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교복을 입은 나의 여신 (3/181)

#3. 교복을 입은 나의 여신2021.10.08.

3월 중순, 봄이라지만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싸늘하다. 얇은 봄 재킷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찬바람에 몸서리를 치면서 시현은 우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6551941737696.jpg- 오빠, 나 술 많이 먹었는데 좀 데리러 와주면 안 돼?

금세 답장이 왔다.

16551941737702.jpg- 미안, 나 오늘도 야근이야.

그럼 그렇지, 하고 픽 웃으며 시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처음 사귈 땐 데리러 오지 말라고 해도 자기가 부득부득 우겨서 오더니, 지금은 술 많이 먹었다고 해도 이런 식이지. 버스정거장의 벤치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데 전화가 왔다. 우진인가, 하고 얼른 받았는데 들려온 목소리는 작은어머니의 것이었다.

16551941737707.jpg- 나다.

작은어머니는 전화를 받자마자 안부도 생략하고 물었다.

16551941737707.jpg- 그 남자랑은 어떻게 돼가니? 부모님은 찾아뵈었고?

마치 빚쟁이 독촉하는 것 같은 기세에 시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날짜를 잡아두기를 다행이었다.

16551941737696.jpg“다음 주에 찾아뵙고 인사드리기로 했어요.”

16551941737707.jpg- 단정하게 차려입고, 성의껏 선물 준비해서 가. 괜히 책잡히지 말고.

16551941737696.jpg“네, 작은어머니.”

16551941737707.jpg- 그래, 우리 집에는 언제 인사 올 거니?

16551941737696.jpg“저부터 먼저 인사드리고 나면 곧 날짜 잡아서 알려드릴게요.”

16551941737707.jpg- 최대한 서둘러. 그래야 얼른 상견례 하고 올해 안에 식 올릴 거 아니니?

사촌동생인 아현은 올해 스물여덟이었다. 작은어머니는 아현이 대학생일 때부터 이미 의사니 변호사니 사업가니 줄줄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정작 여태 결혼은 하지 못했다. 사업을 하는 시현의 작은아버지는 남의 눈을 죽도록 신경 썼다. 그래서 무조건 언니인 시현부터 먼저 결혼시켜야 한다고 버티고 있었다. 부모 잃은 조카딸을 두고 자기 딸부터 먼저 시집보냈다간 사람들이 손가락질할까 두렵다는 이유였다. 덕분에 올해 초에 세배하러 갔다가 시현은 작은어머니에게 붙들려 크게 혼이 났다.

16551941737707.jpg[그 남자, 너랑 결혼할 생각 없는 거 아니니?]

16551941737696.jpg[아니에요, 작은어머니. 올해는 꼭 하기로 약속했어요.]

16551941737707.jpg[정신 똑바로 차려, 얘. 너 그 남자 놓치면 끝이야. 여자 나이 서른셋이면 선 시장에서도 잘 안 받아준다고!]

작은어머니는 발을 동동 굴렀다.

16551941737707.jpg[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에 피해 끼칠 거니? 너 때문에 우리 아현이까지 나이만 먹어가잖아!]

하루빨리 치워버리고 싶은 짐 덩어리. 서른세 살의 강시현은, 그런 존재였다.

16551941737696.jpg“네 작은어머니. 곧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자 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버스 유리창에 뽀얗게 어린 입김을 손끝으로 살짝 문지르자 버스정거장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키와 넓은 어깨가 눈에 익었지만 시현은 픽 웃고 고개를 저었다. 에이, 본부장님 씩이나 되신 분이 쓸데없이 왜 정거장에 서 있겠어. 낮에 보았던 태하의 모습을 떠올리자 왠지 씁쓸해졌다. 나는 이렇게 초라해졌는데, 너는 그렇게 빛나고 있구나.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끼고 있는 자신이 더 초라해서, 시현은 눈을 감고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16551941752926.jpg

  * 아무리 생각해도 태하가 돈 때문에 자신을 일부러 모른 척한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현은 인터넷을 이 잡듯이 뒤졌다. 기억상실은 총체적 상실과 부분상실로 나눌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 특정 인물에 대한 기억, 혹은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만 선택적으로 지워질 수도 있단다. 눈이 번쩍 띄었다.

16551941737696.jpg‘그래, 나에 대한 기억만 사라졌을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자기가 기억상실인 줄도 모르는 거지!’

