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법이 상당히 고전적이군요2021.10.05.
첫 출근한 새 본부장이 대표이사실에 올라가 있는 동안, 원앱팀 사무실은 이미 목격자들로 난리가 나 있었다.
“새 본부장님 오신 거 봤어?”
“대박. 저 얼굴로 왜 연예계로 안 빠졌지?”
시현은 그저 입만 다물고 있었다. 충격이 너무 심해서 정신이 다 멍했다. 태하가 신입사원이 아니라, 본부장이라니. 게다가 나를 몰라보다니. 난리가 난 것은 비단 원앱팀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 팀 저 팀, 각자 수집한 정보를 나누기 바빴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새 소식이 속속 들려왔다.
“인사팀 수정 씨가 그러는데, 본부장님 올해 스물여섯 살이래!”
“네? 한 삼십 대 초반은 된 줄 알았는데.”
“아니 대체 그 나이에 어떻게 본부장이 됐지? 회장님 손자라도 되나?”
그때 어디선가 헐레벌떡 달려온 김 대리가 숨넘어가게 외쳤다.
“대박 사건! 왜 작년에 유니온TA 지분 천억에 매각했다는 기사들 봤잖아?”
유니온TA는 전국 초/중/고등학교의 급식 메뉴를 알려주는 앱인 ‘급식천국’으로 시작해서 청소년 전용 중고 거래 앱, 청소년 커뮤니티 앱 등을 서비스하는 회사였다. 일반인들은 존재조차 잘 알지 못하지만, 청소년들에게는 필수 앱들로 자리 잡으면서 어마어마한 광고료를 벌어들이는 회사로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1인 개발로 시작해서 사원수가 총 열 명도 안 되는 작은 기업인데, 그 유니온TA가 작년에 대형 교육회사에 지분 49프로를 천억에 매각하며 자회사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서 IT업계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었다.
“그게 왜요?”
“그 유니온TA 대표가 바로 이번에 오시는 새 본부장님이래!”
시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분명히 나도 그 기사 봤었는데, 왜 몰랐지? 얼른 휴대폰을 꺼내서 검색해보니 정말로 당시 기사에 떡하니 대표 윤태하라고 쓰여 있었다. 단지 사진은 나와 있지 않아서, 기사를 보고도 그 윤태하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분명 고등학교 때부터 태하가 무슨 앱 개발을 한다고 들은 기억은 있다. 그때는 그냥 취미로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심지어 최근 기사 보니까 지분 매각 대금으로 받은 본사 주식이 지금 떡상해서 세 배가 됐다네?”
윤태하의 경력을 알게 되자 여론은 완전히 바뀌었다. ‘어떻게 본부장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대체 왜 왔는가’로.
“자기 회사 일도 바쁠 텐데 대체 여긴 왜 온 거지?”
“원앱 개발 때문에 구원투수로 잠깐 온 거라던데요.”
“그래도 그렇지. 나 같으면 3천억 있으면 다니던 회사도 때려치울 텐데.”
“3천억이 뭐야? 30억만 있어도 안 다닌다.”
“어나더 레벨이다, 진짜. 남들은 신입사원도 될까 말까 한 나이에.”
“근데 아까 보니까 살짝 혼혈 같지?”
“그러게요. 체격부터가 절대 토종이 아니시던데.”
“잠깐, 혹시 앞으로 영어로 보고하라고 하면 어떡하죠?”
“영어로 회의 진행하자고 하는 거 아냐?”
팀원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영어 잘 못 해요.”
순간 시선이 집중되는 바람에 시현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걸 강 대리가 어떻게 알아?”
“어, 그냥 아침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드렸거든요.”
“처음 본 사람한테 다짜고짜 영어로 인사했단 말이야?”
과장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네. 외국 손님인 줄 알고……. 근데 한국말로 대답하시더라고요.”
“그렇다고 영어 못하는 줄은 어떻게 알아?”
