충분히 했는데.”

“그래도 또 할래.”

“이런 모습으로는 안될 것 같은데.”

“그럼 이러면 돼?”

레아나는 어느새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은빛 머리카락이 신비롭게 넘실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모리스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레아나는 당황하며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얼른 주워서 몸을 가렸다.


“뭐야. 이제 와서 새삼 부끄러운 건가?”

“당연하지. 지금은 제정신이니까.”

부끄러워하며 발끈하는 레아나가 귀여워서 모리스는 나직이 웃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정말이야?”

“응.”

“난 당신 몸이 아주 잘 보이는데? 약골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무척 탄탄한 몸이었네.”

그러면서 레아나가 빤히 바라보자 모리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더니 보드라운 뺨에 초옥 입을 맞췄다.


“넌 늑대 일족이니까 눈이 밝아서 잘 보이는 거겠지.”

“그럼 당신은 내 몸이 정말 안 보인다는 거지?”

모리스는 웃음을 참으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대도.”

그러자 레아나는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들을 휙휙 던져버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목말라서. 근처에서 물 냄새가 강하게 나.”

“샘이 있어서 그럴 거야. 있어 봐. 가져올게.”

“싫어. 같이 물 마시러 가자, 모리스.”

“괜찮겠어?”

“늑대 일족의 체력을 뭘로 보고.”

그러더니 레아나는 앞장서서 숲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굽이치는 은빛 머리카락이 눈부셨고, 대리석 조각처럼 완벽하고 하얀 피부는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새벽의 숲은 서서히 어둠이 물러가고, 그녀의 존재는 청량한 이슬처럼 반짝였다.

모리스는 그 모습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를 재촉하듯 레아나가 돌아보며 웃자, 마치 홀린 사람처럼 쫓아서 달려갔다.

이 망각의 안개는 그에게는 효력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왠지 모든 것을 잊은 기분이었다.

이곳에 왜 왔는지 따윈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저 여자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만 또렷했다.

샘으로 온 두 사람은 물속에 나란히 비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빙긋 웃다가 다시 입을 맞췄다.

초옥. 초옥…….


“목마르다며?”

입술이 떨어지자 모리스가 놀리듯 물었다.


“지금은 당신 키스가 더 필요해.”

키스를 다시 재촉하듯 레아나가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마치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어찌나 요염하게 사람을 유혹하는지.

모리스는 타는 것 같은 갈증이 나서 목울대가 흔들렸다.


“키스로 안 끝날지 모르는데.”

“그럼 더 좋은데.”

“이런. 생각보다 야한 여자였네.”

레아나가 가만히 눈을 떠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 날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더 당신이 갖고 싶어져서.”

긴 속눈썹 아래 투명한 청회색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열망으로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은 몹시 낯설었다.


“내가 정말 널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안 그럼 내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거든.”

“그러지는 못할 거야. 이제 마법사로서 너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러자 모리스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의 살점을 깨물었다.

톡톡.

빨간 핏방울이 초록 풀 위로 떨어져 내렸다.


“뭐 하려고?”

“나는 이곳에서 널 살려 보낼 생각이야. 그러니 작별의 선물은 해야겠지.”

“작별의 선물?”

모리스는 피가 흐르는 엄지로 레아나의 길고 하얀 목덜미에 고대어를 적었다. 그것은 마치 붉은 목걸이처럼 보였다.


“ਈਓ੮ਬ…….”

그리고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목에 적힌 고대어가 점점 번지듯 몸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아나의 얼굴을 제외한 하얀 살결은 어느새 붉은 고대어로 뒤덮여갔다.


“무슨 짓이야, 모리스!”

당황한 레아나가 소리치자, 그의 얼굴이 금방 심판자처럼 엄숙해졌다.


“이건 널 위해 주는 선물. 넌 앞으로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될 거다. 우리 쪽의 위험요인을 제거하는 동시에 네 힘을 통제해서 널 살리려는 배려이기도 하지. 만일 내 뜻을 거스르고 마법을 쓰면 이 고대어가 살아 움직일 거야. 네 살을 먹어치우고 널 갈가리 찢어 놓겠지.”

“모리스……!”

레아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미안하다 레아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야. 너는 살려주더라도 마법사인 레아나는 살려둘 수 없으니까.”

그래야 레아나도 살리고, 그와 그의 동료들도 살 수 있었다.


“모리스!”

“……그러니까 제발 마법은 쓰지 마.”

모리스는 레아나의 두 뺨을 감싸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가. 나의 레아나.”