생각 끝에 시현은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 이거면 사라졌던 기억도 한방에 돌아오지 않을까? 결심을 하고 본부장 사무실로 향하는데,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16551941752962.jpg“강 대리님!”

돌아보는 순간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날씬한 몸매에 굵게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 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화사한 블라우스에 플레어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미인이 시현을 향해 반가운 듯이 뛰어왔다. 바로 미래은행 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개발팀 후배, 이보라였다.

16551941737696.jpg“보라 씨.”

보라 역시 시현과 같은 UX디자인을 맡고 있었다. 재작년에 보라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시현이 회사 내 유일한 UX디자이너였다. 즉 보라는 시현이 직접 키운 후배였다. 보라는 처음부터 시현을 강아지처럼 졸졸 따랐고, 시현도 보라를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원앱팀에 오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보라와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16551941752962.jpg“어디 가세요?”

16551941737696.jpg“어, 나 잠깐 본부장님 사무실에.”

시현은 들고 있는 것을 슬쩍 등 뒤로 감추며 대답했다.

16551941752962.jpg“아, 네. 잘 다녀오세요.”

보라가 약간 씁쓸한 표정을 하는 것을, 시현은 금세 알아차렸다.

16551941737696.jpg“왜 그래? 보라 씨 본부장님한테 뭐 서운한 거 있어?”

16551941752962.jpg“어제 잠깐 마주쳐서 인사드렸는데, 저를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아서요.”

시현은 귀가 번쩍 띄었다.

16551941737696.jpg“왜? 혹시 아는 사이야?”

왠지 보라는 제대로 대답하려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16551941752962.jpg“그냥 예전에 어디서 몇 번 봤어요.”

시현은 하마터면 외칠 뻔했다. 그래, 역시 기억상실이 맞았어!

16551941752962.jpg“뭐, 인사 정도 한 게 전부니까 못 알아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시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보라 같은 미인과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다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 이건 분명히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게 맞다. 태하의 사무실로 향하는 시현의 걸음에 자신감이 더해졌다. * 기껏해야 1년 계약으로 온 본부장 자리인데 여기저기 불러대는 곳은 많았다. 어제는 대표이사, 오늘은 또 전무가 불러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16551941768247.jpg[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솔직히 말해봐요. 윤태하 대표 같은 사람이 미래은행에는 어떻게 오게 된 겁니까?]

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는 태하는, 그저 엷은 미소로 얼버무렸다. 한 시간 가까이 쓸데없는 이야기에 시달린 끝에 겨우 풀려나서 사무실로 돌아오자 비서가 정중히 인사하며 맞이했다.

16551941768247.jpg“본부장님 오셨습니까.”

1655194176826.jpg“수고가 많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비서가 말했다.

16551941768247.jpg“안에서 원앱팀 강시현 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1655194176826.jpg“예?”

16551941768247.jpg“온 지 한 십 분 정도 됐습니다. 말씀이 길어지시는 것 같아서, 언제까지 세워둘 수가 없어서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만.”

비서는 뒤늦게 태하의 눈치를 보았다.

1655194176826.jpg“왔으면 왔다고 나한테 연락을 하지 그랬습니까.”

16551941768247.jpg“하지만 전무님하고 말씀 중이신데 어떻게…….”

1655194176826.jpg“앞으로 강시현 씨가 오면 내가 누구랑 있든지 바로 연락하세요.”

그는 심호흡을 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반가워 보이지 않게, 마음을 들키지 않게. 사무실 가운데 놓인 소파 위에, 작은 어깨를 한 여자가 고개를 옆으로 꺾고 잠들어 있었다. 그가 이 회사에 온 이유의 전부인 여자가.

1655194176826.jpg“…….”

태하는 조용히 다가가서 곁에 앉았다. 깨우지 않게 숨죽여,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쌍꺼풀이 없는 눈. 아담한 모양의 코. 도톰한 입술. 어디 한 군데 예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정도로 예뻤다. 하루 종일 시현과 같은 사무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새삼 신기했다. 나 같으면 숨도 제대로 안 쉬어질 것 같은데. 문득 시현의 손이 눈에 띄었다. 삼십 대 여자의 손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칠어진 작은 손. 그녀의 손이 저렇게 된 것은, 반 이상 제 탓이었다. 그 손을 잡아서 입 맞추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태하는 눈길로만 가만히 어루만졌다.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느라 테이블 위에 도시락이 놓여 있는 것도 한참 만에야 깨달았다. 열어보니 김밥이 들어 있었다. 달랑 오이와 참치, 마요네즈만 들어 있는 가느다란 김밥. 초등학교 2학년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시현이 처음으로 소풍 때 싸준 김밥이었다. 그게 어찌나 맛있었는지, 커서도 가끔씩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다른 재료를 더 넣어준대도 싫다고 우기는 태하를, 시현은 이상한 애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만들어주었다. 기억을 떠올리게 하겠답시고 이걸 만들었을 생각을 하니 우습고도 귀여워서 가슴이 다 시큰거렸다.