걔한테 영어 가르친 게 저니까요. 차마 그렇게 말은 못 하고 시현이 우물쭈물거리는데, 마침 그 순간 화제의 주인공이 사무실에 등장했다. 방금까지 호떡집에 불 난 것 같았던 사무실은 일제히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긴장한 얼굴로 일어서는 팀원들을 둘러보며, 태하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디지털전략본부장으로 일하게 된 윤태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당당한 체격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더블브레스트 슈트와 꽉 조여 맨 넥타이. 묵직한 눈빛과 진지한 표정. 예의 바르되 딱딱한 말투와 중저음의 목소리. 그 어디를 보아도 이십 대 청년 특유의 치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삼십 대 초반으로 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가 몇 살인지 뻔히 알고 있는 시현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고 있으니까. 하기야 태하는 어릴 때부터 무척 어른스러웠다. 중학교 3학년쯤 됐을 무렵에는 이미 교복만 벗으면 어딜 가도 성인으로 볼 정도였다. 이어서 팀원들이 하나씩 자기소개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원앱팀장을 맡고 있는 김철호입니다.”
팀장부터 시작해서 직급 순서대로 하나하나 인사를 하고, 시현의 차례가 되었다.
“강시현 대리입니다. UX디자인을 맡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태하는 짧게 대꾸했다. 역시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하는 태도였다. 시현은 제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 장난치는 걸 거야. 오랫동안 연락 끊고 지낸 게 미안해서 저러는 거야. 원앱팀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직함은 디지털전략본부장입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원앱팀 지원을 위해 온 셈입니다. 앞으로 원앱 개발 프로젝트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생각이므로, 여러분도 저를 원앱팀의 일원으로 생각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상사 위에 상사를 모시게 된 셈인 팀원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일단 현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주쯤 첫 평가 회의 가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새 본부장은 그렇게 말하고 첫인사를 마쳤다. 태하가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고, 시현은 눈치를 봐서 슬쩍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다행히 복도에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애매하게 말을 걸자 태하가 뒤돌아보았다.
“뭡니까?”
“화 안 낼 테니까 이제 그만해. 너한테도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 아냐.”
태하가 한숨을 지었다.
“이것 봐요. 관심이 있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하는 게 어떻습니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장난으로라도 태하가 제게 이런 말을 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너 혹시 군대에서 사고 같은 거 당했니?”
시현은 숨넘어가게 물었다.
“기억상실 같은 거 말이야. 뭔가 기억에서 사라진 부분 없어?”
도저히 그렇게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내 기억은 멀쩡합니다만.”
태하가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 기억 속에 강…….”
시현의 사원증을 흘깃 보고 나서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강시현 씨는 없습니다. 그리고.”
딱 잘라 말하고, 태하는 완벽한 입술 한쪽 끝을 살짝 끌어올렸다.
“수법이 상당히 고전적이군요.”
“……!”
“좀 더 세련된 방법을 연구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 퇴근 후, 시현은 제일 친한 동료인 이미주 대리를 붙들고 술을 마셨다. 도저히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게 오늘 본부장으로 온 윤태하라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적당히 각색을 가미했다.
“그러니까, 6년 만에 만난 동생이 시현 씨를 몰라본다, 이거지?”
삼십 분 동안 떠든 이야기를 재주 좋게 한방에 정리하고, 미주는 시원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네, 그거.”
“뭐?”
시현은 흠칫 놀라 미주를 쳐다보았다.
“그 동생, 코인으로 대박 나서 하루아침에 벼락부자 됐다며? 괜히 알은체했다가 귀찮게 달라붙을까 봐 그러나 보지 뭐.”
“글쎄 걔 내 손으로 키웠다니까?”
고등학생 때, 방임아동이었던 아홉 살짜리 아이를 길에서 주웠다. 그때부터 매일 집에 들러 밥 해 먹이고 옷 빨아 입히며 키우다시피 한 아이가 태하였다. 태하 뒷바라지를 하느라, 시현은 대학 시절 내내 연애는커녕 엠티 한 번을 못 가 보고 아르바이트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키운 아이가 나를 일부러 모른 척한다고? 돈 때문에?
