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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어났으면 깨우지 그랬습니까 (4/181)

#4. 일어났으면 깨우지 그랬습니까202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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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은 지하주차장에서 이제나저제나 태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16551941896025.jpg“왜 안 내려와, 얘는.”

차 뒤에 웅크리고 숨어 있자니 다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일어나서 다리라도 펴고 싶었지만 시현은 꾹 참았다. 자칫 다른 사람에게 들켰다가는 변태로 몰리는 수가 있다. 아까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서, 계단을 이용해서 지하주차장까지 내려오는 길에 누가 볼까 봐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시현은 고등학교 시절 교복을 입고 있었다. 추억 삼아서 여태 갖고 있던 것이었다. 일부러 화장도 지우고, 머리도 뒤로 묶고, 백팩도 멨다. 태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즉 처음 만날 때 모습 그대로 꾸며 본 것이었다. 지하 주차장이 워낙 어두우니까 대충 그때랑 비슷하게는 보이지 않을까? 참을성 있게 잠복한 지 약 삼십 분 만에 저만치서 태하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시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차 문을 열려고 하는 태하를, 시현은 뒤에서 불렀다.

16551941896025.jpg“태하야!”

시현을 본 태하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시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6551941896025.jpg“나 알아보겠어? 응?”

시현을 한참 쳐다보던 태하가, 갑자기 성큼 다가서더니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16551941896025.jpg“태하야?”

깜짝 놀란 시현을 제 품 안에 숨기듯 몸을 돌리며, 태하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51941896042.jpg“쉿. 누가 옵니다.”

시현은 기겁을 해서 수풀 속에 머리를 박고 숨는 꿩처럼 얼른 태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자칫 누가 봤다가는 회사 못 다니게 된다!

16551941896025.jpg“…….”

태하의 품 안에서 한참 숨을 죽이고 있다가, 시현은 문득 생각했다.

16551941896025.jpg‘근데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가슴이 넓었지?’

넓고, 단단하고, 따뜻한 품이었다. 내가 키운 그 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두근, 두근, 두근. 귀가 맞닿아 있는 가슴에서 터질 것 같이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좀 이상한 부하 직원을 상대로 심장이 이렇게 뛸 것 같지는 않은데. 드디어 나를 알아본 게 틀림없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그래, 네가 나를 언제까지 몰라볼 리 없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잠시 후, 포옹을 푼 남자의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16551941896042.jpg“확실히 참신하긴 한데.”

교복 입은 시현을 바라보며, 태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16551941896042.jpg“미안하게 됐군요. 내가 그런 쪽 취향은 또 없어서.”

16551941896025.jpg“태하야!”

그러나 태하는 이미 용건은 끝났다는 듯 돌아서고 있었다.

16551941896042.jpg“그럼 이따 회식 자리에서 봅시다.”

  * 윤태하 본부장 환영 회식 자리. 남들은 메이저 은행에 다닌다고 하면 부러워하지만, 사실 미래은행의 복지는 그다지 자랑할 바가 못 되었다. 회식만 해도 삼겹살이 국룰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회식 메뉴는 무려 한우. 아니나 다를까 본부장 사비로 쏘는 거라고 했다. 심지어 새 본부장은 모두가 착석한 직후 이렇게 선언했다.

16551941896042.jpg“사양 마시고 드시고 싶은 거 얼마든지 시키시면 됩니다.”

덕분에 회식 분위기는 시작부터 화기애애했다.

16551941910997.jpg“저어, 본부장님. 본부장님께서 유니온TA 대표라는 게 사실입니까?”

어느 용감한 팀원의 물음에 본부장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1896042.jpg“그렇습니다만.”

얘기를 듣고도 여태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본인의 인정에 난리가 났다.

16551941910997.jpg“너무 멋있으세요, 본부장님!”

16551941910997.jpg“저 같으면 벌써 회사 때려치우고 몰디브 가서 모히또나 마시고 있을 텐데.”

이런저런 실없는 소리 끝에, 드디어 모두가 가장 궁금해했던 질문이 나왔다.

16551941910997.jpg“근데 본부장님, 진짜 저희 회사 왜 오신 거예요? 본부장님 회사 일도 바쁘실 텐데.”

