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젠 내가 관심이 생겨 버렸는데.2021.10.15.
“일어났으면 깨우지 그랬습니까.”
귓가에 따스한 숨결이 닿는 순간, 시현은 얼어붙었다.
“아니면, 한 번 더?”
시현은 불에 덴 사람처럼 질겁을 하며 태하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너 미쳤니? 대체 뭘 했다고 한 번 더야!”
확 밀쳐내진 태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샤워 가운을 걸친 그가 팔짱을 끼고 시현을 노려 보았다.
“설마하니 책임 안 지겠다, 이겁니까?”
“뭐?”
“모른 척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무슨 책임을 져!”
시현은 펄쩍 뛰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취해서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인데, 잘 생각해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기억이 안 나기는 강시현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안 나긴 하지만…….”
“그런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죠?”
“넌 남자가 아니니까!”
시현은 외쳤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네가 지금 기억이 어딘가 잘못돼서 모르는 모양인데, 너랑 나는 남녀 사이가 아니야. 무인도에 너랑 나랑 단둘이 떨어진대도, 아니, 세상이 멸망해서 마지막 남은 남자가 너라도 내가 너하고 잘 일은 없다고!”
태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현은 남은 블라우스 단추를 빠르게 잠그고, 바닥에 굴러 있는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어젯밤엔 내가 술에 취해서 폐를 끼쳤나 본데, 사과할게. 그래도 너랑은 아무 일도, 죽어도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 말고. 씻고 빨리 출근이나 해.”
태하를 남겨 두고, 시현은 발소리를 울리며 객실을 나왔다. * 시현이 나가고, 태하는 그대로 침대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젯밤. 2차를 어디로 갈까, 의논하느라 바쁜 팀원들을 두고 태하는 돌아섰다. 그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거리를 걸었다.
[저 곧 결혼해요. 다음 주에 남자친구 부모님한테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가기로 했어요.]
사실은 회식 자리에서 시현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계속 제정신이 아니었다. 결혼을 한다. 강시현이. 가끔 사람을 시켜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봤기 때문에 이미 알고는 있었다. 여태 6년 전 그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직접 결혼 소식을 듣자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하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입대를 선택한 것은 오로지 시현 때문이었다. 그때 시현의 나이가 벌써 스물일곱. 다행히 그때까지 남자친구는 없었지만, 언제 어떤 놈이 채갈지 몰라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고백하자니 군대 문제가 걸렸다. 어쨌든 군대부터 갔다 오는 게 제일 급하다고 태하는 생각했다. 시현은 어떻게든 태하를 설득해서 대학에 보내려 했다.
[대학부터 가고, 군대는 나중에 휴학하고 가도 되잖아. 여태 열심히 공부한 게 아깝지도 않아?]
그러나 태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시현과의 나이 차이 7년. 그 세월을 따라잡으려면 대학 따위 사치를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빨리 군대에 갔다 와서,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서 강시현 앞에 당당한 남자로 서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입대할 때 한 말은, 당시의 그로서는 최선을 다한 고백이었다.
[내가 빨리 제대하고 달려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제발 2년만 다른 남자 만나지 말고 날 기다려 줘. 기도하는 심정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시현은 2년은커녕, 단 100일조차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입대 후 100일이 지나고, 첫 휴가를 받자마자 태하는 군복 차림 그대로 시현에게 달려갔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집 앞에서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안겨 키스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오늘 꼭 들어가야 돼?]
[나 외박하면 작은어머니 난리 나셔. 알면서.]
그때 남자를 바라보던 시현의 표정을, 태하는 여태 잊지 않고 있었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봐 왔지만, 그렇게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으니까. 태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현의 행복이었다. 그녀의 행복에 비하면 제 가슴앓이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거야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니까. 그래서 태하는 그날 이후로 시현의 앞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미래은행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시현이 바로 미래은행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까이서 그녀를 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서 승낙하면서도, 뭘 어쩌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결혼이라니……. 태하는 이제야 제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저 가까이서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뭘 어쩌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아니, 치졸한 변명이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놈에게서 그녀를 빼앗고 싶었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정작 그 여자는 여전히 나를 남자로도 보지 않는데! 목 안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태하는 애써 삼켰다. 어젯밤, 술에 취해 제 품에서 잠들어버린 시현을 호텔로 데려와 침대에 눕혀 놓을 때까지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잠든 여자를 밤새 실컷 바라볼 수 있어서 기뻤다. 엉뚱한 생각이 든 것은, 새벽녘에 시현이 벌떡 일어나더니 제 손으로 옷을 훌훌 벗어버린 후였다. 자다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놀라서 얼른 벗은 몸에 이불을 덮어 주면서, 태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래서 일부러 아침에 연인처럼 굴어 본 건데, 그녀는 질색을 하며 그를 밀어냈다.
[무인도에 너랑 나랑 단둘이 떨어진대도, 아니, 세상이 멸망해서 마지막 남은 남자가 너라도 내가 너하고 잘 일은 없다고!]