1655194176826.jpg‘내가 당신을 어떻게 잊겠어.’

태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16551941737696.jpg[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어쩜 그렇게 연락 한번 없이……!]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부둥켜안고 고백해 버릴 뻔했다. 나도 보고 싶었다고,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위기였다. 진심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모른 척을 해버렸다.

1655194176826.jpg[내가 마음에 들었으면, 그냥 말로 해도 됩니다만.]

시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가 따라오며 태하야, 태하야, 하며 매달리는 게 좋았다. 생판 남을 보듯 쳐다보는 눈빛에 안달하는 게 미치도록 짜릿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아예 끝까지 모른 척하고 다가가 보면 어떨까. 그녀가 아는 어린 동생 윤태하가 아닌, 본부장 윤태하로서. 되든 안 되든, 태하는 마지막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다. 잠에 취해 자꾸만 뚝뚝 떨어지는 고개가 안쓰러워, 태하는 조심스레 제 어깨에 그녀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 가만히 실려 오는 무게가 눈시울이 시큰해질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16551941768247.jpg“본부장…….”

마침 들어오던 비서가, 태하를 보고 움찔했다.

1655194176826.jpg‘쉿.’

태하는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대서 비서의 입을 막았다. 비서를 손짓으로 물러가게 하고, 최대한 몸을 낮췄다. 잠든 여자가 제 어깨에서 조금이라도 편안히 쉴 수 있게. * 야심차게 준비한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김밥 한 개를 입에 넣고,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시현을 향해 본부장은 말했다.

1655194176826.jpg[요즘 세상에 도시락이라니, 역시나 참 고전적인 수법이군요.]

더 먹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그는 도시락을 밀어놓으며 턱짓을 했다.

1655194176826.jpg[다음번에는 좀 더 참신한 방법으로 부탁합니다.]

결국 시현은 터덜터덜 돌아 나와 버렸다. 등 뒤에서 본부장이 소리 없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까맣게 모른 채로.

16551941737696.jpg‘대체 어떻게 해야 기억이 돌아오지?’

김밥만 주고 오려고 했던 건데 깜빡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이십 분이나 걸렸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온 시현은 머리를 싸맸다. 뭔가 더 센 한 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격 요법 같은 걸 쓰면 좋을 텐데. 대체 어떻게 해야…….

16551941811665.jpg“시현 씨, 이것 좀 봐.”

그때, 미주가 시현의 눈앞에 휴대폰을 들이밀며 히죽거렸다.

16551941811665.jpg“저번 주에 동생이랑 놀이공원 갔다가 빌려 입고 찍은 거야. 웃기지?”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고 시현은 속으로 외쳤다. 이거다! * 다음 날, 퇴근길.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태하는 작게 한숨을 지었다. 오늘은 원앱팀과 함께 처음으로 회식을 갖는 날이었다. 자신의 환영회인 셈이다. 몇 시간 동안 시현과 같은 자리에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자꾸만 눈길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말을 걸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술은 최대한 자제해야겠다고 태하는 결심했다. 자칫 조금이라도 이성이 흐트러졌다간 팀원들 다 보는 앞에서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고백할 판이다.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차 문을 열고 올라타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16551941737696.jpg“태하야!”

흠칫 놀라 돌아본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17년 전의 시현이었다. 날씬한 몸에 꼭 맞는 단정한 교복. 화장기 없는 얼굴. 질끈 묶은 머리. 검정색 책가방.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태하의 눈에, 일곱 살 위의 여고생은 말 그대로 책 속에 나오는 여신처럼 보였다. 먼 훗날, 눈 감는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모습.

16551941737696.jpg“나 알아보겠어? 응?”

그 모습 그대로인 그녀를 본 순간, 그토록 다짐했던 것들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16551941737696.jpg“태하야?”

놀란 여자를 품에 꽉 껴안고, 태하는 눈을 감았다.

16551941828697.jpg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