그가 돌아서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레아나를 휘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안개는 어느새 하얀 천이 되어 레아나의 몸을 감쌌고, 그녀의 몸을 뒤덮었던 고대어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레아나는 망각의 숲 밖으로 나와 있었다.

***



“이제 깨어나셔도 됩니다.”

케니의 목소리를 따라 레아나는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자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 모리스는 죽었다.

제 손으로 그의 숨통을 끊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늑대 일족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 레아나는 오히려 더 자주 그의 악몽을 꾸었다.

악몽에서 깨어나면 늘 베개가 젖어 있었고, 우울하고 무력한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래서 결국 케니에게 도와달라며 손을 내민 것이다.

그녀의 기억이 지워진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면 마법으로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꿈속의 악몽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인큐버스의 소행인지.


“이제 다 기억나신 겁니까?”

“네, 다 기억났어요.”

“그랬군요.”

케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레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아나는 그게 더 노여운 얼굴이었다.


“왜 묻지 않는 거죠? 그와 나 사이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레아나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감춰야 했고, 감추는 게 옳다는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서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나는 그를 사랑했어요. 아니, 우리는 서로 사랑했어요. 3일 동안 그 어떤 연인들보다 더…….”

강렬하고 절박하게…….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레아나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온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으니까.


“레아나 양…….”

“위로는 필요 없어요. 나는 슬퍼해야만 하니까. 그런 자를 위해 눈물 흘린다고 비난해도 좋아요. 하지만 내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을 내 손으로 죽였어요. 수많은 나의 동료들을 위해서. 나의 복수를 위해서. 그러니까 케니, 내가 슬퍼하도록 그냥 둬요. 이건 내 연인을 죽인…… 형벌이니까.”

 

***

밖으로 나온 레아나는 눈에 보이는 아무 말이나 올라타고 그대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아아악! 모리스 이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아! 아아악!”

말을 달리며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향해 비명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그와 사랑을 나눴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죽어가던 그의 얼굴도…….

오스월드 저택의 지붕 위에 나타난 레아나는 모리스와 마지막 결전을 치를 각오였다.


“10분 안에 모두 데리고 오스월드가를 떠나세요.”


“무슨 소리지?”

크리스틴이 물었지만 레아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고 나직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마법을 쓰면 온몸을 뒤덮은 고대어가 살갗으로 파고들어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만큼 그를 죽이고 싶었다.


“ঊਈਈպনঢ়…….”

공기가 점점 휘돌며 허공에 붉은 고대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모리스와 레아나를 사납게 휘감아갔다.

그녀는 회오리 너머로 보이는 크리스틴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아델의 애플파이는 언제나 최고였다고 전해주세요. 행복하세요, 두 분.”

정말이었다. 아델의 애플파이는 그녀에게 가장 따뜻하고, 가장 행복한 기억을 남겨주었으니까. 그러니 크리스틴과 아델이 정말 행복하면 좋을 것 같았다.


“무슨 짓이냐, 레아나! 그만둬!”

붉은 회오리 뒤로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 들려왔다. 그리고 붉은 회오리는 점점 거침없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거대한 태풍으로 변해갔다.

두 사람은 그 태풍의 눈 한가운데 있었다.

웅웅 거리는 바람 소리뿐 그곳은 무척 고요했다.

마지막 죽을 장소로는 아주 완벽했다.


“모리스, 이제 당신은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는 거야.”

레아나의 두 눈은 핏빛으로 충혈되었고, 코와 입에서도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리스 역시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니, 레아나 나는 너를 죽게 두지 않아.”


“뭐?”


“말했잖아. 너를 죽일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뭐, 그날 들었던 말은 다 잊었겠지만.”


“그럴 리 없어! 네놈이 왜?”

모리스는 대답 대신 온몸의 마지막 기운을 끌어모아 고대어 주문을 외웠다.


“ੴ੯ਫ਼ਬ” !”

그러자 레아나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 고대어가 점점 흐릿해지고, 심장을 칼로 후벼 파는 것 같은 고통도 사라졌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설마 모리스가 자신을 살려 준 건가 싶었다.

하지만 왜?


“글쎄, 내가 왜 널 살렸을까? 평생 궁금해했으면 좋겠는데.”

콰아아앙!

그 순간 태풍이 폭발하듯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동시에 모리스는 온몸을 날려 레아나를 감쌌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레아나는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 날 잊지 않을 테니까…….”

 


“모리스! 모리스!”

레아나는 목이 터지도록 울부짖으며 그 이름을 불렀다.

사무치도록 그립고,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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