그 정도인가, 내가. 그렇게까지 가능성이 없는 건가. 태하는 괴로움에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한참 동안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앉아 있다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출근할 시간이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거울을 바라보며 눈빛에서 감정을 지우고, 애타는 마음을 슈트 안에 꼭꼭 감췄다. 본부장 윤태하의 얼굴을 한 거울 안의 자신을 바라보며, 태하는 다짐했다.
‘이대로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어.’
* 택시를 타고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향하며 시현은 어젯밤 일을 더듬어 보았다. 버스정거장에 앉아 있는데, 태하가 왔던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 후의 기억은 그저 새카맣기만 했지만 시현은 추호도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억이 나든 안 나든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점에는 자신이 있었다. 태하가 어릴 때 천둥번개를 무서워해서, 그런 날은 집에 전화해서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몇 번인가 태하의 집에서 같이 자준 적이 있다. 그럴 때 태하는 시현의 품에 꼭 안겨서 잠들곤 했다. 본부장이든 뭐든, 몇 살이 되었든, 몸이 아무리 커졌든 그녀에게 태하는 어린 동생 윤태하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은 옛날 껴안고 잠들었던 그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우진에게 미안하지도 않았다. 뭐, 알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 말은 안 할 거지만.
[아니면, 한 번 더?]
터무니없는 대사를 떠올리고 시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중에 태하가 기억이 돌아와서, 제 입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면 죽고 싶어질 것이다. 어쨌든 태하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시현은 다짐했다. 자신이 보는 태하는 내가 키운 아이일 뿐이지만, 그가 보는 자신은 그냥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것 없는 상대일 테니까.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옆에 있으니 당연히 잤다고 생각한 거 아닌가.
‘그나저나 걔는, 겨우 하룻밤 잔 여자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나?’
시현은 문득 생각했다.
[일어났으면 깨우지 그랬습니까.]
연인처럼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이던 목소리를 떠올리자마자 갑자기 얼굴이 확 뜨거워지는 바람에, 시현은 허둥지둥 택시기사를 향해 외쳤다.
“아저씨, 저 여기서 내려 주세요!”
머릿속이 복잡해서 올 때까지만 해도 미처 몰랐는데,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 점점 속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제 너무 마신 후유증이었다.
‘나도 북엇국 끓여 주는 아내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현은 불편한 속을 안고 도로 집을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누룽지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자칫하면 지각할 판이라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시현이 혼자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회사와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였다. 서른 즈음부터 작은어머니의 결혼 독촉이 너무 심해지는 바람에 견디다 못해 회사 근처로 독립한 지 어언 3년이었다. 도로 택시를 타고 회사 로비에 도착하자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하는 중이었다.
“잠깐만요오!”
다행히 안에 타고 있는 것은 친하게 지내는 개발팀 정 과장이었다. 헐레벌떡 달려가자 정 과장이 혀를 차며 다시 문을 열어 주었다.
“일찍일찍 좀 다녀라. 거 말만 한 처녀가 맨날 뛰어다니고.”
“좋은 아침입니…… 우욱.”
남성용 스킨 특유의 독한 알코올 냄새에 인사하다 말고 그만 헛구역질이 나왔다.
“야 강 대리, 너 지금 내 얼굴 보고 구역질했냐?”
정 과장이 눈을 부라렸다.
“죄송해요, 과장님. 제가 어제 너무 달리는 바람에, 스킨 냄새만 맡아도 쏠려요.”
엘리베이터가 멈췄지만 시현은 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약국에 가서 숙취 해소제라도 사먹어야겠다 싶어서였다. 방금 맡은 스킨 냄새 때문에 속이 제대로 뒤집어졌다. 도로 1층 버튼을 누르자마자 시현은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더니, 누군가가 타는 기척과 동시에 상쾌한 향기가 밀려들었다. 순간 뒤집어지던 속이 확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 실례요.”
시현은 무작정 상대의 팔을 붙들고 옷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향수 냄새인지 섬유유연제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약간 씁쓸하면서도 산뜻한 것이, 마치 파인트리와 라임을 섞은 것 같은 향기였다.
“……!”
상대가 흠칫 놀란 듯이 팔을 빼려 했지만 시현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층이면 어차피 아는 사람인데 신세 좀 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죄송. 저 좀 살아야겠어요.”
시현은 옷소매에 얼굴을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제가 어제 너무 달리는 바람에 속이 뒤집어져서…… 아, 냄새 진짜 좋다.”
그러나 상대는 인정도 사정도 없었다. 매몰차게 팔을 뿌리쳐져서 아 너무하네, 하고 생각한 다음 순간. 향기가 확 진해졌다. 상대가 시현을 자기 품으로 바짝 끌어당긴 것이었다.
“이쪽이 나을 겁니다.”
제 가슴에 시현의 얼굴을 묻게 하며, 태하가 속삭였다.
“향수는 여기다 뿌렸으니까.”
시현은 깜짝 놀라서 그를 밀쳐내고 뒷걸음질 쳤다.
“괘, 괜찮습니다!”
다행히 그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 허둥지둥 내리려 하는데, 손목을 붙잡혔다.
“어쩌지?”
시현의 귓가에, 유혹하듯 낮은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이젠 내가 관심이 생겨 버렸는데.”