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듭니까?2021.10.01.
“몸조심해야 해. 다치면 혼난다, 진짜.”
논산훈련소 앞은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들과 그 가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죽어도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시현도 결국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밥 잘 먹고. 혹시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꼭 전화하고.”
187cm에 육박하는 스무 살 청년이, 여태 시현의 눈에는 어린아이처럼만 보였다. 길에서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비쩍 마르고 작은 아홉 살 아이로.
“내가 민원 넣어서 혼내줄 테니까…… 흑!”
말하다 말고 결국 시현은 얼굴을 감싸버렸다. 어느덧 저보다 훨씬 작아진 일곱 살 위의 여자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태하는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머뭇머뭇 들어 올린 손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그녀의 머리칼에 닿지 못하고 애꿎은 점퍼 자락만 꽉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결국 시현의 귀에 와 닿은 것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뿐이었다.
“내가 빨리 제대하고 달려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울먹이는 시현을 두고 태하는 돌아섰다. [호국 요람]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문 안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시현은 눈물을 훔치며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녀가 키운 아이, 윤태하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이었다.
* 6년 후. 아침 아홉 시, 미래은행 3층 휴게실 안에 진한 커피 향기가 퍼졌다. 시현은 이왕 커피를 뽑는 김에 팀원들 것까지 여러 잔 챙겨서 사무실로 향했다.
“자, 모닝커피 아직 안 하신 분들 계신가요?”
활기차게 쟁반을 들고 들어서는데 왠지 팀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안 이랬는데? 시현은 옆자리 동료, 이미주 대리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뭐야?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간밤에 미국 증시 난리 났었거든. 아니나 다를까, 우리도 장 열자마자 곤두박질이야. 어쩜 하나같이 파란불이니?”
미주가 휴대폰으로 온통 파란 숫자로 도배된 주식 앱 화면을 보여주며 한숨을 지었다.
“경제신문 보니까 당분간 오를 가망도 없대.”
시현은 그제야 이 기묘한 분위기의 이유를 깨달았다. 어쩐지 팀장님부터 평사원까지 죄다 어두운 얼굴로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더라니.
“시현 씨는 주식 안 한다고 했지?”
요즘 직장인 중에 주식을 안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흔한 삼송전자 주식 한 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팀에서 시현이 유일했다.
“주식 계좌도 없어, 난.”
“아니 남들 다 하는데 시현 씨는 왜?”
“옛날에 나랑 친한 동생 중에 족집게 같은 애가 있었거든.”
당시 시현은 주식에 푹 빠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 재미 삼아 사본 주식이 무려 네 배로 올라서, 투자금 오백만 원이 이천만 원으로 불어난 것이 원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었는데, 그때는 워렌 버핏이라도 된 것처럼 신이 났다. 알고 보면 나는 타고난 투자의 귀재가 아닐까? 그래서 그동안 회사 다니며 모은 돈에 신용대출까지 끌어서 통 크게 오천만 원을 더 투자했다. 당시 한창 뜨거웠던 중국 주식에. 그로부터 정확히 3개월 후, 상하이 종합지수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폭락을 기록한다. 10분의 1토막이 돼버린 주식을 바라보며, 시현은 그제야 입대할 때 태하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으라’고 했던 말뜻을 깨달았다. 아, 주식 하지 말라는 소리였구나!
“대박, 스무 살짜리가 중국 주식 폭락을 미리 예견했단 말이야?”
“걔가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경제나 뭐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았거든. 이왕 말해줄 거, 좀 자세하게 해주지.”
줘도 못 받아먹었던 자신을 한탄하며, 시현은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나 그때부터 주식에 손도 안 대잖아.”
“걔는 지금 뭐 하는데? 어디 증권사 애널리스트라도 됐어?”
“몰라, 어디서 뭘 하는지.”
시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입대하는 날, 훈련소 앞에서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편지는 몇 번 주고받았는데, 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 받을 때쯤 갑자기 소식이 뚝 끊겨서 지금까지 6년 동안 연락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팀 회의가 시작되어 두 사람의 잡담은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내일 새 본부장님이 오시기로 했어요.”