태하는 말없이 술잔을 들어 비웠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에 사람들이 일제히 긴장해서 숨을 삼켰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이렇게까지 젊은 상사를 모시게 되면 보통 ‘어린놈이’ 어쩌고 하며 반감을 품을 만도 한데, 최소한 원앱팀 안에서는 아무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경력이 대단한 이유도 있겠지만, 원래 본인이 가진 분위기가 그랬다. 태하는 늘 어른스러웠다. 말수가 적고 몸가짐이 단정해서, 학교 선생들은 물론 그의 친아버지조차도 태하를 대하기 어려워했다.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현뿐이었다. 역시나 태하가 에둘러 대답을 거부하자 아무도 감히 왜 왔느냐고 두 번 묻지는 못했다. 대신에 넉살 좋은 마당발 김 대리가 얼른 병을 들어 태하의 빈 잔을 채웠다.

16551941910997.jpg“한 잔 받으시죠, 형님.”

김 대리는 시현과 입사 동기로, 올해 서른다섯 살이었다.

16551941910997.jpg“왜 돈 많으면 형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주책없는 농담에 당황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야 이 또라이야!’ 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놀랍게도 정작 윤태하 본인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16551941896042.jpg“재미있는 말이네요.”

덕분에 잠시 싸했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이때다, 하고 미주가 곁에서 거들었다.

16551941933954.jpg“잘생기면 오빠라는 말도 있잖아요.”

16551941896042.jpg“그건 더 마음에 드는데요?”

태하는 미주를 향해서 빙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참고로 미주는 시현과 동갑이었다. 외계인 스펙에다 무뚝뚝해 보이는 젊은 본부장이 의외로 주책없는 농담을 잘 받아주니 팀원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16551941910997.jpg“본부장님 완전 멋지세요!”

16551941896042.jpg“고맙습니다.”

시현은 구석에서 조용히 배알이 뒤틀렸다. 나한테는 맨날 썩은 표정으로 대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들한테는 저렇게 잘 웃어주고! 화가 나서 시현은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16551941910997.jpg“거 오늘은 본부장님도 계신데 좀 천천히 마셔, 강 대리. 또 취해서 전남친 찾지 말고.”

팀장이 놀리듯 말했다. 시현은 굳은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16551941896025.jpg“아니 팀장님, 제가 뭘 어쨌다고…….”

16551941910997.jpg“강 대리님 술만 취하시면 아무나 붙잡고 우시잖아요. 태하야,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하시면서.”

16551941910997.jpg“어, 그러고 보니까 전남친 이름이 본부장님 성함이랑 똑같네?”

동료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거렸다. 시현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작 태하는 자신을 기억도 못 하는데, 여태 저만 그토록 애타게 가슴앓이하고 있었다는 게 분하고 부끄러웠다. 당사자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 있어서 더 그랬다.

16551941910997.jpg“강 대리, 혹시 전 남친 때문에 여태 시집 안 가고 버티고 있는 거 아냐?”

16551941896025.jpg“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시현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애써 우아한 표정을 지었다.

16551941896025.jpg“저 곧 결혼해요. 다음 주에 남자친구 부모님한테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가기로 했어요.”

우와아, 하는 환성이 식당 내를 가득 메웠다.

16551941910997.jpg“오 그래? 드디어 강시현 씨 시집가는 거야?”

툭하면 혀를 차며 ‘어이구, 저 화상을 누가 데려가’ 하던 팀장이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원앱팀 꾸려지기 전부터 오랫동안 같은 개발팀에 있었던 분이다. 평소 시현을 아껴 주는 상사라 그냥 허물없이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들을 때마다 은근히 오기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저 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꼭 결혼을 하고 만다!

16551941910997.jpg“어머, 강 대리님 축하드려요!”

16551941910997.jpg“결혼식은 언제야?”

여기저기서 시현에게 관심이 쏟아지는 가운데, 상석에 앉은 태하는 입술만 꾹 다물고 있었다.

16551941910997.jpg“강 대리 남자친구 공기업 다닌다고 하지 않았나?”

16551941910997.jpg“이야, 일등 신랑감이네.”

16551941910997.jpg“아이고, 노처녀 드디어 가는구나. 자, 한 잔 받아!”

사람들이 앞다투어 시현에게 축하주를 따라 주었다. 미주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16551941933954.jpg“본부장님도 강시현 씨 결혼식 때 참석하실 거죠?”

태하는 차갑게 되물었다.