“아니야, 걔가 나한테 그럴 리가 없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기억상실밖에 없는데, 그건 또 아니라며?”
“응.”
“그럼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 맞지 뭐.”
술기운을 타고 서서히 배신감이 밀려왔다. 정말 그런 거야?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났다.
“아니, 내가 돈 달랬어? 하다못해 술을 한잔 사달랬어? 왜 사람을 모른 척을 하고 난리냐고, 내가 뭘 어쨌다고!”
빈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미주가 위로랍시고 말했다.
“시현 씨가 이해해. 원래 성공한 사람들은 사람 가려 사귄다잖아.”
그 말에 시현은 진심으로 발끈했다.
“내가 가려야 될 사람이야?”
그래, 사람 가려 사귈 수는 있다. 그런데 윤태하가 가리는 사람의 범주에 내가 들어가면 안 되지. 세상 사람 다 들어가도 나는 예외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쁜 자식.”
시현은 분풀이하듯 술을 마셨다. 미주는 얘기는 잘 들어 주지만 술은 안 마시는 쪽이었다. 결국은 소주 두 병이 고스란히 시현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사장님, 여기 한 병 더요!”
빈 병을 짤짤 흔들며 외치는 시현을, 미주가 말렸다.
“아유, 그만 마셔. 내일 출근 안 할 거야?”
결국 한 병 더 시키는 데 실패하고, 시현은 미주의 손에 이끌려 술집을 나왔다.
“혼자 2차 가지 말고 얌전히 집에 들어가. 알았어? 내가 삼십 분 후에 시현 씨 집에 들어갔는지 확인한다?”
미주는 반협박을 섞어 말하고 나서야 시현을 놓아주었다.
“에이, 아직 초저녁인데 먹다 말았네.”
미주와 헤어진 시현은 아쉽게 돌아서서 터덜터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 미래은행 출근 첫날.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어서야 겨우 태하는 보고 있던 자료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사무실에서 나오는 태하를 보고, 본부장실 문 앞에 앉아 있던 젊은 남성 비서가 얼른 일어서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퇴근하십니까, 본부장님.”
태하는 흠칫 놀랐다. 여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미안합니다. 비서가 있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만.”
태하의 회사인 유니온TA는 워낙 인원도 적고, 태하 자신이 일절 외부 노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케줄 조정할 일도 별로 없어서 비서라는 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래은행에 오면서 처음 생긴 비서의 존재조차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내가 따로 지시하지 않는 이상, 퇴근 시간 되면 알아서 먼저 퇴근하도록 하세요.”
“예, 본부장님.”
비서는 자연스럽게 태하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
‘내 가방은 내가 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려다 태하는 그만두었다. 앞으로도 별로 시킬 일이 없을 텐데 이런 거라도 하게 놔두지 않으면 비서 입장도 곤란하지 않을까. 복도에는 이미 불이 거의 꺼져 있었다. 어둑어둑한 복도를 걷는 태하를, 비서가 한 걸음 뒤에서 따랐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중간에 마주친 여사원이 인사를 해 와서 태하는 별 생각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까지 수고가 많습니다.”
계속해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에 비서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방금 본부장님께 인사드린 사원은 개발팀 이보라 씨입니다. 저희 미래은행 여신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사실 태하는 방금 인사한 여자의 얼굴 따위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렸다. 만약에 눈이 세 개고 입이 두 개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관심이 없었다. 비서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걷던 태하는, 무심코 창밖을 쳐다봤다가 걸음을 멈췄다. 통유리로 된 복도 창을 통해 버스정류장이 내려다보였다.
“…….”
태하가 창밖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 비서는 찔끔해서 덧붙였다.
“아, 물론 본부장님은 관심이 없으시겠지만요.”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태하는 비서의 손에서 가방을 급하게 빼앗아 들었다.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의 여신은 지금, 어두운 버스 정류장에 혼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