팀장의 말에 팀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남들은 은행에 다닌다고 하면 으레 돈 만지는 직업일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시현은 UX디자이너(*앱 제작 시 사용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고객의 행동과 니즈를 분석하고, 필요한 기능이 최적화되어 수행되도록 전체의 설계도를 그리는 직무)였다. 현재 앱스토어에서 ‘미래은행’을 검색하면 나오는 애플리케이션은 무려 열일곱 개. 입출금, 증권, 보험, 카드, 대출, 부동산 등의 서비스가 모두 제각기 다른 앱에 담겨 있다. 그중 주요 앱 7가지를 하나로 통합한, 이른바 ‘원앱’을 만드는 작업을 위해 태스크포스가 꾸려졌다. 일명 ‘원앱팀’이라 불리는 이 팀에, 시현도 합류해 있었다. 원래 개발 목표는 6개월이었는데, 시작한 지 5개월이 다 되어 가도록 아직 작업은 프로토타입 수준에 멈춰 있었다. 특단의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벌써 한 달 전부터 돌았는데, 드디어 IT 부문 총괄 리더인 디지털전략본부장이 새로 온다는 것이다.
“어느 부서에 계시던 분이세요?”
“연세는요?”
질문이 쏟아졌지만 팀장은 고개만 저었다.
“글쎄, 외부 인사 영입이라는데 나도 아직 정확하게 들은 게 없어서.”
* 퇴근 후, 시현은 회사 근처 식당에서 우진과 저녁식사를 했다. 두 살 위의 남자친구인 우진과는 만난 지 6년째. 올해 안으로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회사는 걸어서 오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원래는 이렇게 근처에서 만나서 함께 저녁을 먹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우진이 부쩍 바빠지면서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다. 야근은 물론 주말에까지 출근한다고 해서, 마지막 데이트를 언제 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오늘도 무려 열흘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먹는 둥 마는 둥 설렁탕을 뒤적이며, 시현은 물었다.
“오빠. 흥신소 같은 거 말이야, 많이 비쌀까?”
낮에 태하 생각이 난 후로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했다. 곧 결혼도 하는데, 최소한 태하가 내 결혼식에는 와야 할 것 아닌가. 이제는 흥신소에라도 의뢰해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음.”
우진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바람 같은 건 한 삼백만 원이면 잡아준다던데.”
순간, 우진이 흠칫하며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뭐?”
과한 반응에 시현은 오히려 놀라서 우진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피울 시간을 좀 주고 말해라.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는 사람한테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우진에게, 시현은 당황해서 말했다.
“내가 언제 오빠 바람피운댔어?”
“그럼?”
“태하 찾으려고 흥신소 물어본 거잖아.”
“아, 미안, 미안. 내가 제대로 못 들었네.”
그제야 우진은 안도한 얼굴을 하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시현아. 다음 주 수요일 저녁에 시간 되지?”
우진의 질문에 시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작년에 혼나더니, 그래도 잊어버리진 않고 있었네? 뜨거웠던 연애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미지근해졌다. 급기야 작년에는 우진이 시현의 생일까지 잊어버리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뭐든 처음 같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익숙해지는 것도, 편안해지는 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연인 사이에 생일까지 잊어버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닐까. 시현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비워놨지, 그럼.”
그러나 우진의 다음 말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날이 우리 엄마 생신이거든. 부모님이 너 그날 인사 오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러고 보니 전에도 자신의 생일과 우진의 어머니 생신이 같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그때는 그냥 와 신기하다, 하고 웃어넘겼는데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시현은 굳은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빠, 그날 내 생일인 건 알지?”
“당연히 알지. 근데 부모님이 그날 보는 게 좋겠다고 그러시잖아. 마침 생신이니까 너 맛있는 것도 좀 먹이고 그러고 싶으신가 보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혹시 앞으로 내 생일은 평생 시어머니한테 빼앗기고 마는 거 아닐까? 시현의 떫은 표정을 눈치챘는지, 우진은 얼른 덧붙였다.
“정 그러면 다른 날로 하자고 말씀드릴게. 그날 네 생일이기도 하니까, 너도 친구들이랑 선약 있다고 하면 되지 뭐.”