16551941896042.jpg“제가 거길 왜 가야 합니까?”

순간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싹 조용해졌다. 말을 꺼낸 미주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16551941933954.jpg“죄송합니다. 본부장님 바쁘신데, 제가 괜한 소리를…….”

시현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상 미주보다 더 민망한 것은 시현이었다. 그래,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결혼식에 태하가 오지 않을 생각을 하니 허무해졌다. 친구나 동료가 백 명이 오고 천 명이 온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 유일한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 그 안에 없는데.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팀장이 짐짓 활기찬 목소리를 냈다.

16551941910997.jpg“자, 자. 본부장님, 다 같이 건배 한번 하시죠.”

16551941896042.jpg“원앱팀이니까 원 샷 가지요.”

딱 못 박아 놓고 태하는 건배사를 불렀다.

16551941896042.jpg“그럼 건배하겠습니다. 원앱 프로젝트 성공을 위하여.”

16551941985626.jpg“위하여!”

덕분에 분위기는 금세 돌아왔지만, 한번 가라앉은 시현의 기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 손으로 키운 아이에게 면전에서 무시를 당하는 기분이란, 당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왜 네가 나를 잊어버렸겠어. 너한테는 잊고 싶은 기억이니까 그런 거겠지. 성공하니까 가난하고 초라했던 시절 따위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거겠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기억나게 하겠답시고 김밥을 싸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교복까지 꺼내 입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시현은 입을 꾹 다물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덕분에 회식 자리가 파하고 나올 때쯤에는 완전히 취해서, 몸조차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

16551941933954.jpg“시현 씨 괜찮아?”

16551941896025.jpg“나 완-전 괜찮아. 걱정 딱 붙들어 매.”

16551941933954.jpg“이리 와. 내가 택시 잡아줄게.”

시현은 부축하는 미주의 손을 뿌리쳤다.

16551941896025.jpg“됐어. 나 오빠가 데리러 올 거거든?”

시현은 비틀거리며 걸었다. 가면서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았다.

16551941896025.jpg“그렇지. 바쁘신 우리 김우진 씨가 순순히 전화를 받아 줄 리가 없지.”

피식피식 웃으며 시현은 버스정거장의 벤치에 털썩 걸어앉았다. 똑바로 앉으려고 애를 쓰는데, 자꾸만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마터면 그대로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뻔한 순간, 누군가가 시현의 팔을 꽉 붙들었다. 놀라서 올려다보니 태하가 서 있었다.

16551941896025.jpg“태하야!”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작정 태하의 목에 매달렸다. 조금 화난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16551941896042.jpg“곧 결혼할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시현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옷깃을 쥐고, 시현은 안타깝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어떻게든 눈을 맞추려 했다.

16551941896025.jpg“너 나 모르겠어? 응? 정말 못 알아보는 거야?”

그래도 태하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시현은 결국 태하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서 주먹을 쥐어 가슴을 때리고 또 때렸다.

16551941896025.jpg“네가 어떻게 날 잊어. 어떻게 네가 그럴 수가 있어……!”

잠시 후, 머리 위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16551941896042.jpg“……이러면 내가 포기를 못 하잖아.”

단단한 팔이 그녀를 마주 안아 왔다.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순간, 태하가 자신을 안고 있는 것만이 반갑고 기뻤다. 따뜻한 품에 기대서 시현은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겨버렸다. *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시현은 눈을 떴다. 한 이불을 덮고 돌아누워 있는 남자의 벗은 어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진 오빠 어깨가 언제 저렇게 넓었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현은 입을 열었다.

16551941896025.jpg“오빠, 나 언제 데리러 왔…….”

남자가 으음, 하면서 이쪽으로 돌아누운 순간. 시현은 입을 꽉 틀어막고 새어 나오는 비명을 삼켰다.

16551941896025.jpg“……!”

잠든 남자는 다름 아닌 태하였다. 한참 동안 굳어져 있다가, 시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텔 객실로 보였다. 심지어 자신은 속옷 차림이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도주가 급했다. 시현은 살금살금 일어나 빠르게 옷을 주워 입었다. 그러나 채 블라우스 단추를 다 잠그기도 전에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겼다.

16551941896042.jpg“일어났으면 깨우지 그랬습니까.”

귓가에 따스한 숨결이 닿는 순간, 시현은 얼어붙었다.

16551941896042.jpg“아니면,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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