하지만 덥석 그러자고 할 수도 없었다. 남자친구 부모님께 정식으로 첫인사를 드리는 날인데, 친구하고 약속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면 자칫 당돌해 보이지나 않을까.
“됐으니까 그날 뵙는 걸로 해. 이왕이면 어른들 말씀 따르는 게 좋겠지 뭐.”
“그럴래?”
우진은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헤벌쭉 웃었지만 시현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분명 처음 사귈 때는 우진이 너 아니면 못 산다는 식으로 쫓아다녀서 만났다. 대학도 직장도 연봉도 밀릴 것 없고, 나이도 시현이 두 살이나 어린데.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으면서 왠지 자꾸만 약자가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올 초부터 결혼 얘기가 본격적으로 오가기 시작한 후로는 더했다. 자꾸만 상대의 페이스에 끌려가는 느낌이랄까. 그런 복잡한 기분을 알 리 없는 우진은, 슬쩍 시현의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왜, 우리 엄마 아빠 만날 생각하니까 긴장돼?”
“조금.”
“진짜 좋은 분들이니까 마음 푹 놔. 알잖아? 우리 집 아들만 셋인 거. 딸처럼 예뻐해주실 거야.”
시현은 대답 대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어느덧 다 식어버린 설렁탕이 한층 더 느끼하게 느껴졌다. *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회사 로비로 들어서던 시현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누군가가 눈에 확 띄었기 때문이었다. 얼핏 봐도 185센티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와 등. 뒷모습이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체격부터가 눈길을 확 끄는 타입이었다.
‘저런 기럭지가 우리 회사에 있었단 말이야? 왜 몰랐지?’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신입사원 연수가 끝났다고 했다. 아, 신입사원인 모양이구나. 시현은 살금살금 다가가서 슬쩍 상대의 옆에 섰다. 뒷모습이 이 정도면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곁눈질로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시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
겉모습으로는 좀처럼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상대였다. 주름 하나 없는 피부와 조금도 무너지지 않은 얼굴선을 보면 분명 이십 대인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과 엄숙한 표정, 클래식한 디자인의 슈트를 보면 그보다도 훨씬 위로 보였다. 상대는 한눈에 보아도 혼혈이었다. 검은 머리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 뚜렷한 음영을 드리우는 눈가와 높고 곧은 콧대는 화려한 느낌을 주었고, 꾹 다물린 입술은 반대로 단정하고 우아했다. 그야말로 이십 대와 삼십 대, 서양인과 동양인의 장점만 한데 모아서 빚어놓은 것 같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시현이 놀란 것은 상대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키운 아이. 6년 동안 그토록 찾아 헤맸던 윤태하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있었다.
“…….”
시현이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있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타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시현은 문이 닫히기 직전에 뛰어들었다. 다짜고짜 와락 껴안자 태하가 흠칫 놀라 몸을 굳히는 것이 느껴졌다.
“나쁜 자식.”
품 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커다란 몸을 꽉 껴안고, 시현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어쩜 그렇게 연락 한번 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간 찾으려고 별별 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방부에서는 혈연도 아닌 사람에게 개인정보를 알려줄 수 없다고 했고, 제대했을 때쯤 집에 찾아가 봤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SNS에서 태하의 이름을 검색해 봐도 동명이인만 수백 명 쏟아질 뿐이었다. 그래서 시현은 마음 한구석에 늘 돌덩이를 매달고 살았다. 혹시나 군대에서 사고로 잘못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날에는 밤잠도 못 잤다.
“……보는 눈이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감정의 극한을 달리고 있는 시현의 귓가에, 그지없이 차분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내가 마음에 들었으면, 그냥 말로 해도 됩니다만.”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꿈에서도 잊어 본 적 없는 얼굴이, 생소한 눈빛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벽한 타인의 눈빛.
“태하야……?”
침착하게 옷깃을 바로잡는 태하를, 시현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미련 없이 내리는 태하를, 시현은 정신없이 불렀다.
“잠깐만……!”
그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태하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본부장님.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본부장님……? 굳어져 있는 시현을 별난 여자도 다 있다는 듯이 힐끗 쳐다보고, 태하는 등을 돌렸다.
“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